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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동차공업을 한단계 발전시킨 박룡익

편집/기자: [ 정현관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7-26 13:52:43 ] 클릭: [ ]

항일전쟁이 곧 승리를 맞이하게 되던 1945년 8월, 장춘시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여난 박룡익은 태여난지 50일만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왕청으로 가게 되였고 그후로 대학교 입학전까지 줄곧 연변에서 생활했다.

1964년 박룡익은 흑룡강성 치치하얼에 있는 동북중형기계학원에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교 생활이 갓 일년을 넘기게 되던 1965년 8월 ,당시 중국과 구소련의 관계가 긴장해지면서 박룡익이 다니던 학과 전체가 감숙공업대학에 편입되였고 부득히 박룡익은 머나먼 감숙성으로 구학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졸업하고 1981년에 감숙알루미니움공장에서 장춘제1자동차공장 집체관리처로 일터리를 옮겼고 1985년부터 자동차 주물제조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박룡익

지난 세기 8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전면 발전단계에 진입했다. “자동차공업의 발전과 신형 자동차 생산에 있어서 가장 관건적인 기술이 바로 금형(磨具)기술입니다.” 면서 “그때 우리나라의 금형기술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기술면이나 응용면에서 전면적으로 뒤떨어진것이 현실입니다.”고 박룡익은 소개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실형주물(实型铸造)기술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실제 생산에 도입하면서 일본의 자동차공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형주물기술이란 금형제작에 있어서 시작이자 현대화 기술을 도입 할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다. 이런 실정에 대비해 국가과학기술협회는 박룡익을 비롯한 한패의 기술일군들을 조직해 1년간 일본에 류학을 보냈다.

“제가 일본에 1년간 있으면서 배웠던 기술을 제1자동차공장에 돌아와 실제 생산에 도입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 응용에서 우리의 기술이 오히려 배우던 그 일본 회사보다 여러 면에서 더 앞서 나가게 되였습니다.”고 박룡익은 자부심에 찬 말투로 이야기 한다. 그렇게 박룡익이 일본에서 배워온 새로운 기술로 생산해낸 첫 자동차가 150p트럭(150p 平头车)이였다.

그때 국내 실정을 들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실형주물기술을 연구하고 있었으나 크게 돌파적인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춘제1자동차공장에서는 박룡익이 실형주물기술을 실제 생산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면서 제1자동차공장의 금형기술은 전국적으로 단연 1위를 차지하게 되였다.

그뒤로 제1자동차공장에 기술을 배우고저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제2자동차공장의 한 연구원급 고급공정사 한분이 찾아와서는 내 말 한마디도 빼지않고 다 적었습니다. 그것도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신 분인데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술을 배우고저 하니 한번은 전국적인 연구토론회의에서 박룡익은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수강생들에게 모두 전수해 주었다.

실형주물기술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금형기술이 한단계 발전하게 되였으며 오늘날의 빠른 발전을 가져올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박룡익은 우리나라 자동차공장공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개척자라고 볼수도 있다. “북경에서 있었던 연구토론회의에서 다른 사람들의 강의는 시간을 제한했지만 저만 시간 제한하지 않고 마음것 강의하게 했습니다.”고 웃면서 말했다.

1987년에 북경에서 진수생 성과전시회가 있었는데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리붕이 성과전시회에 방문을 하였다. 리붕총리를 만나는 자리에서 박룡익은 리붕총리의 친절함과 자동차공업에 대한 깊은 료해에 너무나 놀랐다고 한다.

어떤 대화가 오갔냐는 기자의 물음에 박룡익은 자신이 조선족이라고 하자 리붕총리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조선족 맞으시죠?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아주 친철하고 상냥하게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1986년부터 2005년까지 박룡익은 선후하여 여러차례의 과학연구를 주최했고 그 성과로 국가급, 성급, 장춘제1자동차공장 등 다양한 급별의 상을 받게 되였다. 그가 편찬한 《제1자동차집단회사 10.5계획 분권 (제1자동차주물제조유한회사)》은 지금도 참고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박룡익의 능력과 공헌을 가장 잘 설명할수 있는 것은 1998년 53세의 젊은 나이에 연구원급 고급공정사로 된 것이라고 한다.

길림신문 유경봉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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