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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06]한 제대군인의 초심(1)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01 14:46:13 ] 클릭: [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빈곤해탈촌 부흥촌의 마을 입구

머리글

제대군인 렴경창(88세)은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의 오랜 촌당지부 서기이다.

“고향을 살기좋은 고장으로 가꾸어가리라, 고향사람들을 잘 살게끔 하리라!”

이는 62년전 렴경창이 제대하고 부흥촌에 돌아왔을 때의 초심이였고 촌당지부 서기직에 부임할 때의 분투목표이며 고향의 부모형제들에게 한 승낙이였다.

렴경창은 늘 중국공산당과 새중국과 고향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는 농촌 기층간부의 선진 전형이다.

오늘부터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를 세번에 나누어 펼쳐드린다.

—편집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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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길 찾아 부흥으로

지난세기 70년대 중기 렴경창네 자족이 남긴 가족사진.

(사진설명: 사진에서 중간줄 왼쪽 첫사람, 두번째사람은 렴경창의 부모, 오른쪽 두분은 렴경창의 누님네 부부.뒤줄 왼쪽으로부터 두사람은 렴경창의 부모가 11년만에 재회후 낳은 두 아들, 세번째사람이 렴경창,네번째 사람이 그의 안해, 그리고는 렴경창의 제수분들이다. 렴경창의 부모님이 안은 애들과 두분 앞에 앉은 학생들은 다 두분의 손자, 손녀들이다.사진에 렴경창의 5형제 중 큰 동생 한분이 빠졌다.)

렴경창은 여섯살 나던 해인 1938년 4월 22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반도를 떠나 부모를 따라 누나, 동생과 함께 조부가 먼저 와 정착한 중국 화룡현 증봉리(지금의 화룡시 룡성진 소속)로 이주해왔다.

당해 겨울로 렴경창의 아버지는 일본군에 ‘지게군’으로 끌려가는 신세를 피하지 못했다. 구사일생 18일만에 집에 벌벌 기여 들어서던 날 렴경창의 아버지는 렴경창의 조부에게 증봉리서 다시 이사가자고 의논하고는 그 몸을 추슬리기 바쁘게 이사 갈 로비를 벌어오겠다며 장인강 목재장(화룡현 서성 경내) 으로 간다고 떠난 것이 그만 10년간 종무소식이 되여버렸다. 함지 장인(목수)인 렴경창의 할아버지는 손에 일감을 놓을 새 없이 일하며 눈이 헐게 아들을 기다리다가 방직로동자를 ‘모집’한다는 왜놈들의 성화에 못이겨 부득불 13살에 나는 어린 손녀를 시집보내고는 몸져누웠다가 그만 그대로 세상뜨고 말았다. 렴경창의 둘째동생은 아버지가 집 나간 몇개월 후 태여났는데 할아버지가 세상뜬지 얼마 안되여 급성 페염으로 6돐 잡아 요절했다. 이렇게 렴경창네는 증봉리에서 가족을 반나마 잃었다.

이리하여 그의 가족은 부흥에서‘의사’로 있은 렴경창의 10촌 형의 도움으로 1944년 초겨울에 부흥으로 이사해왔다. 이듬해 렴경창네는 부흥에서 광복을 맞아 땅을 분배 받았고 집도 다시 마련했다.

‘희소식은 쌍으로 들어온다’더니 종무소식이던 렴경창의 아버지도 1949년 4월 1일에 10년 4개월만에 흑룡강성 이도하자금광(지금 해림현 소속)으로부터 가족의 품속으로 돌아왔다. 17세에 나는 렴경창이 부흥사람 리종섭과 김좌군의 도움으로 불원천리 우여곡절 끝에 흑룡강성 팔면통에서 100여리 떨어진 이도하자금광에서 아버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부흥에서 렴경창의 부모는 재회후 ‘새중국의 선물’로 늦둥이 아들 둘을 더 낳아 자녀가 다섯으로 늘어 나중에 손자,손녀를 16명 보았다...

나라의 주인이 되다

렴경창(중간사람)과 그의 ‘새중국의 선물 ’셋째동생 렴경섭(오른쪽)과 넷째동생 렴경철(왼쪽)이 최근년에 남긴 기념사진.

(사진설명: 렴경섭은 렴경창이 처음으로 가족방문 청가를 맡고 집에 들렀을 때 어머니가 “동생을 얻어보았다”며 렴경창한테 안겨주었던 동생이다. 지금은 역시 제대군인, 화룡시 전 농촌전화통신국 퇴직종업원이다. 렴경철도 렴경창이 군에 있을 때인 1954년에 태여난 동생이다. 부흥촌의 농민으로서 지금은 부부가 외국 로무생활 중이다.)  

“사람값에 못들던 우리가 진짜로 나라의 주인이 되였구나 ! ”

해방을 맞은 그날 렴경창은 바로 이렇게 웨쳤다.

렴경창은 아버지를 모시고 온 그해에 집에 풍작이 들었고 새중국의 탄생을 맞이했다며 나라의 주인이 된 영광을 안고 가슴을 쭉 펴고 살기 시작한 그때를 상기하였다.

부모, 형제가 망명자로부터‘나라의 주인’되여 새 삶을 시작한 곳—부흥, 그래서 렴경창은 부흥촌을 고향이라 부른다.

1950년의 7월 28일, 렴경창은 참군했다. 그가 참군할 때의 부흥촌의 정경은 이러했다. 생산대마다 집체자산이라곤 황소 몇마리씩밖에 없었으며 촌민400여가구(현재 촌민은 350가구)가운데서 기와집 한채도 없었다. 김두권이란 촌민네 집에 유일하게 라지오 한대가 있어서 가끔 촌민들이 겹겹히 둘러앉아 요행 조선전선에서 전해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촌민들은 짚신을 신었으며 렴경창도 짚신을 신고 참군했다.

18살에 ‘항미원조 보가위국(保家卫国)’의 호소를 받들고 중국인민해방군 3809부대(공안부대) 1지대 84퇀 1영 1련에 편입된 렴경창은 제대할 때까지 두만강연안의 국경선수비전선에서 7년간 복역, 그간 그는 우수한 전사,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성장했다.

고향 부흥촌을 선택한 리유

 
렴경창옹이 간수하고 있는 전국해방기념휘장과 자신의 당년의 중국인민해방군 휘장과 견장.
 
 
 
 
 렴경창이 중국인민해방군심양군구로부터 수여받은‘2급 검사능수’영예증서.
 
 
렴경창은 기자한테 이렇게 말한다. “중국공산당의 덕분으로 새중국을 맞이해 ‘나라의 주인’이 된 그날부터 나는 견정불이하게 중국공산당을 따르고 당과 나라의 수요라면 이 한 몸 바쳐 따르리라는 것을 내 생의 신념으로 삼았고 당조직에 가입(1954년 9월 23일 입당)한 날부터 당의 취지‘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분투해왔다”

렴경창은 1957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심양군구로부터‘2급 검사능수’영예를 수여받았다. 제대할 때까지 그는 줄곧 소속 련의 사병대표, 우수병사였다. 부대서 통신학교, 자제병문예간부양성반, 스키훈련학교(장백산정찰사업 수요로), 검사간부학교에까지 다녔다. 그래서 소학교도 바로 못 다닌 렴경창은 자기가 당과 부대의 배려로 군영에서 군사교육 및 문화교육을 전수받은 것에 대해 평생 고맙게 생각한다.

“당이 지시하는 농촌건설에 , 내 고향 건설에 내 힘을 기여하자 ”

1957년 부대에서 렴경창은 부대에 남느냐 제대하느냐 하는 두가지 선택앞에서 결연히 후자를 선택하고 고향 부흥으로 돌아왔다.

 
 군에 입대한 이듬해 공주령 모 건설대상 안보 담당 기동 련대에 편입된 적 있던 19살 렴경창(중간 줄 왼쪽 두번째 사람).

“당시 당중앙으로부터 전군에 조국의 사회주의건설사업을 지원하고 참가할 것을 동원했고 전국적으로 사회주의새농촌건설열조가 시작되였었지요. 고향으로 돌아올 때 팔가자삼림공업국 등 단위에서 직무까지 배치해 놓고 오라고 했지요. 하지만 나는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고향건설에 대한 구상을 익히고 있었기에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부흥촌에 발붙이게 되였지요.”

오늘날 부흥촌의 마을 입구

/길림신문사 김영자기자 

〈한 제대군인의 초심〉(2)가 다음날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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