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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07] 한 제대군인의 초심(2)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02 14:15:07 ] 클릭: [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연길 아들 집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렴경창옹.

(사진설명: 렴경창부부(안로인 지난해 85세로 병고)는 슬하에 네 오누이를 두었는데 딸을 일찍 잃었고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대군인, 지금 세 아들은 다 외국에서 로무에 종사하고 있다. 렴옹은 연길에 사는 막내 아들 집에 와서 안로인과 같이 시작한 손자(지금 고3 학생)의 뒤바라지를 혼자서 끄떡없이 견지하고 있다.)

“렴경창은 부흥촌의 기념비적 인물입니다”

렴경창은 부흥에 돌아오자마자 촌의 공청단지부 서기, 민병 련장, 생산대 대장으로 , 이듬해인 1958년에 촌장, 당지부 서기로 부임했다. 그때로부터 1980년까지 22년, 그의 임직 기한은 부흥촌 사상 제일 오래다.

당년 촌의 부기원, 촌 당지부 서기를 력임했던 현임 촌무 감독위원인 심재필(71세)은 “렴서기는 토지개혁 후 부흥촌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개혁개방전 부흥(富兴)촌을 촌 이름과 상부한 ‘부유하고 흥성’한 마을로, 현역 내에서 첫손 꼽히는 마을로 이끌어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했다.”고 소개한다.

 기자한테 렴경창 서기와 부흥촌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리철수(오른 쪽), 심재필로인.

부흥사람들은 렴서기 임직 기간의 일련의 데이터를 아직도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다.

●그간 부흥촌에는 벽돌공장, 철공소, 제재소, 목공소, 정미소, 국수가공소, 기름방...석탄채굴장까지 생겨나 크고 작은 전동기가 70여대에 달했다.

●그간 부흥촌에는 트럭, 28마력과 55마력짜리 뜨락또르...등 기동차량이 9대가 달렸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소학교, 유치원 교사를 신축했고 중학교를 세웠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500여평방메터 되는 촌 문화구락부를 건설했다.

●그간 부흥촌에서는 벽돌 기와집 100채를 지어 생활이 어려운 촌민부터 부담없이 입주시켰다.

● 그간 부흥촌의 생산로동 일공 단가를 다른 촌보다 훨씬 높혔다.

● ‘의원’한명 밖에 없던 부흥촌은 그간 중의, 서의, 약사, 간호사를 배비한 위생소를 세웠다.

...

렴경창은 “그간 당원이 8명으로부터 50여명으로 늘어난 것이 부흥촌 발전에의 가장 큰 힘이였다.”고 보충해 말했다.

벽돌과 기와로 우사와 문화구락부를 세우다

옛 부흥구락부 건물 앞면.

 대문이 잠기여 사각선에서 한번 더 담은 옛 부흥구락부 모습 앞부분.

렴경창은 무릇 집체와 군중들의 수요라면 발벗고 나섰다.

20세기 50년대에 소는 집체의 주요한 생산력이고 돈줄기였다. 헌데 촌의 9개 생산대서 제마끔 목조 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소들의 란동과 비바람을 못이겨 우사를 반복적으로 손질하고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렴경창은 쏘련견학을 다녀온 후 마을에 벽돌기와로 우사를 세우고 절초 기계까지 마련했다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현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의 김시룡을 찾아갔다. 벽돌기와로 지은 우사와 지척에 있는 벽돌공장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렴경창은 기존 우사를 벽돌기와로 개진할 방안을 촌지도부에 내놓았다.

“촌에서 쓸 벽돌을 우리 절로 굽자!”

그들은 부흥촌에 량질 벽돌을 구워낼 수 있는 풍부한 붉은 진흙 자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청호촌에 가서 기술자를 모셔와 부흥의 첫 벽돌가공소인 소형 요로(窑炉)에 불을 지피고 생산대의 인력을 조직하여 벽돌을 구워냈다. 1961년에 드디여 부흥촌의 목조 우사는 벽돌 우사로 탈바꿈했다.

부흥 마을 중심에 가면 앞면이 2층으로 고풍스럽게 설계된 근 500평방메터되는 옛건물이 있다. 비록 지금은 열쇠를 잠근 대로 조용하게 서 있지만 이는 1963년부터 1964년 사이에 렴경창이 촌민들을 이끌고 자체로 지은 부흥촌 문화구락부이다. 문화구락부는 당시 부흥촌이 ‘부유, 흥성'한 ‘초급단계'에 처해있을 때의 하나의 력사문화 부호이다.

렴경창은 “문화구락부는 부흥사람들의 동심협력, 자력갱생, 간고분투로 이루어낸 정신적‘작품'”이라고 감개무량해 말한다.

문화구락부 건설 과제는 렴경창이 부흥의 실정과 촌민들의 갈망을 마음에 담고 촌 지도부와 상급 정부에 올린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당시 부흥촌 공청단지부 서기로 있었던 리철수(76세, 촌 당지부 서기 등 직을 력임)로인은 기자한테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는 전 현적으로도 향촌 급에서 첫손 꼽히는 문화구락부를 건설해내 남 먼저 로천영화시절을 결속했고 상급 문예선전대도 청해 올 수 있었는가 하면 손풍금, 가야금 등 악기와 간소한 무대 시설들도 구비해 촌의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조직했다. 구락부는 특히 청년들의 활동기지로 큰 역할을 발휘해 청년 당원을 양성하는 데도 유조했다.”

잇따라 철공소, 목공소, 제재소, 정미소, 기름방...가공소, 복무소들이 하나하나 세워지면서 린근 마을의 가공 일감까지 부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공소에서는 무쇠 수레 바퀴를 생산하고 목공소에서는 목제 수레채를 생산해 농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수레를 조립해 상품화하기도 했다.

촌의 기업들이 활성화되자 촌민들의 생활이 꽃피고 촌 집체 수입이 4만원에 달하는 지난 세기 70년대의 호황이 이루어졌다.

자식들한테 배움의 장소 마련하다

지금은 촌민 문화활동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근 400평방메터 되는 부흥유치원 옛터.

“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의 자식들한테 배움의 장소를 마련해주자”

이는 렴경창을 비롯한 촌지도부의 한결같은 신조였고 또 꿈이였다. 당시 부흥촌에 승학시험관을 넘지 못하거나 가정조건 상 현성 중학교로 승학을 못하는 애들이 거의 70명이나 되였다.

렴경창은 “나중에 농사 짓는다 해도 문화지식을 더 배워야 하고 기본 농업생산 기술 지식을 장악한 농민으로 되게끔 교육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부흥농업중학교'를 촌부의 낡은 시설에 세워 몸소 교장까지 맡았다.

정부와 가정에 부담을 끼치지 않는 전제하에 촌에서 부담해 부흥의 자녀들이 농민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부흥농업중학교'는 세워진지 1년도 못돼 페교되였으나 렴경창은 “부흥의 자녀들이 적어도 중학교는 졸업하도록 해야 한다 ”는 의지만은 꺾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76년에 끝내‘부흥중학교'를 세워냈다.

지금은 기업소에 양도된 부흥중학교 옛터 앞에서 심재필 촌무감독위원이 그 력사를 말해주고 있다.

부흥중학교 졸업생인 부흥촌 당지부 조직위원 리창한은 “어려운 당시 형편에 그래도 집 근처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행운이였다. 그때 부흥중학교에는 고중부까지 설치되여 100리 밖의 다른 마을 학생들도 오다나니 학생규모가 300여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렴경창의 두‘늦둥이’동생과 자녀들도 다 부흥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인구 류동의 영향으로 그제날 글소리 랑랑하던 부흥의 배움터는 지금은 인적없이 사라졌지만 그 흔적만은 아직도 남아 지나간 력사를 견증해주고 있다.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한 제대군인의 초심〉(3)이 다음날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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