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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후기]우리는 함께 했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06 10:16:51 ] 클릭: [ ]

재일조선족 운동회회가 <함께 해요 미래를> 만들면서

2년만에 열리는 재일조선족운동회를 앞두고 선전부가 가동을 시작한지 한달만인 지난  6월 18일, 회가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은 나는 극구 반대를 했다. 자신이 없었던것이다. 직업적으로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도 아니고 같은 곳에서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각 분야에서 매일 바삐 돌아치는 우리들한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운동회 회가라고는 하지만 일본에서 사는 조선족에 관한 노래로서는 처음인지라 긴장할수밖에 없었다. 단지 한수의 노래가 아니라 모두를 대변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 비슷한 것에 마음이 짓눌렸다. “못한다”, “하지 말자”를 반복하는 나를 열심히 설득하는 이가 있었다.

김설씨였다. ‘재일조선족운동회’라 하면 빼놓을수 없는 원로맴버인 그녀는 개인적으로 옛 연변텔레비죤방송국시절의 동료이며 나를 운동회선전부에 끌어 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음악을 전공한 그녀인지라 노래 한수가 탄생하는 경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대차게 일을 추진시키려 했다. 나에 대한 과격한 믿음으로 뒤일까지 대비하고 있는 그 집념의 어마어마함을 나는 느꼈다.

개인의 실패와 은연중의 비방같은것에 신경을 쓰면서 나는 잘 할수 있을지 말지가 묘연한 중에 김설씨의 정열적인 기획안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재일조선족에 대한 열정의 온도차를 느꼈다. 제4회를 맞는 재일조선족운동회를 더 화려한 축제로 만들어 보자는 그녀의 발상, 다음 세대를 향한 의미있는 계주봉을 준비하자는 그녀의 깊은 생각에는 성공이거나 실패에 대한 타산같은것은 애초에 들어 있지 않았다. 구호처럼 “할수 있다”는 한마디만 반복하는, 나를 향하는 그녀의 근거없는 믿음에 보답을 줘야겠다는 ‘의리’가 머리속을 메우기 시작했다. 어딘가 모르게 자석같은 그녀였다. 곁에서 우리 두사람의 거친 야리토리(주고 받음)를 묵묵히 지켜 보던 박문걸비서장과 류향화씨가 “성공을 미리 빕니다”라는 한마디로 그날의 무거운 분위기를 마무리지었다.

작품으로서의 성공여지는 여론할 여지가 없을만큼 머리속에 아무런 구도도 떠오르지 않았고 중도에 류산될 가능성만 보였다. 시간이 너무 빠듯해서 더이상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그 와중에 천만 다행인 것은 본질적으로 구성맴버에 대한 우리 둘의 생각이 일치했던 점이다.

작품성으로 말하자면 창작분야도 아닌 서로 다른 사업으로 매일 분주하게 달리고 있는 우리가 명곡을 만들수 있다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이라는 독특한 아이덴티티에 대한 감수는 누구도 우리를 따를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씩 신심이 생겼다. 우리만의 기쁨과 우리만의 슬픔, 우리만의 그리움과 우리만의 서러움을 우리보다 더 잘 표현할 사람이 있을가! 우리가 처음으로 우리만의 힘으로 만들고 우리의 목소리로 부른다면 그보다 더 뜻깊은 노래가 더 있을가? 명곡이 아닌 명곡이 될수도…

재일조선족 운동회 회가 <함께 해요 미래를>열창하는 변소화 김화 현성해 조병철(왼쪽에서 오른쪽 순)

그날부터 <우리>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설씨는 이틀만에 ‘회가창작팀’을 묶었다. 우선 작곡을 맡을 변소화씨와의 3인 채팅으로 합류했다. 동북사대 음악학원 출신인 변소화씨는 10여년째 도꾜에서 아키라사진관을 경영하는 한편 간간히 음악활동으로 조선족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 몇년전에 언젠가는 작사자와 작곡자로 만나자고 약속을 했던 나는 어쩌면 이번에 그 약속을 실현할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가수선정이였다. 작년에 있었던 두만강축제에 일본대표로 초청되였던 중앙민족대학 성악계 출신인 조병철선생, 장춘사범대학 음악학원 출신인 김화씨, 연변대학 민악계 출신인 현성해씨. 일주일만에 무어진 팀치고는 너무 단단한 맴버들이였다. 김설씨의 섭외능력은 탄복할만한 수준이였다.

<우리> 모두의 노래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우선 짧은 기간내에 선전부 여러 맴버들의 아이디어를 모으기 시작했다.

낮시간에는 각기 회사근무에 바쁜 우리는 저녁시간이거나 새벽시간이면 운동회건으로 위쳇그릅에서 의사교환과 련락을 주고 받았다. 운동회회가에 대한 통지를 내기 바쁘게 같은 마음을 보여주는 이들이 생각나는 키워드를 적어 주었다. “글로벌시대로 세상을 연결하는 조선족, 문화의 접착제, 다문화 연결, 세가지 문화를 한몸에 지니고, 백두산에서 후지산으로” “달리자 꿈을 싣고 오늘을!” “불태우자 내일 향한 정열을!” “모이자 모이자” “반가운 얼굴, 즐거운 만남, 슬기로운 우리민족!”(운동회 슬로건) 등등…

상봉이,영화,권철이… 후배들의 머리속의 아이디어가 그렇게 모여지기 시작했다. 소중한 힌트들이였다. 열심히 고민해 주는 그들과 소통하면서 결코 혼자만의 작업이 아님을 직감하는 며칠간이였다. 우리의 력사를 가사에 적어야 할것만 같은 또 다른 책임감과 의무감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 큰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너 일본땅에 온 우리, 너무나 ‘아름다운 래일의 꿈’이였기에 막막함도 쓸쓸함도 많았던 우리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아리랑’을 부르며 같은 민족을 찾아 헤매인적도 있었다. 방황의 날들을 함께 보냈던 우리는 이제 정착의 경지에 이르렀고 안정을 찾았으며 제2세 3세를 위한 설계도도 그리면서 ‘아름다운 오늘을’ 살고 있다. 일본땅에서 하나의 든든한 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는 우리는 중・일・한의 문화권내에서 자기의 자리를 확립하고 있으며 세계를 무대로 날개를 펼칠 새로운 “래일”을 꿈꾸고 있다. “하나로” 뭉쳐 이제 더는 쓸쓸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재일조선족>으로 발탁되여 가는 우리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가사에 적어야만 했다.

김설 변소화 리홍매(왼쪽에서 오른쪽순)

사흘만에 가사의 초고가 나왔다. 며칠후 변소화씨에게 네가지 버전으로 가사를 보내면서 자유롭게 곡을 써달라고 했다. 그후 열흘만에 곡이 나왔다. 7월 4일 오후, 조병철가수와 우리 셋이 합류하여 바쁜 오후시간에 두시간정도의 미팅을 가졌다. 조용한 커피숍에서 오선보에 문외한인 나를 위하여 변소화씨가 멜로디를 불러 주었다. 순간 나는 코마루가 찡 저려남을 느꼈다. 멜로디가 가슴 절절하게 가사를 잘 받쳐 주고 있었다. 가사 구절마다 재일조선족의 력사가 적혀 있다고 하면서 특히 <아리랑>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후련해 진다는 조병철씨가 곡에 대한 적절한 의견을 내놓았다. 김설씨가 가사에 대한 후한 조언을 해 주었다. 일주일후 곡이 완성되였다고 련락이 왔고 편곡과 반주곡때문에 변소화씨가 밤길을 오가는 며칠간이 흘렀다. 드디어 가수들에게 노래악보가 전달되였다. 이미 예약해 놓은 록음날자 이틀전이였다. 무작정 밀고 나가는 김설씨의 수완이라 할가 일이 그녀의 예측대로 추진되여 가고 있는 것에 놀랍기도 했다.

그날은 7월 19일, 록음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마지막 미팅에 처음으로 김화씨도 나왔다. 아직 편곡이 끝나지 않은 형편에서 노래말을 두고 가수들과 의견을 주고 받았다. 가사정리를 마친 우리는 그날 저녁 운동회집행위원회 위원들에게 진척정황에 대해 간단한 회보를 하게 되였다. 헌데 운동회 슬로건속의 <함께 해요! 우리의 미래를>, 이것을 넣어 달라는 김만철위원의 예상치도 못한 제의를 받게 되였다.

운동회 초창기때부터 고생해 온 여러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대변한 한마디였다. 가벼워진 마음이 또다시 무겁게 느껴졌다. 회의장소에서 빠져나와 아키하바라(秋葉原)역부근의 밖에서 변소화씨한테 급히 전화를 했다. 멜로디에 노래말을 맞추면서 거의 반시간동안 의논했다. 그렇게 마지막 구절의 원 가사 ‘오늘은 우리의 축제’를 ‘함께 해요 우리 미래를’로 고치게 되였고 원래의 제목 <우리의 축제>도 <함께 해요 미래를>로 고치게 되였다. 솔직히 너무 번거로운 작업과정이였지만 이국타향에서 뭉쳐야만하는 우리 모두의 념원을 담을수 있어서 다행이였다. 무엇보다도 2015년 첫 운동회때 김설씨가 고생하면서 만들어 낸 운동회 슬로건의 일부를 가사에 담게 되여서 안심되기도 했다.

드디어 7월 22일, 오후 한시반 도꾜닛뽀리에 자리잡은 음악스튜디오에 처음으로 가수들이 모이게 되였다. 한번도 노래를 맞춰보지도 않은채 당일 련습하고 록음을 해야 하는 , 가수들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라고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점심 열두시쯤 조병철씨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안해분이 갑자기 구급차로 병원으로 호송되였다는 것이였다. 련습이 부족하다고 늘 걱정을 했던 조병철씨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늦을 것 같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어 반주테프를 가진 변소화씨의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 일처리를 마치고 떠나야 한다고 련락이 왔다. 김화씨와 현성해씨도 사업일정을 조절하여 나온 상태라 일분일초도 헛되히 쓰면 안되는 형편이였고 무엇보다도 예약된 네시간내에 록음을 끝마쳐야 했다.

허둥지둥 병원으로부터 달려 온 조병철씨와 손에 땀을 쥔 변소화씨가 겨우 도착하였고 처음으로 네 가수가 합류하여 록음실에 들어 간것이 오후 네시였다. 임산부의 난산을 떠올리며 바질바질 속을 태웠던 하루였다.

드디어 8월 3일, 온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전신에 전률을 느꼈다. 초창기 조선족이라고 밝히지도 못했던 시기가 있었던 우리가 당당한 우리의 무대에서 자기자신들의 노래를 부를수 있어서 너무 감격스러운 하루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좋은 노래를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요즘들어 ‘아름다운 추억’을 줍는데 희열을 느끼는 나에게 지난 한달동안은 또 하나의 자욱을 남겨주는 행복한 시간들이였다. 운동회 클라이막스에 함께 불렀던 <함께 해요 우리 미래를>이 어쩌면 운동장에 모인 모든 재일조선족들의 마음의 선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남을 걷잡지 못한 나였다. 현장을 지휘하느라 그런 감격조차 느낄 여유가 없는 김설씨를 바라보며 운동장 한복판에 선 나는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하여 이 글에서 그녀를 꼭 밝히고 싶었다.

수고했습니다. 우리!

함께 해요 우리 미래를!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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