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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58)―일제의 황민화정책 1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05 15:17:56 ] 클릭: [ ]

일제 로구교 점령 북경 포위 전면적 침략 감행

동북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파쑈통치를 강화

로구교사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완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충돌이 야기되였는데 일본군은 송철원의 29군이 저항해나서자 로구교를 점령하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자그마한 우발적인 충돌이였던것 만큼 얼마든지 현지 교섭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일제는 구실을 찾고 있던 참이라 생트집으로 중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 것이다.

일제는 로구교사변에 앞서 1933년 1월의 산해관 공략으로부터 시작하여 화북지구의 침입, 열하작전에 의한 성소재지 승덕의 점령, 진황도 상륙, 하북성 동부지구에로의 진격 등 군사작전을 벌리면서 미구에 감행하게 될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준비해왔다. 장개석은 일제가 만주(지금의 동북지역)를 강점한 후 침략의 마수를 관내로 뻗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공농홍군을 ‘토벌’하는데 혈안이 되여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방대한 군사력량을 동원하여 서금에 있는 중공중앙쏘베트를 없애버리려고 무려 5차례에 걸쳐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학생들의 신사참배.

로구교사변 후 일제는 8월 13일 상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중일간의 큰 전쟁이 터지게 된 것이다. 로구교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근 3,000일 동안이나 중국을 피바다에 잠그고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아넣는 전주곡이 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일제는 광활한 중국땅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중국인민에 대한 무차별학살을 곳곳에서 감행,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르면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지배와 아시아의 맹주로 될 야수의 꿈을 무르익히려 들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마자 중국공산당은 “평진이 위급하다! 중화민족이 위급하다!”고 대성질호하면서 한결같이 떨쳐나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중화민족의 생존의 길이기에 “민족통일전선의 튼튼한 장성을 쌓아 왜놈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전국에 호소했다. 7월 15일에는 ‘국공합작선언’을 국민당중앙에 보냈다. 서안사변을 계기로 려산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주은래의 담판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여 국민당도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의 선언에 대한 담화’를 발표, 국공합작을 기초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형성되였다. 이로부터 전민족적인 항전의 새 국면이 나타나게 되였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의 폭발은 동북 항일투쟁의 전략적 임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중국 내지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발동하면서 이미 침략한 동북을 저들의 중요한 후방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리하여 관내는 항일전쟁의 주요 전장으로 변해버렸다. 5년 남짓이 독립적으로 진행된 동북의 항일투쟁은 전국 항일전쟁의 한부분으로 변하여 동북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관내의 주요전장에 대해 배합하고 지지하는 작전으로 되였다.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무하에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했으며 각지 항일련군들도 새로운 항일투쟁의 고조를 형성하여 일제에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조에 발맞추어 일본군에 대해 타격을 가했는데 이는 동북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습니다. 동북항일련군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신속하게 동북을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꿈이 파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면서 1936년 3월에 제정한 일제의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만주국 치안숙정계획대강〉을 설명해주었다.

이 〈숙정대강〉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을 점령한 후 동북을 침략을 확대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첫 해(1936년 4월—1937년 3월)의 ‘숙정’ 중점 지구는 빈강, 길림, 간도, 삼강(합강) 등 성이며 두번째 해(1937년 4월—1938년 3월)는 첫 해의 ‘숙정’성과를 진일보로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한편 전 동북에 대한 ‘숙정’공작을 확대하는 것이며 세번째 해(1938년 4월―1939년 3월)에는 특수지구에 대한 ‘철저한 숙정’이였다. 적들은 ‘집단부락’을 건설해 무인구역을 만들며 경제봉쇄를 실시해 항일련군과 군중들의 련계를 단절시키는 한편 경찰, 특무 조직을 강화하여 항일무장을 고립시켜 적화사상의 뿌리를 빼버리려 했다. 로구교사변 후 일제는 ‘숙정계획’에 대한 전략적인 변경을 했는데 그 해 제2기 〈치안숙정공작요강〉에 “치안숙정의 주요 지구를 만주국 동부지구, 특히 동변도 및 동부 삼각지대—장백산지구로 한다.”고 명확히 해놓았다. 이로써 적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을 주요목표로 정한 후 병력을 집중하여 ‘3강성(길림, 통화, 간도)토벌’ 등을 감행해 반일무장을 완전히 소멸해버리려 시도했다.

일제는 항일련군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 관계를 절단하기 위해 1936년에 이르러 동북지구에 이미 만 3,451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으며 보갑련좌법을 실시했다. 1938년의 통계에 의하면 일제가 동북에 경찰서 1,233개소, 경찰분주소 3,651개소, 파출소 1,630개소나 설치하였으며 경찰은 10만명에 달했다. 연변지구에는 32개의 경찰서와 153개의 분주소, 55개의 파출소, 10개의 삼림경찰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찰 총수는 4,230여명에 달했다. 1940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 319개의 자위단이 있었는데 자위단원이 만 8,131명 있었다. 경찰과 자위단은 ‘경제범’, ‘형사범’, ‘사상범’, ‘국사범’ 등 죄목을 씌워 무고한 인민을 마구 체포하고 형벌을 가했으며 징역에 언도하거나 학살했다.

일제의 문화 파쑈적 통치

일제는 정치, 경제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파쑈적인 노예화 교육과 민족동화정책을 감행했다. 로구교사변 후 일제는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일만일체’, ‘공존공영’, ‘천황지상’, ‘왕도락토’ 등 반동사상을 고취했다. 1938년 1월 1일, 위만주국은 이른바 ‘신학제’를 실행하면서 일어를 ‘국어’자리에 놓고 민족 노예화 교육을 강압하기에 이르게 된다.

‘근로봉사’에 잡혀가는 백의동포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 압박 역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자들은 조선인들에게 이른바 ‘황민화운동’을 진행하게 하면서 어떠한 장소에서도 본 민족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강박적인 수단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이 본 민족 성명을 가질 권리마저 박탈했다. 도처에 ‘신사’(일본황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를 세우고 조선인을 일본의 ‘선족(鲜族)’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박, 조선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고 조선민족을 자기들 마음대로 혹사하고 유린하는 ‘망국노’로 만들려 했다.

일제의 이러한 의도는 교육에서 돌출하게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이른바 ‘일시동인’, ‘내선일체’, ‘내선공학’이라고 조선인을 기만했다. 일제는 ‘문화통치’의 허울 밑에 조선말과 조선력사를 말살하고 일본어와 일본력사에 대한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또 일본문화와 생활양식을 조선인 청년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전통 문화와 교육을 파괴하고 민족의식을 없애며 나아가서는 조선민족을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망발했다. 일제는 ‘국민된 성격의 함양’을 위하여 고등보통학교와 녀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숙달시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강박함과 아울러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인물, 시가, 풍속, 지방 특성을 알리고 천황 숭배와 군국주의로 일관된 내용을 불어넣었다. 일제가 조작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아시아주의 동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렬도와 조선반도로 이루어진다. 그 밖에 만주국에서 빌린 관동주와 렬국(列国)에서 맡긴 남양제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그 가운데에도 후지산, 금강산, 세도내해는 널리 알려져있다. 9천만 국민이 우로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들면서 각자 그 업에 매진한다.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만한 곳이 다시 없다.

조선어 또는 ‘조선어 및 한문’과목의 교수방법은 일본어교수에 준하거나 일본어와 련계시켰고 경우에 따라서 일본어로 가르치게 하였다. 교과서내용도 되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을 골라넣었으며 그마저도 일본문화와 식민지정책이 가득 들어찬 것이였다. 조선의 인문, 시가, 문학작품, 풍속, 지방특색 등 사항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교과서에는 대개 이런 내용의 글들이 실리였다.

一植木

福童이는 四月四日아침에 学校 뒤집 老人을 만나서 인사를 엿주엇소.

老人 “어제 너의들은 무슨 일로 그러케 일즉이 學校에 모엿느냐.”

福童 “어제는 神武天皇祭日이올시다. 저의들은 일즉이 모여서 선생님을 따라 学校林에 갓다왓습니다.”

老人 “그러면 植木을 하러 갓드냐.”

福童 “네 学校에서는 神武天皇祭日植木日로 定하고 해마다 그 날을 学校林에 가서 나무를 심습니다.”

老人 “그것은 참 조흔 일이다. 죠션은 어듸든지 붉은 山이 만타.”…

력사와 지리 교육도 조선력사와 조선지리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대신 보통학교 고급학년에 일본력사와 일본지리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중등학교들에 ‘력사 지리’ 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청소년들의 력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기도 했다.

…이 무렵 조선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이 있어서 이를 3한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신라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왔고 세력 또한 강했다. 황후는 먼저 신라를 복종시킨다면 구마소는 스스로 평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께우찌노 스꾸네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토벌했다. 때는 기원 860년이였다… 황후는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에 건너가 그 곳에서부터 신라로 쳐들어갔다. 군선이 바다에 가득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매 신라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고 천황이라는 훌륭한 군주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오는 것은 바로 일본의 신병일 것이다.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가” 하더니 즉각 흰기를 들고 항복하여 황후의 앞에서 맹세하기를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은 있을지언정 매년 공물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황후는 개선하였는데 그 후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도 또한 우리 나라에 복종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이 때로부터 조선은 천황의 덕에 이끌려 따르게 되고 구마소도 스스로 평정되였다…

이와 같이 외곡된 터무니없는 ‘건국신화’를 꾸며대면서 조선이 예로부터 일본의 종속국이였던 것처럼 날조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에게 렬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외에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에 들씌워 사실을 외곡했는가 하면 ‘강화도사건’도 조선이 도발했으며 중일갑오전쟁마저도 청나라가 도발한 것으로 외곡함으로써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 력사 외곡의 글로 교과서를 일색화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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