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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59)―일제의 황민화정책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11 14:48:24 ] 클릭: [ ]

‘황국신민의 선서’ 웨치면서 천황에게 충성 맹세

‘창씨변경세칙’ 강요로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

‘황국신민의 선서’

1940년 5월, 부의는 두번째로 도꾜에 불리워가 일본천황을 배알한 다음 천황이 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를 신경(장춘)에 세운 건국신묘에 가져다가 ‘건국신’으로 모시게 했다. 하여 동북지방을 완전히 일본 판도에 그어넣고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철저히 일본 신민으로 전락시키려고 광분했다.

 

일본경찰서의 조사를 받고 있는 조선인 청년들.

매일 아침조회시간이면 교직원과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일본 황궁과 만주국 제궁에 요배하며 일장기를 띄우고 ‘황국신민선서’ 혹은 ‘국민훈’을 암송하는 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정오에는 장소와 교수시간에 관계없이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의 안녕을 빌면서 일제침략자들의 ‘승전’ 및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비는 ‘정오묵도’를 하게 했다. 학생들은 신사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모자를 벗고 절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하기만 하면 마구 때리고 가장 품행이 나쁜 학생으로 치부하여 락제 혹은 퇴학까지 시켰다. 때론 경찰이나 헌병한테 고발하여 체포하고 류치장에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길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강요에 진절머리가 났더랬습니다. 방학이 되여 연변에 와보니 여기는 길림보다 엄청 더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은 완전히 일제의 황민화 정책의 그늘에서 시달리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학교마다에서는 첫 상학종이 울리면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 후 ‘규죠요하이(官城谣拜)’를 해야 했다. 선생이 “덴노헤이까니 다이시데 사이게례(천황페하에게 최경례)”하고 웨치면 학생들은 동쪽을 향해 ‘사이게례’를 한다. 그 다음 “고데이헤이까니 다이시데 사이게례(황제페하에게 최경례)”하면 서쪽 신경을 향해 90도 경례를 한다. 구죠요하이가 끝나 선생이 “고고구신민노지까이(황국신민의 선서)”라고 하면 학생들은 목청을 높여 일제히 ‘황국신민의 맹세’를 외운다. 중학생이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워야 한다. ‘황국신민의 선서’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페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성인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겠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겠다.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겠다.

‘황국민의 맹세(서사)’가 끝나면 아메데라스 오미가미를 향해 묵도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어서 승리하여주옵소서”라고 빈다. 아침조회가 끝나 교실에 들어가서 급장이 “일만기를 향해 경례!”하고 소리치면 학생들은 일만국기에 15도 경례를 한다. 그제야 제자리에 앉아 하루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여 점심을 먹을 때면 밥곽을 책상 우에 놓은 후 급장이 “하시오도례” 하고 길게 빼면 저가락을 두 엄지손가락과 식지사이에 끼워들고 “저가락 들면 천지의 은혜와 부모와 시조의 은덕을 새기며 먹겠습니다”라고 외우고 나서 밥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 급장이 다시 “하시오도례”라고 하면 저가락을 두 엄지와 식지에 끼워들고 “고찌소사마”를 외운다.

일본말 사용과 이러한 ‘맹세’같은 것을 도시주민과 농촌농민들에게도 강요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 같은 것은 50세 이하의 사람이면 왕왕 외워야 했는데 아니면 거리에 나설 궁리를 말아야 했다. 일본경찰은 길에서청장년을 세워놓고 “오마에고, 고꾸신민노지까이오요메!(너 황국신민의 맹세를 읽어봐!)”라고 명령하는데 조금이라도 꺽꺽거리거나 외우지 못할 경우 “바가야로, 우찌니가에레!” 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서 귀쌈을 후려갈긴 후 집으로 되쫓아보내여 다시 외우게 했다. 불복하면 신분증을 빼앗는데 이것은 매맞는 일보다 더 무서웠다. 신분증이 없으면 외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공산비적’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또 빼앗긴 신분증을 빼앗은 순사를 찾아가서 손이야 발이야 빌고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하여 학교문턱을 가로 타보지도 못한 일자무식의 농민들도 생계를 위해 일본말을 배우고 ‘맹세’를 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농민들의 황민화를 단속하기 위하여 일제는 시가지로 드나드는 어구를 지키기도 했다.

연길현 조양천에는 고바리 소좌가 거느리는 261부대가 있었는데 이 자들은 늘 조양천으로 드나드는 큰길 어구를 지켰다. 삼봉동 농민들은 조양천으로 일보러 들어갈 때면 일본병사들의 총칼에 가로막히군 했다. 왜놈들은 총창을 농민들의 가슴에 대고 상투적인 수법으로 “고고꾸신민노지까이”를 외우라고 으르렁거렸다. 물론 외우지 못하면 젊은이든 로인이든 귀쌈을 얻어맞는건 물론 시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집으로 쫓아보내 다시 외워가지고 와야 시가지로 들어가게 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대량의 조선 청년들은 징병자, 징용자, 보국대로 뽑혀 끌려갔는데 일본말을 모르면 안되기에 일본어강습소, 조선청년특별훈련소를 세워 일본말을 억지로 배우게 했다.

“일제는 동북3성 조선인 집거구에서 제일 지식이 있고 신체가 좋은 사람을 뽑아(자기가 먹을 쌀을 지고 가서) 서란현 막석에 꾸려놓은 훈련소에 보내여 훈련시켜 교관으로 양성한 후 그 사람들을 다시 동북 각지 농촌에 보내여 훈련소를 꾸리게 하였는데 농민들은 한달 동안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훈련한 후 징병 등에 뽑혀나가야 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자신이 보고 겪은 사실을 피력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일제는 이러한 망발을 더욱 다그쳤다. 간도성만 하더라도 1944년 일본어강습소가 452개에 학생 2만 5,440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1943년부터는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 이른바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높이고 징병제도 실시의 기초를 닦는다는 명목으로 일본말 학습을 주로 하는 훈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시켰다. 전기에는 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국민학교를 다녀본 청년들을 각 현 훈련소에 보내여 3개월 동안 합숙시키고 1년 동안은 사숙시키면서 내무, 훈육, 학교교련 등을 진행하였다. 후기에는 서란현국립중앙청년특별훈련소에 보내여 몇달 동안 강제훈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완전히 군사파쑈적이며 폭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훈련이 끝나면 물론 강제징병을 당해야 했다.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야

일제 치하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지금도 ‘다이꼬빈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이꼬빈따란 일종의 독특한 체벌이였다. 이것은 학생 한사람이 잘못하면 그 학생이 소속된 학급 전체에 강행하는 체벌인데 학생들을 두줄로 마주세워놓고 서로 뺨을 치게 하는 것이였다. 체조 때 간혹 늦게 나오거나 암송하라는 과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조심하지 않아 조선말을 했다거나 하면 다 이런 체벌을 받아야 했는데 학생들은 두줄로 마주서서 대방을 사정없이 때려야 했다. 느슨히 때리는 기미만 보이면 교원은 옆에서 사정없이 질책하여 세게 때리게 했는데 일단 맞고 보면 대방에 대해 역시 힘껏 때리게 되는데 이렇게 교원이 성차할 때까지 때리면 다들 얼굴이 퉁퉁 붓기가 일쑤였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일본인 교원들은 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때리였다. “갔다와라.” 하면서 때리고 갔다오면 “갔다왔느냐?” 하면서 때렸다고 한다.

일본으로 략탈해가는 동북의 특산물.

“이른바 ‘건국정신’이라는 과를 세우고 천조대신은 나라를 만든 신이라고 고취했으며 군인칙서, 교육칙서, 시국조서, 건국 10년 조서 등을 외우면서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조선인 학생들을 핍박했습니다. 중학교는 철저히 일어화, 황민화, 병영화, 직업화시키기에 노력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

이렇게 조선인에 대해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강요하여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들었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서 련이어 패하게 되자 일제는 조선인들을 저들의 침략전쟁에 내몰기 위하여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재학중인 조선인 학생들을 전쟁마당에 내몰았다. 1944년 8월 23일에는 ‘녀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여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인 녀인들을 징용하여 일본 본토와 그외 전쟁마당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단발령을 내려 남학생의 경우 머리를 빡빡 깎게 했고 녀학생은 단발머리를 하게 했다. 중학생들은 일본군복식으로 국방색 통일교복에 전투모를 착용하게 했으며 다리에 각반을 치고 가슴에는 이름표를 달게 했다. 중학교에 일본군 현역장교를, 소학교에는 재향군인을 배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학생근로봉사라는 명의로 륜번으로 학생들을 강제로동에 내몰았으며 녀학생들과 처녀들을 꾀여 ‘위안대’로 전락시켰다. 교관들은 마음대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벌을 주면서 정신훈련과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학생들을 다 ‘협화청년단’이거나 ‘재향군인’에 가입시켰고 팔에는 완장을 끼고 다니게 했다.

일제는 조선이란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조선사람의 이름마저 빼앗는 광란을 서슴치 않았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제령’으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사람의 성명제를 페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으며 12월 26일에는 ‘창씨개명세칙’을 공포하여 이를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이 법에 의하면 조선사람은 ‘김(김해), 박(밀양), 최(수원), 리(한산)’ 등 전통적인 성을 버리고 그대신 ‘가네우미, 아라이, 미즈하라, 마끼야마’ 같은 일본식 성씨를 붙이며 조선사람의 이름을 버리고 ‘겐이찌, 이찌로, 하루꼬, 아끼꼬’ 같은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무릇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학교입학, 전학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런 학생에 대해 마구 구타하게 했다. 관청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문서를 처리해주지 않았으며 기차역이거나 우편국에서는 화물을 취급해주지 않았다. 지어는 ‘불온선인’이라는 루명을 씌워 체포하거나 혹형을 가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제도는 조선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그 대가는 형별과 옥살이 뿐이였다. 개보다 못한 신세를 탓해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개새끼’라는 의미로 ‘이누노고’라고 성을 고친 사람들도 있었는데 호적계로부터 수속거절을 당한건 물론 요구 대로 성과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고 얻어맞을 뿐이였다.

창씨개명마저도 일본놈들의 돈벌이 구멍수가 되였다. 이름을 고칠 만큼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경찰서에 수속비 4원을 내고 이름을 고치게 했다. 생활형편이 괜찮은 사람은 돈을 내고 무난히 이름을 고칠 수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낼 돈이 없어 두 손바닥만 싹싹 비빌 뿐이였다. 그 때 돈 20전이면 입쌀 한말을 살 수 있었고 명태, 이면수, 청어 같은 것은 두두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 4원이란 가난한 조선인들에게는 생계를 거는 거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찰서에서 찾아오기전에 먼저 성과 이름을 고친 동본인 친척을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 고친 성과 이름을 알아두었다가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본적을 알려준 후 “미리 알아두었던 일본성을 댄다. 경찰이 “오마에노 나마에와 나니까?(너의 이름은 뭐라 부르지?)” 하고 다시 물으면 역시 미리 준비해두었던 이름을 대고 재난을 모면하였다.

“정치적 권리는 두말 할 것 없고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빼앗는 이 같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황민화책동을 일제는 저들이 패망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간악한 수단은 중일, 한일 간의 민족모순을 격화시키면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원한과 반항을 불러일으킬 뿐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의 력설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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