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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0)― 피눈물의 이민생활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18 16:44:09 ] 클릭: [ ]

속임수에 걸려들어 강제이주되여온 조선 이주민들

‘출하’ 임무 완수 못하면 근로봉사에 끌려가기도

일제의 강제이민

“조선인의 동북에로의 대량적인 이주는 1931년 ‘9.18’사변 이후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14년간인데 이 시기를 개괄하여 강제이민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14년을 또3개 시기로 세분할 수 있는데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통제이민’시기이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집단이민’시기이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개척이민’시기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일제의 강제이민에 대한 분석이였다.

‘근로봉사’ 고역에 끌려간 조선인 백성들.

1931년부터 1936년까지의 통제이민시기에 일제는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동북의 농업자원을 더 략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은 괴뢰만주국정부를 사촉하여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제정했다. 이 〈요강〉에 의하면 조선으로부터 해마다 만세대, 5만여명의 조선 파산농민을 동북에 이주시키며 조선인 이민의 이주구역을 간도 및 동변도의 23개 현(1938년에는 더 확대하여 39개 현)으로 제한하며 중쏘변경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농민을 강압적으로 지정한 구역에 이주시키는 것이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에 조선이민 경영기구인 ‘선만척식회사’를 세우고 괴뢰만주국의 신경(장춘)에 그의 집행회사인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세운 후 새 이주민과 기주민들에 대한 통제와 집결, 그들에 대한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했다. 1937년 3월부터 만선척식회사는 연변지구의 왕청, 연길, 안도 그리고 료녕성 영구지구에 2,339호, 만2,149명의 이민을 수용하여 35개의 집단부락을 세웠다. 그리고 북만, 특히 중쏘 국경지대에 산재하고 있거나 류랑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국방과 치안의 수요’라면서 영구, 류하, 환적, 왕야묘, 대함창 등 5개 지구에 집중시킨 후 1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1,016호의 4,338명을 수용하였다.

1937년 일제는 논경작을 위주로 하고 있는 조선 남부의 경기도외 6개 도에서 2,500호의 농호를 이민으로 선정하고 간도성과 봉천성 연구현 구역에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1938년 7월에는 남만과 북만에 16개 이민현을 더 증가하였다. 1939년 12월에는 39개 현에만 이주하게 하던 규정을 철수하고 전 동북을 다 이민지점으로 확정하였다. 1940년 8월까지 만선척식회사에서는 만3,897호의 6만 1,421명의 ‘집단, 집합이민’을 받아들여 동북 각지에 23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였다. 조선이주민은 1940년부터 북만을 중심으로 6,450호, 1941년에는 2,725호, 1942년에는 3,462호 이주하여왔는데 1942년 12월말까지 동북의 조선인 인구는 151만 6,000명, 1943년 6월에는 163만 3,220명, 1944년 4월에는 165만 8,572명, 동년 9월에는 175만 492명, 1945년 광복까지 약 210만명으로 늘어났다.

1940년 6월, 일본인 이민경영을 담당하던 만주척식회사와 만선척식회사를 합병하여 ‘만주척식공사’로 개편하고 동북 경내의 이주민과 이주사업을 통일적으로 관리하였다. 특히 1941년부터는 나날이 확대되는 저들의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농지조성계획〉, 〈긴급농지조성계획〉을 세우고 동료하, 제2송화강 지구를 위주로 하는 동북 간지의 대소가경지를 개간하기에 광분했다.

조선이주민이 증가함에 따라 동북지구의 논경작도 신속하게 확대되였는데 1935년 전 동북의 논면적은 3만 5,353헥타르, 벼산량은 8만 3,517톤으로부터 1940년에는 논면적이 8만 9,134헥타르, 벼산량은 16만 5,589톤에 달했다. 1944년엔 논면적이 다소 축소되여 8만 1,108헥타르에 달했으나 벼산량은 오히려 19만 124톤으로 늘어났다.

야만적인 ‘량곡출하제’

일제는 〈만주농업이민 100만호 계획〉을 조작하고20년 동안에 일본인 100만호, 500만명을 동북에 이민시키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제통치자들은 이주조선인을 통제하고 집결시키고 조선농민을 강제로 동북지방에 이주시키는외에 위만정부와 결탁하여 조선농민들이 일구어낸 토지를 함부로 략탈하여 일본개척단에 주었다.

일제가 연변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각지에 수많은 또치까를 세워놓았다. 사진은 위자구 부근에 세워놓은 또치까.

1936년 8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괴뢰만주국정부와 ‘만척’에서 략탈한 토지면적은 연변에서 1,207.6헥타르, 목단강성에서 17만 3,850헥타르, 안동성에서 2,102헥타르나 되였다. 인구가 적은 개척단이 많은 토지를 점하고 있어 부분적 토지를 조선인 농호와 한족 농호에 소작주기도 했다. 하여 조선인 농민과 기타 여러 민족 농민들은 일본개척단의 소작농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특히 ‘7.7’사변 후 일제는 농민들에 대한 고리대 착취를 다그쳤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은 대부금과 변돈을 갚을 수가 없어서 자작농으로부터 일제 식민지회사의 소작농으로 전락될 수 밖에 없게 되였다.

일제는 이른바 ‘량곡출하제’와 ‘식량배급제’로 동북의 여러 민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량곡출하’란 농민들이 일년 내내 뼈빠지게 가꾸어 타작한 알곡을 최대한으로 략탈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인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결전징수방책’을 실시하여 동북의 량곡을 철저히 징수하려고 들었다. 지어는 무력적으로 농민들을 강박하여 량곡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는 이른바 ‘보은출하’로 량곡을 더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논을 경작하는 조선인들은 벼를 몽땅 바친 후 잡곡을 사서 먹게 했다. 일제는 최고한도로 생산량을 내오고 최저한도로 백성들의 배급을 줄이면서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미쳐 날뛰였다.

위만 관리들과 경찰들은 출하 기간이면 농호에 뛰여들어 온 집안을 휘딱 뒤지면서 어디에다 량식을 감추지 않았는가 수색하기가 일쑤였다. 촌공서의 관리나 경찰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쌀뒤주를 들추고 심지어 작대기에 색대를 맞추어 짚가리, 나무가리, 구들고래 안, 지붕과 변소까지 들추었는데 일단 량식을 감춘 것이 드러나는 날이면 마구 때리고 붙잡아갔다. 연길현 구수하 영창동골안에서 산 박로인의 일제 출하에 대한 구술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구수하 영창동에는 33호가 살고 있었는데 말짱 길주, 성진, 명천 사람들이였다. 바심이 끝나면 촌공서와 분주소의 순사들이 나와 출하량을 매호에 정해주고는 아무때까지 바치라고 하였다. 굶어죽어도 완수해야 했는데 완수하지 못하면 감옥에 붙잡혀갈 판이였다. 대동아전쟁이 폭발한 뒤 더 혹심해졌는데 한번 바치고 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두번이고 세번이고 있는 대로 바쳐야 했다. 순사들이 다 긁어가면 끼니거리가 떨어지니깐 동네사람들은 순사들의 눈을 피해 골안에 찾아가 김치움처럼 굴을 파고 쌀독을 거기에 넣어두었다. 쌀독에 조, 옥수수, 콩, 보리, 수수 따위의 걷곡을 채워넣고 뚜껑을 잘 덮고는 흙으로 묻어버린 뒤 나무검불로 눈가림을 해놓았는데 그렇게 하고서야 분주소의 순사나 총공서의 관리들의 수색을 요행 피면할 수 있었고 그걸로 겨울을 나고 밭갈이철에 씨종자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출하를 완수하지 못해서 매맞고 구류당한 사람이 있었다. 반작을 하는 사람들은 두번째로 공출하는 출하는 고사하고 처음 출하도 완수할 재간이 없었다.

그 때 동네에 전조감이라는 량반이 있었는데 이미 일흔고개를 넘기고 있었다. 어느 해인가 그 량반 댁에서 출하를 완수하지 못하자 분주소의 왜놈순사가 그 량반을 차렷을 시켜놓고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출하를 완수 못하였거나 량식을 감춘 것이 발각되여 얻어맞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축이였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근로봉사에 끌려가는 것이였다. 놈들은 출하를 완수하지 못한 사람과 량식을 감춘 사람들을 근로봉사에 보냈는데 촌공서의 사무원이 분대장으로 되여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근로봉사에 끌려간 사람들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근로봉사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하도 많았기에 근로봉사에 나갈 때면 모두들 죽는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1941년부터 주민들의 식량표준을 최대한 제한하는 ‘배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 농민들은 피땀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쌀은 한알도 입에 대보지 못하고 털어 바치였으며 그 대신 보리, 감자, 옥수수 같은 잡곡을 타다가 끼니를 에워야 했다. 도시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이 이밥을 먹다가 밀정이나 주구에게 발각되면 ‘경제범’으로 몰려 징벌을 받았다.

기짓말에 속히워 온 이민들

ㅡ만주는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된다.

ㅡ로자는 물론 첫 해의 량식, 종자 등을 선대해준다.

ㅡ소, 수레, 농기구도 선대해준다.

ㅡ몇해만 부지런히 일하면 자작농으로 될 수 있다.

ㅡ지금 거처할 집까지 지어놓고 당신들을 기다린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을 듣고 조선의 파산농민들은 땅이 흔하고 기름지다는 만주에 가 팔자를 고쳐보자고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게 되였다. 그러나 정작 지정해준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집까지 지어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였다.

 천보산광산에서 일본인의 감독하에 일하고 있는 조선인 및 중국인 광부들

“놈들에게 속았구나!”

격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디 가서 해볼 데도 없었다. 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눌러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득불 한족농민들 집에 얹혀살거나 거의 찌그러져가는 방아간, 고간 같은 데를 빌어 대수 손질하고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향을 떠날 때만 하여도 만주의 허허벌판 어디엔가에서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다수 농민들이 정작 도착한 곳은 지세가 높은 산골이였다. 만선척식회사에서 첫 해에 종자와 식량, 농쟁기를 살 돈을 선대해주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로 종자값과 선대한 돈, 그리고 거기에 붙은 리자까지 갚아주어야 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민들은 봄갈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 집단이민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촬영을 목적으로 5년간 심층조사를 벌려온 촬영가 리광평씨가 처음으로 발견한 데 의하면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935년 음력 3월 연길현 6구 대말리구 남하마탕에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200세대 농민들을 사기수단으로 끌어들여 시험적으로 조선인 집단이민 부락을 세웠다고 한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에 넘어간 조선인 농민들이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1937년 봄부터 경상북도의 문경, 상주, 봉화, 안동, 려천 등지에서만도 400―500호가 왕청현 동신향 전각류, 태양촌 등지에 이민으로 왔고 라자구에는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봄까지 600호, 1940년에 100호가 거짓말에 속히워 들어왔다.

연길에 살고 있는 83세(2005년 당시의 나이)의 채도식씨의 고향은 경상북도 산양면 현리 문경군에 있었는데 고향에 일가친척이 70여호나 있었다. 조실부모한 채도식씨는 백부님과 함께 고농살이를 하다가 팔자를 고쳐보려고 1938년 2월27일 아침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기차역까지 배웅 나왔던 백부님이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통곡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기차에는 채도식씨처럼 고향을 등진 사람들로 가득차있었다. 기차가 떠나자 렬차 안은 울음바다로 되고 말았다.

눈물과 한숨을 가득 실은 기차는 추풍령을 넘어 근 50시간을 달려 3월 1일 아침에야 도문에 들어섰다. 거기서 좀 멈춰섰던 기차는 다시 떠나 아침 9시경에 대흥구에 도착하였다. 대흥구에서 하루 쉬고 3월 2일 이른아침에 트럭을 타고 눈이 하얗게 깔린 산골을 100여키로메터나 달려, 그것도 50키로메터나 되는 무인지경을 경과하여 목적지인 사도하자 집단부락에 도착하였다. 집단부락 주위에는 높다란 흙담을 쌓았는데 담 밖에는 한길 넘는 해자를 파놓았고 동서남북 네곳에 대문을 달고 경찰의 감시 밑에서 자위단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라자구에 이민으로 온 집들은 1937년 가을에는 150호, 1938년 3월에는 450호였는데 모두 6개 집단부락에 나뉘여 살았다고 한다. 집단부락과 집단부락들 사이는 3—5키로메터 되였는데 후에는 이민들이 너무 많아 한족부락에 나뉘여 살게 되였다.

채도식씨 일가는 한족집 곁방에 거처했었는데 6평방메터 밖에 안되는 방에 여섯 식솔이 들었다. 좁은 방에 크고 작은 가장집물을 놓고 나니 발 펼 자리도 없었다. 급선무는 봄갈이 전에 집을 짓는 것이였다.

3월말부터 언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4월초가 되여도 땅이 녹지 않아서 벽을 쌓을 수가 없었다. 토피를 만들자면 밭갈이전에 집을 다 짓지 못할 것 같아서 큼직큼직한 흙덩이를 떠다가 개암나무로 엮어가며 벽을 쌓았다. 4—5일 사이에 전 부락에 흙집들이 세워졌다. 이런 집에 구들을 놓고 거적으로 문을 달고 이사를 했다.

이사온 첫날밤에야 여섯 식솔이 오래만에 다리를 펴고 쉴 수 있었다. 구들이 뜨뜻했지만 갓 지은 흙집이라 누기가 몹시 찼고 초벽을 못한 벽에는 구멍이 숭숭하여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봄눈이 내리면서 바람이 불었다. 방안으로 눈이 날아들어와 덮은 이불이 축축이 젖었다. 그래도 이게 내 집이라 생각하니 추운 줄 몰랐다.

봄갈이가 시작되였다. 만선척식회사에서 봄갈이전에 매호에 소 한마리씩 대부해주기로 했는데 소들을 미처 사들이지 못하였다. 요행 사온 소들 가운데는 너무 어려서 아직 쟁기를 메울수 없는 소들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네댓집에서 겨리를 무어 밭 씨붙임을 하는 한편 논을 풀었다. 보를 막고 물길을 째고 논에 물을 대였다. 채도식씨네 집에는 땅이 두헥타르 차례졌는데 씨붙임을 제때에 할 것 같지 못해 온 식솔이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오곡과 남새를 심었다. 그야말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이고 들어오면서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에 달라붙었다. 일이 고되고 수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애벌김이 끝난 7월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질에 걸려 고생하였다. 그 때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름에 보리를 조금 거두었다. 가을에는 벼, 조, 옥수수, 기장, 콩, 감자 등도 거두어들였다.

1941년부터 생활이 다소 안정되였으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게 되자 통제는 더욱 심해졌다. ‘출하’제가 실시된 후부터는 왜놈들이 입쌀을 몽땅 빼앗아가는 바람에 명절 때나 잔치와 같은 경사에도 입쌀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래도 집짐승들을 길러 팔아서 아이들 월사금을 물고 비누, 소금 같은 것을 살 수 있었으나 이젠 먹이가 없어서 짐승을 기를 수도 없게 되였다.

1943년 여름에는 황충이 성해서 곡식 잎들이 황충에게 다 갉아먹히워 버렸다. 산전에 심은 곡식들은 곰과 메돼지들이 덮쳐들어 모조리 절단 내는 바람에 그 해 농사는 거의 페농이 되다싶이 되였다. 그래서 그 해의 ‘출하’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다. 그러자 놈들은 경찰을 풀어 집집을 수색하여 낟알을 몽땅 략탈해갔다. 이밥을 먹으려고 입쌀을 감추어두었다가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 끌려가 물매를 맞기가 일쑤였다. 마을에 김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밥을 먹다가 경찰놈들에게 들켜 석달 동안이나 류치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출하’를 바치면 돈을 주기는 했으나 그 돈으로 빚을 갚고 나면 옷감이나 신을 살 돈도 없었다. 그리고 ‘출하’량에 따라 천을 주기로 했는데 그것마저 관리놈들이 잘라먹다 보니 실지 농민들에게는 별로 차례지지가 않았다. 1944년에 들어서서는 입을 옷조차 없어서 이불을 뜯어 옷을 해입었고 이불솜으로 무명천을 짜서 여름철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떤 집에서는 녀자들이 밖에 입고 나갈 치마가 없어서 치마 하나를 번갈아입었다. 그 해 겨울에 권도찬이라는 27살 나는 청년이 홑옷바람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채도식씨가 겪고 본 이민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 때 가는 곳마다에서 펼쳐졌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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