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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3년만에 입당한 심유학 “자동차공장은 나의 집”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19 09:02:53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19)

이제 얼마 안 지나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성대히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또 올해는 중국자동차공업의 ‘장자'인 제1자동차공장이 세워진지 66주년이 되는 해다. “나이가 70을 먹으면 고래희”라는 말이 있고 또 “66은 대순”이라고들 한다. 그야말로 새중국의 건설을 위하여 많고 많은 조선족건설자들은 자신의 일터에서 형제민족들과 어깨를 겯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불태워왔다.

사진첩을 펼치며 자동차공장 시절을 떠올리는 심유학로인과 부인 최순옥녀사.

올해 76세에 나는 심유학은 1963년에 제1자동차공장에 입사하여 불과 3년만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주위 로동자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한몸에 자아낸 자동차공장의 조선족건설자다.

“우리 집은 제1자동차공장과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항미원조에 참가했다가 돌아와서 자동차공장 1대 건설자로 들어갔고 다음은 저와 형제들이 2대 건설자로 자동차공장에서 일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자식들이 우리 뒤를 이어 자동차공장에 다니고 있답니다.” 전야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9월 중순의 어느날 오후, 심유학은 제1자동차공장 주택단지에 자리 잡고 있는 자택에서 기자를 마주하고 이렇게 서두를 떼며 자동차공장에서 열의를 태우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이어 내려갔다.

1943년 2월생인 심유학의 고향은 흑룡강성 수화의 한 농촌, 부친 심주식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돌아와 조직의 배치로 제1자동차공장에 오게 되였다. 당시 흑룡강성 로동모범인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지 말자고 아버지를 그렇게 설복하였으나 결국에는 남편을 따라 자식들을 거느리고 산 설고 물 선 이곳 장춘까지 오게 되였다. “장춘으로 이사 온 그 이듬해 어머니와 함께 당선된 흑룡강성 로동모범들은 수도 북경에 가서 모주석을 만나뵈는 영광을 가졌지요. 만약 그때 자동차공장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도 아마 모주석을 만나뵜을겁니다. 그 일을 두고 어머니는 내내 외웠습니다. 평생 유감이라고 생각했을거예요.” 심유학은 자동차공장과 얽힌 부친세대의 한 단락 력사를 이렇게 회억한다.

공장에서 일을 지휘하고 있는 심유학.

장춘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후 1963년 말 심유학은 제1자동차공장의 공구분공장에 입사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한동안의 ‘정치운동'을 겪다가 다시 경제건설에 중시를 돌릴 때쯤 공장에서는 한번에 많은 로동자를 모집하였다. “자동차공장의 생산직장 안으로 들어서니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에 어마어마하게 큰 기계들과 그 기계들이 내는 동음에 저는 눈이 휘둥그레졌지요. 난생처음 보는 장면인지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대단하게만 보였던 것이지요.” 자동차공장에 입사해서 받은 첫 인상을 심유학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20살에 제1자동차공장에 들어간 심유학은 선배 로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술을 잘 배워 훌륭한 로동자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상해 등 곳에서 온 기술일군들이 생산직장에 적잖았다고 한다. 숙련공이 되기 위해서는 학도공으로 3년이라는 시간을 있으면서 직장에서 안배한 스승한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옛말에 허심함이 사람을 진보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요. 입사해서 선배 로동자들을 따라 시작부터 하나 둘씩 허심하게 배웠지요. 일에서 태도와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스승들도 아마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자신들의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던 것 같아요.”

선진당지부로 당선된후 직장 동료들과 함께(앞줄 오른쪽 세번째).

자동차공장 1호문 앞에서 직장 동사자들과 함께(앞줄 오른쪽 네번째).

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의 생산직장에서 심유학은 말없이 공장건설에 최선을 다했으며 무슨 일에서나 겸손하고 허심하며 진보적인 청년이였다. 입사한지 3년이 되던 해인 1966년, 23살밖에 안되는 열혈청년 심유학은 생산직장에서 그 우수함을 모두로부터 인정받아 영광스럽게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당시 시절로 놓고 말하면 실로 드물고 조련찮은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심유학은 50년이 넘어 지난 오늘도 “이 모두 당시 직장 령도들이 한창 젊은 저를 관심하고 배양한 덕분이지요. 조직의 양성과 갈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라고 말해 역시나 겸손함이 그의 일생과 동반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는 1970년도에 결혼했는데 오래 동안 저녁밥을 식탁에 마주 앉아서 함께 먹어본 적이 없은 걸로 기억됩니다. 아침에 나가면 한밤중에야 퇴근했지요. 어린 아이들을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안고 하면서 제가 혼자 키웠답니다.” 심유학의 부인이며 역시 제1자동차공장의 로동자로 있다가 퇴직한 최순옥녀사는 공장에서 휴식일도 없이 분망하게 보내던 시절의 남편을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자동차공장 종업원들은 장춘의 기타 조선족들과 함께 해마다 남호에 모여 단오명절을 함께 보냈다. 그때마다 자동차공장의 형제민족 책임자들은 모처럼 조선족모임에 참가하여 명절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사진은 단오명절을 함께 보내는 심유학(왼쪽 첫번째)과 자동차공장 형제민족 책임자들.

심유학은 공구분공장에서 20대에는 작업반장으로 30대에는 생산과의 배정원이라는 관리일군으로 그리고 40대에는 다시 생산직장으로 돌아가 백여명의 로동자를 거느리는 직장주임으로 있으면서 수차나 로동모범, 선진사업자의 영예를 지녔으며 그가 이끄는 직장은 모범생산직장, 선진당지부의 영예를 따냈다. "때로는 이불짐을 싸들고 공장에 가서 먹고 자면서 일했습니다. 그때 세월에 전국에 자동차공장은 하나라 수요량은 엄청 많지 밤을 새가며 곱대거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우리는 공장을 집처럼 생각하면서 몸을 내번지고 일했지요." 심유학은 밤을 새가면서 한푼의 보수도 없이 곱대거리를 하던 그 시절을 되돌려보면서 그러나 지금도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심유학은 퇴직하여 자동차공장 조선족로인협회에 들어가서도 말없이 협회를 위하여 수걱수걱 일들을 해왔다. 전기제품 수리에 손재간이 있는 그는 협회에 음향설비가 없는 것을 보고 시내안의 고물수매장들을 돌면서 낡은 음향설비를 사다가 부품을 뜯어내 다시 조립해서 내놓아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로인협회 활동실이 비가 새서 정상적인 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아들까지 동원하여 함께 집수리에 나서기도 했다. 말없이 꾸준히 좋은 일들만 해온 심유학을 놓고 자동차공장 조선족로인협회 전임 회장 김수금녀사는 그를 ‘늙은 황소'라고 치하한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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