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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공장 첫 원림록화 고급공정사 한복금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24 08:28:57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0)

제1자동차공장건설에 참가한 조선족로일대들의 사적을 파헤쳐 보느라면 마치도 진흙 속에서 반짝이는 진주를 발견하는 느낌이 든다. 공장을 위해 국가급 표준을 제정한 기술자, 자동차연구소의 제일 나젊은 고급공정사, 자신의 의술과 헌신정신으로 20여명의 홍역에 걸린 어린이를 치료한 백의천사, 수십명 체육건아의 계몽코치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교육자... 제1자동차공장의 원림록화사업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바지한 한복금도 이들 중의 한 일원이다. 직장시절 자동차공장의 ‘도시 미용사'로 불리웠던 한복금은 1953년에 공장이 설립되여서부터 41년 동안이나 원림록화부문에 공백이던 첫 고급공정사의 직함을 따낸 기술일군이다.

 
직장시절 자동차공장의 ‘도시 미용사’로 불리웠던 한복금.

고향이 왕청현인 한복금은 1968년에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흑룡강성 북대황농장에 내려가 1년 남짓한 시간을 ‘지식분자 재교육'을 받으면서 일했으며 그리고 그 후에는 교하와 장춘 정월담에 있는 원림부문에서 사업하다가 1971년에 제1자동차공장의 열처리분공장에서 5년 동안 근무, 1976년에 본인의 전공을 찾아 자동차공장 공장구역관리처 원림과로 자리를 옮겼다.

공장구역관리처로 처음 출근해서 받은 충격적인 인상을 한복금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원림록화로 쓰이는 실험기지에 나무는 없고 배추를 심어놨더라구요. 점심시간이 되자 로동자들은 그 배추를 뽑아다가 쌈을 싸서 먹었습니다. 기술일군들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나이가 좀 있는 적잖은 로동자들은 자기의 이름자나 쓰는 정도의 문화수준밖에 안됐지요. 그리고 운반도구는 겨우 마차 한대밖에 없는 신세였지요. 자동차공장에 이렇게 락후한 곳도 있는가 하고 놀랐지요."

당시 원림과의 과장은 장기적으로 앓는 몸인지라 부과장으로 온 한복금한테 모든 것을 맡겼다.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자동차공장의 90%에 달하는 수목들이 파괴되였으며 록지도 거의 소실된 상태였다. 공장에서 정상적인 생산이 회복되면서 원림록화계획도 의사일정에 오르게 되였다.

"당시 우리한테 제일 부족한 것이 인재였어요. 전업기술일군이 거의 없다보니 원림설계와 재무계획 같은 것도 제가 나서서 해야 했지요. 저도 이 분야의 전공이 아니였으나 제가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는 인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때마침 실습을 온 장춘시도시건설학교의 학생들을 공장지도부에 반영하여 단위에 남기는데 성공, 이렇게 15명의 신병을 보충했다. 그 후에도 그녀의 노력으로 선후로 여러 대학들에서 수명의 대학생들을 받아들여 드디여 단위에 인재가 결핍하던 오랜 문제를 해결했다.

 
원림록화 설계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한복금.

한복금은 자동차공장구역에 내려가 원림록화조사를 진행하여 서류를 작성하고 선후로 중앙거리와 공장 1호문, 공청단화원의 록화를 완성하였다. "공청단화원의 록화를 할 때에는 전 공장의 수많은 공청단원들과 청년 로동자들이 동원되여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고 란간과 산책도로를 만들고 나무들을 심었습니다. 그 장면이 장관이였어요." 자동차공장은 한복금을 비롯한 300여명 원림록화사업일군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한곳 두곳 푸른 단장을 입어가기 시작하였다.

한복금은 원림록화에서 비수기인 겨울 한절기를 빼고는 거의 휴식일이 없이 바삐 보냈는데 퇴직할 때까지도 휴가 한번 써보지 못했다. 식수철이 돌아오면 그는 로동자들과 함께 아침 일찍부터 늦은 오후까지 나무심기에 바삐 돌아쳤는데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를 제 시간에 데려오지 못할 때가 거의 매일이였다. 부부가 모두 외출할 때에는 할 수없이 유치원선생님이거나 지인들에게 맡겨야 했다. 한복금은 딸이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유치원에 가서 동생을 데려오는 임무를 아예 어린 딸에게 맡겼다. 왕청에 계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에도 기차에 오르기 두시간전까지도 그는 단위에서 일을 보다가 길을 떠났으며 장례를 마친 이튿날로 단위에 돌아와서 출근했다.

원림록화기술일군인 한복금은 20여년 동안 실천과 리론을 결부해 수십만자의 필기를 하였으며 수십편의 글과 론문을 《중국화훼분재》, 《국토록화》 등 잡지에 발표했으며 제1자동차공장 원림록화프로젝트애 관한 방안을 써서 제출하였는바 그의 제안으로 자동차공장 원림록화사업은 해마다 새로운 변화와 돌파를 가져와 련속 수년간 길림성과 장춘시의 록화선진단위로, 1991년에는 국가로부터 록화조림선진단위로 되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겨울철 온실에서 화훼를 관리하고 있는 한복금.

1994년 공장에서는 원림록화사업에서 이룩한 그의 괄목할만한 성적과 전업기술수준을 충분히 긍정하여 자동차공장이 설립되여서 처음으로 원림록화 고급공정사라는 기술직함을 한복금에게 수여했다. 1953년 자동차공장이 설립되여 41년간 공백이던 이 기술직함을 수여하기 위하여 공장에서는 특별히 장춘시의 원림록화방면의 전문가들을 청해 한복금의 기술직함 평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장에서는 이 방면의 기술직함 평의 사업일군들이 부재했던 것이다.

한복금은 자동차공장 공장구역관리처에서 사업하는 동안 원림과, 공원과, 록화사무실 등 곳을 옮겨 다니며 기술을 책임지고 일하였는데 비록 일터는 바뀌였지만 일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전업기술에 대한 탐구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수차나 제1자동차공장의 선진사업자로 그리고 장춘시 선진사업자로 당선되였다.

"젊은 대학생들이 륙속 들어와서 단위의 기술력량으로 자리를 잡아갈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의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두손으로 볼품없던 단위를 하나로부터 둘, 둘에서 셋 이렇게 차츰 정규화로 만들어나갔지요. 제가 처음 와서 앉아 다니던 마차도 보기 좋게 자동차로 바뀌였구요," 제1자동차공장의 원림록화사업을 위하여 한몸을 가누지 않고 일해왔던 지난날을 회억하면서 한복금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감에 넘쳐있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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