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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1) ― ‘로령회의’와 ‘혜산사건’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25 14:26:22 ] 클릭: [ ]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1) -‘로령회의’와‘혜산사건’

타락분자 비겁분자들 적에게 투항하고

반일조직 항일련군 엄중한 파괴를 당해

‘제1차 로령회의’

‘로구교사변’ 후 항일련군 제1로군은 영용히 싸워 일제의 부단한 ‘토벌’을 분쇄했지만 항일유격근거지도 크게 파괴되였고 항일련군도 큰 손실을 보게 되였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인 위증민은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의 국내외 형세와 동북항전의 새로운 형세를 연구한 후 1로군의 투쟁 방침과 임무를 확정하려고 총사령원 양정우와 회합할 것을 기획했다. 이에 양정우는 제1군 군부 및 직속부대를 이끌고 환인에서 북상하여 집안에 이르고 위증민은 제2군 주력부대를 이끌어 남하하여 집안의 로령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전을 앞둔 항일련군 장병들.

1938년 5월 상순, 위증민 부대와 양정우가 거느린 제1군 군부가 집안의 로령산구에서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오도구밀영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정간부 회의가 소집되였다. 이번 회의를 세칭 ‘제1차 로령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양준항, 한인화, 황해봉, 진수명, 서철, 려백기, 이준산, 송무선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국과 동남만의 투쟁형세를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였으며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들의 전면적인 진공을 분쇄’ 할 방침과 책략을 채택, 금후의 유격운동의 방향 문제를 토의하기도 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관내의 팔로군과 련계할 문제와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의 배합작전 문제를 제의했다. 양정우의 제의에 따라 중공중앙과 팔로군과의 련계를 계속하여 추진하기 위해 다시 서정하기로 결정, 제1군 제3사가 서정을 선행하기로 했다. 그 뒤를 이어 제1군 제1, 제2사가 따르기로 했다. 각 항일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위해 제2군 제4사, 제6사는 계속하여 통화지구에서 유격활동을 벌리기로 하고 제5사는 의연히 수녕지구에서 활동하면서 길동, 북만지구 항일련군들과 련락공작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제1로군 개편

로령회의의 정신에 좇아 제1로군 각 부대는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양정우가 이끄는 서부원정부대는 움직이자 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였다. 그 때 제1군 제1사 사장 정빈이 적에게 투항했다. 원래 양정우가 제1군 군부와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환인을 떠난 본계, 환인, 관전, 봉성 일대의 투쟁형세는 급격히 악화되였던 것이다. 적들의 군사‘토벌’, 경제봉쇄, 정치유항(诱降)의 지독한 정책에 의해 항일대오중의 견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요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13일, 일제의 ‘장도공작반’과 ‘흑기유격대’가 갑작스레 환인현 우모구 서차밀영을 습격했다. 남만성위 선전부 인쇄주임 반제(원명 김영호) 등 5명이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제1군 참모장 안광훈이 체포된 후 변절해버렸다. 안광훈은 변절한 후 적들에게 제1군의 중요한 기밀을 발설했다. 안광훈의 공술에 의해 적들은 2월 25일, 환인현 쭈무타이즈에서 제1군 정치부 선전과장 겸 남만성위 비서처 편집주임 박세창을 체포했다. 3월 6일에는 환인현 우모대산에서 남만성위 청년부장이며 항일구국청년단 남만총회 서기인 류좌건을 살해했다.

‘장도공작반’은 교란을 목적으로 변절자 안광훈, 후국신 등더러 여러 차례 제1사 사장 정빈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한편 ‘흑기유격대’는 군사적 진공을 가해왔다. 적들은 6월 8일, 제1사 근거지의 포석하에까지 진공해왔다. 정빈은 부대를 거느리고 관전, 환인, 본계로 이동하면서 여러 차례 적들의 타격을 받았다. 6월 29일, 정빈은 본계에서 ‘장도공작반’의 투항서를 접수한 후 투항을 견결히 반대한 1사 6퇀 정위 리철수, 1사 정치부 보안련 정위 김종한 등 지휘원들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수하 29명과 함께 적들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제1군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고 말았다. 제1군은 물론 전반 항일련군 제1로군의 군부서, 부대건제(建制), 지휘원들의 활동 경로와 부대의 활동구역, 전략전술, 군수물자원천, 소속 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 등을 잘 알고 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정빈은 투항 후 두말없이 이 모든 것을 적들에게 일일이 교대했다. 정빈의 투항으로 하여 1군의 서부원정계획은 더구나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정빈의 투항으로 엄중한 손실을 받은 중공남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938년 7월 중순에 양정우, 위증민, 방진성, 이준산, 서철, 한인화, 황해동, 양준항, 려백기, 손무선, 리흥소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재차 집안의 로령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정빈이 변절한 후의 정세에 따라 1로군의 전반 항일투쟁에 대해 다시 연구했다. 회의에서는 일부 대오를 남겨 로령산구에서 계속 유격전을 견지하게 하고 주력부대는 룡강산맥의 하리와 화전, 몽강 등 산악지대로 이동하면서 서부원정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제1로군의 군과 사의 체제를 취소하고 총사령부의 통일적인 령도하에 한개 경위려와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 각 부대의 작전지역을 새로 획분할 데 관한 중요한 결정을 짓기도 했다.

1938년 7월말, 원 제 1, 2군 교도퇀과 2군 독립려를 합병하여 사령부 경위려로 편성, 양정우의 직속 령도를 받게 했다. 려장은 방진성이 맡고 정위는 한인화가 맡았다. 독립려의 병력은 도합 500여명이였는데 주로 금천, 몽강, 집안 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같은 해 8월, 50여명으로 된 소년철혈대를 무어 총사령부의 활동에 밀접히 배합하게 했다. 8월, 제1군 2사와 2군의 부분적 병력으로 금천현 곰골에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는 조아범, 정치부 주임은 이준산, 참모장은 윤하태가 맡고 아래에 한개 퇀과 한개 기관총반을 두었다. 병력은 250명 좌우였고 집안, 림강, 통화, 금천, 휘남, 몽강 등지에서 활동했다. 11월, 몽강현 남패지에서 원 제2군 6사로 제2 방면군을 편성하였다. 지휘에 김일성, 정치부 주임에 려백기, 참모장에 림수산이였다. 아래에 2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50여명이였고 장백, 무송, 몽강, 림강, 화룡, 안도, 연길, 훈춘, 왕청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9년 7월말 돈화현 한양구(지금의 안도현 경내)에서 원 제2군 4, 5사의 합병하에 제3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은 박덕범이였다. 아래에 3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이였고 연길, 왕청, 훈춘, 돈화, 액목, 교하, 녕안, 오상, 서란 등지에서 활동했다.

‘혜산사건’

중공당원인 권영벽은 1935년 조국광복회가 설립된 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30여명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장백현에 파견되여 장백현조국광복회를 조직했으며 조국광복회의 우수한 회원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여 당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드디여 1937년 중공장백현위를 건설, 제1임 현위 서기를 맡았다. 7월, 장백현 17도구에서 제1차 중공장백현위원회를 소집, 군중을 발동하고 항일련군의 항일투쟁에 배합하여 일만군의 병툰계획을 파괴하는 등 투쟁 방향을 명확히 했다.

간고한 나날 중공장백현위는 전 현 각급 공산당조직과 당의 외각조직, 광범한 인민군중을 조직, 령도하여 항일을 선전하고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중공장백현위의 이러한 반일활동은 적들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적들은 “장백특무공작대대”를 무어 사처에 특무를 파견하여 정보를 탐지했다. 적들에게 걸려든 김태국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 몇대를 맞고는 권영벽이 17도구에 있다는 것을 인차 고스란히 일러바쳤다.

9월의 어느 깊은 밤 조선 혜산의 일본경찰들은 감쪽같이 17도구에 기여들어 권영벽과 서응진을 체포했다. ‘혜산사건’은 이렇게 막을 열게 되였다.

김태국의 고발에 의해 벌써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핵심 인물들이 검거받게 되였다. 제1차 검거를 통하여 적들은 장백 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두고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 건너 갑산 일대에까지 마수를 뻗치였다. 하여 중공장백현위와 장백현조국광복회는 마비되거나 해체 상태에 이르게 되였다.

그 후 마동희와 장증렬이 체포되였는데 마동희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스스로 끊으면서 투쟁을 견지한 반면 장증렬은 곤장맛을 몇대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죄다 고발했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 관하에서 자기와 련계를 맺고 있던 반일혁명조직의 지도 핵심 성원들 그리고 항일부대와 밀영의 위치까지도 아는 대로 다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 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렬처럼 변절하고 말았다. 조개구는 재봉대가 자리 잡고 있는 간판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 전원이 희생되게 했다.

이번 사건에서 수많은 중공당원, 조국광복회 회원, 반일인사들이 체포되였는데 일제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하여도 167명이나 된다. 일제는 이들의 ‘죄’를 158페지의 판결서로 렬거, 전원이 ‘치안유지법 위반’이고 그외에 주택 침입, 강도, 살인, 살인미수, 방화, 공문서 훼손, 우편법 위반, 전신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 위반, 출판법 위반, 륙군형법 위반, 군기보관법 위반, 범인을 감추고 비호한 죄 등 되도록 중하게 하기 위하여 갖은 죄명을 다 들씌웠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적들에게 압수된 것으로는 기관지 《火田民》 제1호로부터 7호까지, 비밀출판물 《朝鮮共産主義者의 任務》, 《同志여 團結하라!》, 《日中戰爭과 朝鮮靑年의 任務》, 《國際뉴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10여종, 무기로는 권총, 탄약, 단도 등이였다. 이러한 죄목으로 일제는 1941년 8월 28일, 167명에 대해 판결했는데 권영벽 등 6명을 사형에, 박금철 등 4명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그 외에 15년 징역에 4명, 13년 징역에 6명, 12년 징역에 9명, 10년 징역에 18명, 8년 징역에 14명, 7년 징역에 7명, 6년 징역에 4명, 5년 징역에 8명, 4년 징역에 10명, 3년 6개월 징역에 7명, 3년 징역에 48명, 2년 6개월 징역에 5명, 2년 징역에 16명이 언도되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결국 중공장백현위와 조국광복회의 지도기관은 철저한 파괴를 당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금후 항일련군의 군사활동에 엄중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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