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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력사(62)― 고난의 행군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10 16:02:39 ] 클릭: [ ]

추위 기아 병마 일만군의 포위공격 이겨내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위해 고난의 행군 강행

일제의 ‘3성련합토벌’

1937년 7월부터 시작한 ‘3년 숙정계획’에 근거하여 일제는 5만여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삼강지구에 대한 1년 반 동안의 ‘대토벌’을 감행한 후 ‘치안숙정’ 의 중점을 동남만지구에 돌리였다. 하여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의 1년 반동안의 ‘3성련합토벌’ 을 감행했다. 이번 ‘대토벌’의 주공 목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이고 주요한 토벌구역은 간도성과 통화성 전체, 길림성 동부의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지와 목단강성의 녕안현이였다.

고난의 행군 로정도.

이번 ‘대토벌’에 참가한 일만 군경은 도합 6만명, 그중 일본군으로는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5, 제9, 제21, 제7, 제8, 제4 등 6개 대대(후에 제19, 제20 대대를 증가)였다. 그외에 각 대대에 20개의 무선전분대와 헌병을 배비, 총 6,400여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위만군은 제2군관구 보병 제2려, 기병 제2려, 제2교도대, 제8군관구 제1, 제2, 제3혼성려, 제8교도대, 제6군관구 1개 려, 제7군관구 1개 려, 제1군관구 보병 제5퇀 및 통신부대와 자동차대 등 도합 2만 5,000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경찰대로는 통화성경찰대(10개 대대), 간도성경찰대(5개 ‘토벌’대), 길림성경찰대(14개 ‘토벌’대), 목단강성경찰대, 간도특설부대, 통화성의 9개 현, 간도성의 5개 현, 길림성의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 현과 목단강성의 녕안현 경찰대, 통화, 간도, 길림 3성 및 소속 각 현의 경찰조직과 특별순찰반, 동변도지구의 각 위만삼림경찰대, 위만신경경찰학교 학병대, 위만영구해상경찰대의 비행기 2대 및 금주, 봉천, 빈강 등 성의 경찰증원대 도합 3만여명이였다.

일제는 ‘3성련합토벌’을 대체상 3개 단계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4월까지 제1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통화성 각 현과 길림성 화전현에 두고 제1로군 총사령부와 경위려 및 제1방면군을 소멸한다는 것이였다. 1940년 4월부터 9월까지 제2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의 안도, 화룡, 왕청과 목단강성의 녕안, 동녕과 길림성의 서란, 빈강성의 오상 등지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 것이였다. 1940년 9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제3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특히는 목단강, 간도, 길림 3성 변경지구와 왕청, 훈춘, 동녕, 액목 4개 현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 것이였다.

일제는 미친듯한 군사‘토벌’과 함께 ‘토벌’구역에서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항일련군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 항일부대에 량식 한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통화, 간도, 길림 3성에 예비도로 20여갈래를 새롭게 건설했고 100키로메터의 전화선을 새롭게 가설했다. ‘토벌’ 기간에 일제는 도로와 철도 량켠에 농작물을 심지 못하게 했고 산비탈에 밭을 일구지 못하게 했다. 철도와 도로 량켠 50메터내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리게 하고 철도와 도로 연선에 경위대를 배치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제는 항일련군 밀영 2,085개를 훼멸해버렸다.

일제는 ‘군사토벌’과 함께 ‘사상토벌’, ‘문화토벌’도 감행했는데 ‘토벌’지구에 대량의 ‘토벌’인원을 파견하여 ‘선무활동’을 하게 했다. 동시에 ‘토벌’지구에 반공삐라와 색정적인 사진, 음란한 서적과 간행물을 살포하여 항일련군의 사상을 부식시키고 정신을 유혹시키려 했다. 항일련군 내부를 분화시킬 목적으로 일제는 항일련군 고급 장령을 잡거나 죽이면 상금을 준다고 결정했다. 군급 간부의 경우 만원, 사급 간부의 경우 5,000원, 퇀장과 참모장의 경우 2,000원, 기타 장령은 1,000원으로 상금을 정했다. 일제의 발광적인 ‘토벌’은 항일련군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만군에게 1,170여명 항일군민이 도살되였고 900여명이 포로되였다.

일제의 ‘다니전술’

1938년 11월 25일,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는 몽강의 남패자에서 제2군 제6사와 회사한 후 2군 6사를 정식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하였다. 김일성이 지휘로 임명되고 려백기가 정위로, 림수산이 참모장으로, 필수문이 부관으로, 림춘추가 의관으로 임명되였다. 직속경위련 련장에 오백룡, 제7퇀 퇀장에 오중흡, 정위에 주재일, 제8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박덕산,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영이 임명되였다. 병력은 총 500여명이였다.

청봉숙영지에 남긴 구호나무.

‘혜산사건’으로 하여 수많은 지하조직이 파괴되였기에 1938년 장백지구의 반일혁명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였다. 이에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산구에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기 위하여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장백현 북대정자로 진격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행군은 적들의 추격과 함께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무서운 병마가 한데 뒤엉킨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고난의 행군이였다.

그 해 따라 추석전에 첫서리가 내렸고 추석 후엔 인차 큰 눈이 퍼부어 초겨울부터 박달나무 얼어터지는 강추위가 들이닥쳤다. 부대는 출발하자부터 적들의 추격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마와 식량난을 받게 되였다. 원래는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 도보로 대엿새면 가 닿을수 있는 거리였지만 아군은 무려 110여일의 엄청난 품을 들여서야 행군을 완성할 수 있었으니 그 간고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행군은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 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행기까지 띄우면서 싸움에 열을 올렸다. 적들은 처음부터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진드기를 일어로 ‘다니’라고 함)을 썼다. ‘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았다가 항일련군이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항일련군에 대해서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이였다. 그 전술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줄창 쫓겨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나게 하는 악착한 전술이기도 했다.

적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아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함정 속에 빠진 아군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적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무턱대고 추격만 당하면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자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갈지자전법’이였다. ‘갈지자전법’이란 행군로를 갈지자 모양으로 잡아나가는 것이였는데 굽인돌이마다에서 되돌아앉아 지키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전술이였다. ‘갈지자전법’은 눈 쌓인 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들을 무찌르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이였다.

그 해 겨울따라 눈이 어찌도 많이 내렸는지 앞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 수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대원도 50~60메터만 걸으면 맥이 진해 주저앉군 했다. 어떤 곳은 눈이 너무 깊어 몸을 굴려 다져가며 길을 내야 했고 어떤 곳은 눈굴을 파고 지나가야 했다. 적들은 어차피 아군이 낸 갈지자 길을 졸졸 따라오는 수 밖에 없었다.

아군의 ‘갈지자전법’

7퇀 퇀장 오중흡은 행군종대의 맨 뒤에서 갈지자모양으로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전투소조를 배치시켰다가 적들이 다가붙으면 사격하게 했다. 적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사이에 매복타격조를 이동시켰다가는 적들이 다시 다가오면 또 답새기군 했다.

적들은 아군이 낸 외통길을 따라오기 때문에 매번 얻어맞는 신세가 돼버렸다. 아군은 드디여 주동권을 쥐고 적을 타격할 수 있게 되였다. 그러는 사이에 아군은 림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투를 벌리면서1939년 정초에 장백현 7도구에 이르렀다. 적들은 갈수록 더 많은 ‘토벌’대를 내몰아왔다. 적기가 아군의 행방을 찾느라고 자주 돌아치기 때문에 우등불조차 맘대로 피울 수 없어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끊임없는 행군이 이어지다보니 걸으면서 잠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군의 행방을 탐지한 적기가 지상부대에 련락을 주어 행군종대에 ‘토벌대’를 벌떼처럼 달려들게 하였다.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요, 하늘에도 적이였다. 급박한 관두에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앞에서 달려드는 적은 기관총소대가 무찌르고 뒤로 달려드는 적은 7퇀이 막고 나머지 대원들은 측면돌파로 포위 속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험한 고비는 요행 모면했지만 노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이에 큰 병력의 집단행군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간파한 부대는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것을 결정했다. 부대는 세개 방향으로 분산하기로 했다. 지휘 김일성이 경위련과 기관총소대를 이끌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 방향으로 나가고 오중흡의 7퇀이 장백현 상강구 일대로, 8퇀과 기타 부대가 무송현 동강 일대에로 나가기로 했다.

부대가 분산되자 집중타격의 성화는 덜 받게 되였으나 식량난만은 어쩔 수 없었다.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굶으면서 청봉 방향으로 행군했다. 먹을 것이 없어 전 부대가 아사의 위협까지 받게 되였다. 그러다가 청봉 부근에서 난데없는 가을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조밭을 발견하게 되였다. 눈 속에 파묻혀있는 조이삭을 보고 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형을 살펴보니 봄에 부대가 신태자밀영으로 가면서 씨붙임을 한 조밭이였다. 지난봄, 부대전사들이 여기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봄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이 허둥지둥 어디론지 달아나버렸다. 아마 항일련군을 일본군 ‘토벌대’로 생각하고 도망친 듯 했다. 항일련군은 밭 임자가 가을에 와서 곡식을 거두어가게 하자고 조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밭의 조가 가을을 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눈무지 속에서 한이삭, 두이삭 힘들게 따낸 조이삭을 찧어 죽을 쒀 먹었다.

그러나 그 좁쌀마저 인차 거덜이 났다. 이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도는 청봉밀영에 가서 감자를 한배낭씩 얻어가지고 가는 것 뿐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감자밭에 이르러보니 감자는 이미 다 파가고 없었다. ‘토벌대’는 어느새 뒤에까지 따라와서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부대는 골짜기를 버리고 벌판 쪽으로 내려간 후 날이 저문 틈을 타서 강행군으로 멀리 빠져나갔다.

강행군 도중 삼림부대병영을 만나 돌격해들어가보니 놈들은 이미 다 도망쳐버리고 금방까지 음식을 먹던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대원들은 식탁우에 푸짐히 차려져있는 음식을 배낭에 챙겨넣은 후 뒤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리고 부후물등판으로 피해버렸으나 또다시 추격을 받고 말았다. 적들은 건빵 한개 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달라붙었다.

대낮에 버젓이 들판 지나

지휘 김일성은 부대로 하여금 추격해오는 적을 뒤꼬리에 단 채로 한바퀴 돌자면 하루 걸음이 잘되는 부후물등판두리를 빙빙 돌게 하였다. 한 두어바퀴 돌았을 때 새로운 ‘토벌대’가 나타나 아군과 뒤따르던 본래의 짝패들 짬에 끼여들었다. 서로 련계가 없는 두 무리의 적이 겹쳐서 추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를 타 부대원들은 흰 천으로 몸을 감싸면서 감쪽같이 옆으로 빠진 후 숲속에 숨어버렸다.

맨 뒤에서 추격해오던 적들은 앞의 대오가 항일련군인줄 알고 사격을 가했다. 이에 적들은 저들 끼리 숱한 주검을 내면서 생사결단하고 맞붙고 말았다.

이번엔 적들이 심산에만 주의를 돌리는 틈을 타서 아군은 적들의 눈길이 덜 쏠리는 야산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행군이 간고할수록 도주자가 생겨나는 것이 막심한 문제였다. 도주자들은 인차 적에게 투항한 후 항일련군의 종적을 일러바쳐 다시 추격, 혹은 포위 속에 빠져들게 했다.

심산을 버리고 가재수를 지나게 되였는데 그 곳은 허허벌판이였다. 그러나 적들은 포대에서 아군을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건드리지 못했다. 주력이 산에 가 있다 보니 부락에는 력량이 얼마 없는 데다가 아군의 기세가 하도 당당해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아군은 대낮에 벌판을 버젓이 지나 수림지대로 들어가 밥도 해먹고 휴식도 할 수 있었다.

수림지대를 벗어나 다시 행군하고 있을 때 적들이 뒤에서 추격해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후 앞에도 적이 있다고 척후병들이 알려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일본군이고 앞에서 마주오는 것은 만주국부대였다. 아군은 적은 병력으로 뒤를 견제하게 한 후 아무 멋도 모르고 마주오고 있는 위만군부대를 무찌르면서 포위를 돌파하려고 작전을 짠 후 전투에 달라붙었다. 경위련장 오백룡이 맨 앞장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마주오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만주국부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자 굉장한 부대와 맞붙은 줄 알고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꼬리 빳빳이 퇴각했다. 아군은 적들이 던진 배낭들에서 먹을 것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신고 대통로 있는 데까지 맹추격했다.

드디여 분산행군하던 각 부대가 3개월 남짓이 되는 간고한 행군을 거쳐 북대정자에서 회사하게 되였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제마당으로 되였다. 100여일 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 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뒹굴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1939년 4월, 김일성의 주최하에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반년래의 유격활동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금후의 활동방향을 연구, 필요 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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