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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 23] 기자생활 30년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23 15:03:45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3] (김영금 편-3)

취재임무 앞에서는 개인의 사정이 따로 있을 수 없었고 무조건 복종하였으며 기자가 가는 길은 평탄한 길만이 아니여서 수시로 그 어떤 사태에도 대비할 만단의 준비를 해야 하였어요.

그리고 그 길에서는 죽음의 고비도 몇번이고 겪어야 하였지요.

김영금 작가

스승님들을 가까이에 모시고

나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훈춘고중에서 조선어문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과외로 글짓기에 달라붙었어요. 1962년부터 ‘20번’ ‘후회’ 등 산문들을 써서 연변일보에 보냈는데 보내는 족족 신문에 실리는 것이였어요.

역시 그 해 8월 ‘연변’잡지사에서 훈춘지역 항일투자사들의 사적을 정리하는 사업에 착수하면서 나는 한수동 편집선생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항일실화소설 ‘조약돌’ 을 완성하여 ‘연변’잡지 11호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정식 발을 들여 놓게 되였지요.

이에 신심을 가진 나는 오체르크 ‘너터재어귀의 녀장군’(1964년), 소설 ‘녀교사 수기(1965년)’ 등을 집필하여 ‘연변’잡지에 발표하였지요. 이런 작품들은 당시 독자들의 대환영을 받았어요.

1964년에 나는 연변일보에 전근하게 되였어요.‘우리 집 그분’이 1957년 동북지질학원 졸업생인데 나라의 자원개발수요에 의해 남경에 가 6년간 수리전문가로 종사하다가 내가 절대 우리 글 쓰기를 변경하지 않겠다고 나오니 그분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자치주에 신청을 하였어요.

그 때는 연변에도 고급인재가 귀한 때라 주덕해 주장께서 어서 오라고 환영하여 그분은 1963년에 이미 연길에 와 있었지요. 이렇게 연길에서 한가정을 이루고 나는 열심히 기자사업에 착수하였어요.

번역부서를 거쳐 문예부에 오니 산문과 아동문학을 주관하는 최형동선생님, 조선족 제1대 녀류작가이며 기자인 최현숙 선생님, 조성일선생님, 김경석선생님, 민학송선생님 등 문장에 뛰여난 스승과 선배님들이 계셨어요.

연변일보 정교조 편집부 시절

문예부에 가서 나는 초중시절에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 하면서 ‘대민’이란 필명을 가진 선생님부터 찾았어요. 50년대 초 춘화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제비’라는 시를 썼어요. 그때 조선어문교원이 내가 쓴 시를 몰래 연변일보에 보냈더랬어요.

그런데 편집선생님으로부터 회답편지가 왔어요. “시 ’제비’는 아직 신문에 실리기는 미흡한 점이 많으나 재능이 보이는 글입니다. 신심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다면 꼭 좋은 성과를 거둘 것입니다-대민으로부터.” 나는 그 회답편지를 어느 때까지도 정히 보관하면서 나도 노력하면 희망이 있음을 크게 믿어왔지요.

그 이야기에 모두들 시물시물 웃기만 하더니 ‘대민’이란 바로 나의 곁자리에 계시는 최형동선생님이라고 하였어요. 세상에 어쩌면 이런 우연도 있단 말입니까. 나의 마음속의 그 신비한 존재 ‘대민’ 선생님을 이렇게 한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로부터 나는 여느 독자나 과외작가가 보내온 편지든지 무조건 일일이 회답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 방문하기도 하였지요. 이것은 독자와 과외작가들과의 거리를 줄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였지요. 나는 평어를 쓰기에 왼심을 쓰면서 누구에게나 신심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그리하여 연변일보에서 회답편지를 가장 많이 쓰는 편집일군이 되였지요.

선배님들은 나를 이끌고 출장다니면서 기사 쓰는 원칙과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더러 기자생활의 이모저모도 일깨워주었지요. 한번은 최형동선생님과 함께 화룡 상화로 ‘무쇠처녀’를 취재하러 가게 되였는데 장마에 길이 끊겨 50리 길을 걸어 떠났어요.

70년대 방공굴 로동으로 3.8절 뜻 깊이

날은 어둡고 배는 고프고 워낙 관절염이 있는 나는 너무도 다리가 아파서 좀 쉬여가자고 애원하다 싶이 하였어요. 최형동 선생님은 “앉으면 죽고 걸으면 사오.”라고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호주머니에서 만두를 하나 꺼내주는 것이였어요.

“이걸 먹으면서 천천히 가기오. 기자는 호주머니에 목책과 연필 그리고 먹을 것을 꼭 넣고 다녀야 하오.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걸 받아먹으니 좀 힘이 났어요. 

당시 연변일보의 취재 규정에는 5일 동안 취재하면 3일은  취재 대상과 같이 로동하고 2일 사이에 써서 본 생산대나 당지 책임자의 도장까지 박아가지고 와야 하였어요. 그렇게 써낸 기사를 또 선배님들에게 보여드렸죠. 선배님들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까근히 읽어보시고는 의견을 제기해주었지요. 나는 또 그 의견에 따라 다시 수개하고 또 수개하면서 기사를 완성하군 하였어요.

녀류작가이며 기자였던 최현숙선생님은 정치운동이 있을 때마다 투쟁대상이 되였어요. 그러다 보니 많은 작품을 쓰지 못하였지요. 그는 늘 조선족문단에 녀류작가들의 작품집이 없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와하셨어요.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마음에 걸리 군 하였지요.

문화혁명후의 첫 ‘연구생’을 쓰다

문화혁명시기 연변일보의 문예부는 ‘잡귀신의 굴’로 몰려 취소되고 나는 문교부의 기자로 뛰게 되였어요.

그때는 6.1절과 9.3명절을 해마다 쇠군 하였어요. 우리 집 그분은 휴식일도 없이 연변의 저수지건설현장에 나가 있었지요. 나도 늘 취재하러 다녀야 되는데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었어요. 하여 때로는 둘씩 데리고 취재현장으로 갔지요. 씨름터에서 그네터로 이리 저리 뛰여 다니며 여러 경기를 취재하고 그날 취재는 꼭 오후 3시전으로 원고를 교부해야 하니 여념 없이 돌아쳤지요. 일을 마무리고 보면 아이들이 잃어져서 찾고 다니며 난리를 벌이기도 하였어요.

힘들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

한번은 수두를 앓는 아이를 데리고 ‘6.16’ 취재(현급 병원 의사가 농촌에 만연된 ‘쥐병’ 치료에서 많은 촌민을 구원하고 나중에 자신이 전염되여 희생된 전형사적)를 투도에 갔는데 조선족할아버지 할머니가 꾸리는 려관에 아이를 맡겨두었지요. 기자들이 여러 명 함께 가 보름동안 취재를 하고 원고를 빨리 쓰는 나한테 마지막 종합집필이 차려졌어요. 기사 집필까지 끝내고 나니 이이의 수두도 끝나더군요.

경황이 없이 돌아치던 1978년경, 문화혁명 후 첫 전국과학기술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는 기사가 인민일보에 실렸어요. 그 기사를 접하는 순간, 우리 민족은 춤노래로 전국에 이름나고 축구로 전국에 이름났는데 앞날의 과학발전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고 계속 이름을 날리자면 과학자들이 많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갈아들었지요.

지금부터는 지식분자가 개조대상이 될 수 없으니 지식분자를 많이 쓰자고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쓴 첫 기사가 1979년 10월 4일 연변일보에 실린 . ‘연구생’이였어요. 농촌의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아버지도 없는 빈곤한 생활환경 속에서 피를 팔아 책을 사면서 자습으로 초중, 고중 학과목을 뗐어요. 그리고 몰래 대학교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대학교 학과목까지 떼고 1979년 연구생제도가 회복되자 그는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의 첫 연구생이 된 것이였어요.

꼬박 40여일간 주인공이 생활했던 흑룡강성 발해진 강서마을을 찾아가 그가 련애를 했던 련인까지 만나보면서 그의 성장과정을 낱낱이 조사를 했지요. 기차시간이 박두해오니 급히 산길을 질러오다가 그만 산비탈에 굴러떨어져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게 되였지요.

그 때는 대학시험에 령점을 맞은 장철생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지식이 없을수록 영광으로 생각하는 지식무용론의 여독이 채 가셔지지 않은 때였지요. 그러다 보니 그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시비가 아주 치렬하였어요.

총편들은 아주 좋은 글이라며 근심말라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당에 먹칠했다는지 사회주의를 공격했다는지 하는 평보가 란무했지요. 이때 한문 연변일보 평보란에는 ‘好得很!’(아주 훌륭하다!)고 쓴 커다란 한문붓글이 보기 좋게 나붙었어요.

그걸 마주하고 큰 고무를 받았지요. 그러찮아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 변론을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하였지요. 절대적으로 사실에 근거하여 폭넓고 치밀한 취재를 하면서 만나서 인터뷰를 한 인물만도 50명이 넘었어요. 그리고 집필에서도 그 어떤 추측이나 허구가 없이 핍진하게 주인공의 형상을 부각하였던 것이였어요.

나는 어디까지나 사실과 진실만으로 말하려는 창작경향을 고집해왔어요. ‘연구생’사건을 시작으로 계속 지식인을 쓰려는 마음은 별할 줄 몰랐어요. 문화혁명기간에 나도 다른 문예일군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창작도 못하고 있다가 인민교원을 노래한 소설 <어머니>를 창작하기 시작하였어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산골학교에서 반백이 넘도록 자식 하나 없이 수천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사랑으로 품어 인재로 키워낸 인민교원의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많은 독자들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어요.

아이들과 함께 한 ‘미더운 누나의 우편함’

연변일보에서 17년간의 기자생활을 마치고 1980년부터는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기자부 주임, 문예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어요.

1980년대는 중국조선족이 가장 흥성할 때였어요. 소학생만도 10만명이 넘었지요. 어느 촌에나 소학교가 있고 애들이 많아 가는 곳마다 흥성흥성했지요. 초창기 8명 운영진으로는 일손이 딸렸지요. 그리하여 대학생들을 받아 편집기자대오를 늘이고 그들을 이끌고 함께 학교 방문길에 올랐어요.

길림지역에 가서도 길림역 다음 쌍하, 반석, 무순 기차역마다 내려 소학교로 찾아갔는데 큰 도시는 조선족소학교가 3개소가 있는 곳도 많았어요. 어느 한번은 6.1아동절을 심양에 가 쇠게 되였어요. 북릉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3,000여명이나 모여왔어요. 아주 조선족들의 대축제라도 열리는 것 같았어요.

소년보 편집 기자 시절

소년보 사업일군들은 앞뒤로 분망히 보내면서 아이들의 충실한 벗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미더운 누나의 우편함’이라는 전문란을 꾸리면서 학생들 마음속의 고민을 마음대로 써 보내라고 했지요. 과연 전국 각지로부터 매일 수 많은 편지가 날아들어왔지요.

나는 일일이 회답편지를 써서 학생들에게 빠짐없이 보내주었고 류사한 문제는 종합하여 신문에 실으면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방법을 강구하면서 실제문제를 해결하였지요. 그리고 ‘편집아저씨’라는 전문란을 꾸려 주로 학습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종합판면으로 해답 해 주면서 아이들과 가까워 졌고 무랍 없는 사이가 되였지요.

한번은 한 학생이 ‘선생님, 나를 찾아오지 마세요.’라는 글을 보내왔어요. “계모와 함께 사는데 계모는 나를 괴롭힙니다. 어떤 때는 정말 죽고 싶어요.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나는 그 학생에게 4번 편지를 보내면서 원인을 찾고 방도를 대주면서 한걸음 한걸음 난제를 풀어갔지요.

80년대 즐거운 3.8절 모임

그러는 와중에 술 마시는 아버지 때문에, 마장판에 붙어있는 아버지때문에 학습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사연의 편지들도 받았어요. 그리하여 ‘아버지초대회’를 열고 부모들과 공식대화를 하는 기회를 만들도록 제의하였지요. 과연 뜻밖의 효과를 보았다는 ‘보고’가 왔던 것어였어요.

그로부터 부모나 교원이 아이들과 학생을 교육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얼마든지 계발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다는 관점을 새롭게 가지게 되였지요. 그 뒤로 나는 그런 관념으로 관통된 글들을 많이 집필하게 되였지요.

여러 학교의 글짓기는 또 거의 천편일률로 비슷한 경향이 있었지요. 그리하여 교원들과 학생들도 또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어요. 수천명에 달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글 짓기를 할 것인가 하는 강의를 하면서 주로 남다른 세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을 키우면서 개성있는 글을 쓰도록 지도하고 인도를 하였지요.

그 때는 아주 아이들 속에 빠져 힘드는 줄도 몰랐어요. 그리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피해 지역 학교들에 료녕성과 흑룡강성에서 아이들이 보내온 학용품 등 지원물품을 전해주고 돌아오가다 급성맹장염에 걸려 급히 병원에 호송되였지요. 좀만 지체를 했더면 큰일 날 번 했다고 당장에서 수술을 받게 되였어요.

허나 이튿날 톱기사로 실어야 할 원고 때문에 배를 그러안은 채로 호사용지를 빌어 기사를 작성하다 보니 수술시간을 지체하여 의사들한테 된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지요.

소년신문선진사업일군으로 표창 받아

후에는 또 담낭염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도문소학교의 한 소선대소대에서 추운 겨울날 페품줏기를 하여 돈 10원을 부쳐 보내왔어요. “선생님은 우리에게 강의할 때 무슨 일이든 신심을 가지고 견지하면 꼭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돈으로 봉왕장을 사서 잡숫고 힘을 내세요.”

나는 아이들의 그 순수한 마음을 받아읽으면서 그만 감격에 목이 메여 눈물을 짓고 말았어요. 1987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부터 ‘소년신문선진사업일군’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을 때도 그 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수많은 아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나는 아이들을 위해 아동문학을 해야 겠다는 사명감을 짊어지게 되였지요. 그리하여 동화집 <<새파란 마음>>, <<조선족전통미덕 이야기대전서>>(근공검학편, 수필집 <<푸른 바다 빨간 노을>>, <<돌아보는 옛날>>, <<아이들과 함게 흘러간 그 때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부모>> 등 7권의 작품집을 묶어내게 되였어요.

소년보 시절의 김영금 작가(뒤줄 왼쪽 두번째)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부모>>라는 아동문학집은 또 한국에서 출판되였어요. 한국 공주대학의 교육학 박사 이명희교수는 이 책의 매편마다 해석과 함께 평어를 달면서 “한국 어린이들의 성장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한국의 학부모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어요.

아동문학에 손을 댄 지 13년 밖에 안되지만 조선족아동문학사에서 한페이지를 차지할 수 있어 참으로 큰 보람을 느꼈어요.

글 구성/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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