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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4)― 대사하전투와 한총령전투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23 16:52:23 ] 클릭: [ ]

‘위성타원’ 전술로 적을 꾀여들인 후

악질적인 미야모또 ‘토벌대’를 섬멸

제3방면군의 설립

1939년 3월 11일, 류하 부근의 밀영에서 한달 나마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을 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와 소년철혈퇀, 2방면군 일부 및 제2군 제4사는 총사령원 양정우와 중공동남만특위 서기이며 부총사령원 위증민의 인솔하에 화전현 북쪽에 있는 목기하림장을 들이친 후 돈화, 화전, 안도, 무송 등 4개 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중요한 교통요충지 따푸차이허로 진군해갔다.

 
따푸차이허전적지기념비

일제는 항일련군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야전군 무기창고를 세우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이 무기창고를 위만군 1개 영과 위만경찰 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부락 주위에는 토성을 쌓고 그 밖에다 또 높은 나무울바자를 세웠다.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부락 사람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따푸차이허에 항일련군과 련계를 맺고 있는 장영춘이라고 하는 무장자위단원이 있었다. 아군은 장영춘을 통해 따푸차이허에 주둔하고 있는 주력부대가 외지로 ‘토벌’을 나가고 성 안에는 지금 적들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에 양정우와 위증민은 따푸차이허를 들이칠 것을 결정했다.

4월 7일 저녁 7시 30분, 제2군 4사는 산발을 타고 내려와 은밀히 서대문 쪽에 접근하여 은페했다. 부대가 매복한 지 얼마 안되여 서대문 밖에 있던 위만군 몇이 말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성문 밖에서 대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대문을 열려던 적 보초가 어망결에 항일련군이 성문 밖에 매복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산군이 왔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아군은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아군의 총탄이 서대문을 향해 비발치듯 날아갔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내지 못한 적들은 서대문을 버리고 시가로 물러났다. 서대문으로 돌입해 들어간 아군은 서쪽구역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 때 경위려와 소년철혈퇀도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들부시고 시가로 맹돌입해 들어갔다. 지방경찰대실, 경찰서, 일본군 병영은 삽시에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전투에서 아군은 위만경찰부대 200여명과 일본경위 후지다 이찌후도와 만석척식출장소 주임 가이데 이이찌 등 일본인 2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어 진한장이 인솔하는 2군 5사와 5군2사 5퇀은 련합하여 연길현을 거쳐 돈화 삼도구로 진군하다가 석두하자 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맞다들어 격전을 벌려 일만군 32명을 격살하였다. 4월말, 부대는 안도현 청구자 ‘집단부락’을 들이쳐 적 6명을 격살하고 보총 30여자루와 탄알 1,500여발을 로획했다. 6월 5일에는 항일련군 2군 4사1퇀이 안도현 성북, 한총구를 습격하여 일본교도관을 비롯한 위만군 2개 련100여명을 전부 포로하고 경기관총, 보총, 권총 등을 로획했다. 그 날 2군5사는 오상현 랍림하삼림경찰대를 야습하여100여명 로동자를 해방시키고 량식 등을 로획했다.

제1로군 총사령부를 찾고 있던 2방면군 한 부대는 안도현 미혼진에서 5사 진한장부대와 만난 후 한양구에 있는 위증민의 주둔지로 왔다. 이렇게 모인 부대가 바로 천보산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7월말, 제2군 4사와 5사는 안도현 한양구에서 위증민의 사회하에 부대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제13퇀, 제14퇀, 제15퇀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이였다.

제3방면군이 설립된 후 위증민과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안도, 돈화 지구에서 련속하여 일만군을 격파했다. 그중에서도 제3방면군, 제2방면군 9퇀, 제5군 도정비부대 등 500여명 병력이 련합하여 대사하를 중심으로 하여 벌린 전투는 동만의 유격전쟁에서 전례없는 대작전이였으며 제3방면군의 전투기세를 떨친 싸움이였다.

대사하에서의 격전

대사하는 한요구 동북쪽 안도현 소재지의 서북쪽에 위치해있는 규모가 큰 집단부락이였다. 부락은 토성으로 둘러쌓여있고 부락 안에 있는 경찰서 울안에는 높은 포대가 있었는데 적들은 거기에다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부락에는 경찰 30여명과 무장자위단 수십명 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안도(송강)와 명월구의 적들이 인차 도착할 수 있어 서뿔리 공격하기엔 쉽잖은 곳이였다. 이에 아군은 ‘위성타원(围城打援)전술’, 다시 말하면 성을 포위하고 그 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즉 안도와 명월구의 적을 대사하에 끌어들여 소멸한다는 것이였다.

8월 23일, 위증민은 13퇀, 15퇀과 2방면군 9퇀의 일부 부대 300여명 병력을 인솔하여 사가점 큰길 옆 서쪽 도랑 홈에 약 2.5키로메터의 폭을 두고 매복해있다가 명월구 방면으로 오는 적의 증원병을 치기로 하고 진한장이 인솔하는 14퇀과 경위련 200여명은 대사하 집단부락을 친 다음 대사하 남쪽에 매복하여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오는 증원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대사하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부대는 대사하부락 토성 밖에 매복해있었다. 아군의 계획에 의하면 0시에 보초가 교대하는 틈을 타 성안에 있는 지하일군 리홍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공격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고 있는 데도 리홍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리홍산은 뜻밖에도 전날 밤에 양초구에 일이 있어 불리워갔던 것이다.

아군은 하는 수 없이 날이 밝아 사람들이 물 길러 나오는 기회에 공격하기로 했다. 성안에 우물이 없기에 날이 밝으면 적들은 보초를 철수하고 물 길러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드디어 날이 환히 밝았다. 아군은 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물 길러 나오기를 도정신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뜻밖의 일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그번 전투에 직접 참가한 적 있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 속에서》에서 그 때의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난데없는 일본경찰 한놈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가 채소밭에 매복해있는 것을 보고 픽 돌아서더니 부락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섯!”

토성에 붙어섰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그 때 나도 토성에 붙어서있었다. 뛰던 놈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또 경찰서 쪽으로 곧추 달려가며 “공산당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성문 북쪽에 숨었던 전사가 그 놈을 당장에서 쏴죽였다. 이 바람에 마을 안에선 호각소리가 “호르륵, 호르륵”하며 련이어 나더니 집안에 있던 놈들이 북적대며 포대 안에 들어가 총질하였다. 진한장은 전투명령을 내리고 각 련의 주공방향을 제시하였다. 토성 밖에 매복해있던 전사들은 마을 안으로 물 밀듯 들어가는데 경찰서 뜨락의 포대에서 기관총이 미친듯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탄알은 눈앞에 와 우박처럼 떨어졌다. 우리는 담벽에 다가붙어 경찰서 쪽으로 돌진해들어가다가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사격선을 피하여 부근의 민가에 흩어져 들어갔다. 이곳 집들은 기차굴처럼 길게 지은 줄집인데 아래웃집 사이에는 간벽이 있었다. 적들은 계속 총질하였다. 우리는 민가의 벽을 뚫고 나가 포대에 대고 사격하였다. 그런데 탄알은 포대 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적아의 교전은 치렬하였다. 적진을 노리고 있던 김수학 패장이 한손에 수류탄을 쥐고 배밀이 해나갔다. 한 전사가 또 김패장의 뒤를 어어갔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포대 높이는 5메터가량 되였다. 두 용사는 포대 벽에 가 붙어서 수류탄을 올리뿌렸다. 헌데 수류탄은 화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총질했다. 두 용사는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쥐여 다시 올리뿌리려다가 그만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의 기관총수가 요란한 폭파소리에 놀라 대가리를 움츠리고 앉았다가 다시 쳐드는 순간이였다. 1선에 매복해있던 동무들이 포대 화구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누구의 탄알이 명중했는지 적의 기관총수가 맞아서 화력이 멎었다. 이 순간 우리는 경찰서의 토담을 넘어들어가 포대 안에 수류탄을 밀어넣고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이어 대부대가 들어와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사하를 점령하였다…

전반전투는 원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은 부지휘 후국충에게 14퇀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송강 방면으로 달려가 적의 증원부대를 저격할 것을 명령했다. 저격부대는 전속력으로 소사하 남쪽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군이 소사하 고개길에 거의 닿고 있을 때 대사하로부터 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본군은 9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아군이 매복하려던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적탄이 비발치듯 날아왔으나 전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언덕진 고개 우로 돌진해나가다가 후국충 부지휘와14퇀 허자장, 정위 양형우(조선족)가 희생되였다. 지휘관을 잃은 전사들은 눈에 달이 올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일격에 돌진해들어갔다. 아군은 드디여 소사하 언덕을 점령하였으며 왜놈 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대사하를 치면 명월구에서 금방 오리라고 예견했던 적 증원부대가 이날 낮에 오지 않아 류수촌 남구에 매복한 부대들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해가 진 다음 각 부대들은 류수촌 집단부락을 중심으로 린근의 집단부락들을 분공하여 진공한 후 하루밤을 류숙하기로 하였다. 안길, 전동규부대들이 류수촌 부락을 들이칠 때 적들의 저항은 드셌다. 50여명 경찰과 자위단은 맞불질하면서 완강히 버티였으나 불과 5분도 채 안되여 아군은 적들을 무찌르고 부락을 점령했다.

최현부대는 동량툰을 점령했다. 최현 퇀장은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기로 했다. 하여 안도현 소재지,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전화를 쳐 “우리 항일련군은 이미 대사하와 대장강, 동양툰을 점령하였다. 용기가 있으면 싸우러 오라!”고 위협조로 통고했다.

자정이 되자 과연 증원병을 태운 적 트럭 6대가 동양툰에 들어섰다. 보초선에 있던 전사들이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했다. 녀기관총사수 허성숙은 한 대원에게 빨리 지휘부에 가 알리라고 말하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둘렀다. 이 전투에서 부대의 녀장군으로 불리우면서 사랑받던 허성숙은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 증원부대는 아군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는지라 부랴부랴 송강 쪽으로 내뺐다. 이튿날 아군은 또다시 전날에 포치하였던 매복지점에 와 매복하였다. 송강에서 명월구로 가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기에 되돌아가는 적들은 반드시 이 길로 지날 것이였다.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본군과 조선인 ‘특설부대’, 그리고 일본군 가족 수명을 태운 대형 군용트럭 7대가 안도현성 쪽으로부터 아군의 포치선으로 질주해왔다. 그중 한대의 트럭에 앉은 적들은 대사하전투에서 요행 살아남은 적들이였다. 트럭은 아군 매복선 남쪽 하단을 거쳐 2.5키로메터 쯤 질주하여오다가 선두의 트럭이 정지하자 그 뒤로부터 따라오던 트럭이 전부 한곳에 집결되였다.

아군의 기관총, 보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어떤 놈은 자동차 우에서 죽고 어떤 놈은 뛰여내리다 맞아죽었다. 불과 몇십분 사이에 적 주력은 소멸되였으며 살아남은 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남은 적도 도로 서쪽 홈에 매복한 아군의 집중사격에 의하여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였다. 뒤이어 아군의 돌격신호가 울리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여구나 되였다. 미야모또는 운전실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숨졌다.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제3방면군은 적 250여명을 살상, 포로하고 7정의 경기관총과 700여자루의 보총, 권총 및 여러 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한총령매복전

대사하전투 후 제3방면군은 부대의 식량과 기타 군수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총령에서 적들을 매복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보화기를 통하여 9월 25일에 일본군 마쯔시마부대가 돈화로부터 대포시하로 ‘추기토벌’을 나온다는 정보를 도청한 후 제3방면군의 주력부대와 제5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인 도정비부대 도합 500여명은 9월 24일(음력 8월 12일) 한총령 남쪽 비탈의 고해루에서 매복전을 펼치기로 작전,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참모장 박득범의 령솔하에 목적지를 향해 강행군했다.

이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는데 간혹 안개까지 끼여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적들은 도로 량켠 200메터안의 초목들을 몽땅 베여버리고 번번한 개활지대를 만들어버렸는데 그 거리가 약 50키로메터나 되였다. 뿐만 아니라 한총령과 그 길가의 고지마다에는 높은 포대까지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밤낮으로 아군의 행동을 경계하고 있었다. 부대는 가을비와 안개를 리용하여 한총령의 요차즈에서 북으로 7.5키로메터 떨어진 한총령 남쪽 기슭의 좁고도 긴 산골짜기인 고해루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꽉 우거져 매복전을 펼치기에 제격인 곳이였다. 돈화에서 따푸차이허로 통하는 도로는 바로 이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진한장은 한개 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작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25일 점심때 쯤 드디여 놈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군 소장 마쯔시마가 령솔하는 ‘토벌대’였다. 놈들은 12대의 트럭에 앉아오고 있었다. 그 속에는 50여명 위만경찰들을 실은 2대의 트럭도 있었다. 놈들의 자동차가 아군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섰다.

“땅!”

사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 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전사들은 놈들을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전사들이 던진 수류탄은 포물선을 그으면서 날아가 놈들의 머리 우에서 련속 터졌다. 적 자동차들은 하나하나 불길 속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러나 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력량을 조직하여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화력을 몇대의 자동차에만 집중한 후 마쯔시마 소장을 쏴죽였다. 마쯔시마 소장은 아직 자동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총알받이로 되고 말았다. 놈들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놈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놈들의 트럭도 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내뺐다.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아군은 혼란에 빠진 적진으로 맹호마냥 돌진해들어갔다. 맹렬한 격전을 통해 아군은 적의 주력을 기본상 소멸해버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꼬리 빳빳이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마쯔시마 소장을 비롯한 일본군 100여명을 격사하고 자동차 1대를 불살라버렸으며 기관총 4점, 보총 100여자루, 탄알 70여상자를 로획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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