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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5)―홍기하에서의 대승리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30 16:06:29 ] 클릭: [ ]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일제 ‘포위토벌’로 근거지 상실

제2방면군 홍기하에서 지혜롭게 마에다부대를 전멸

두도류하회의

1939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동북에 대량의 부대를 증파하여 잔폭한 ‘포위토벌’을 감행했다. 련속적이고 전면적인 진공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엄중한 손실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악착한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항일련군과 군중들간의 련계가 단절되여 항일련군은 엄중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였다. 동남만의 항일투쟁 형세는 날따라 악화되기 시작했다.

 
홍기하전투유적지

1939년 9월, 항일련군 제1로군 총부는 료령근거지를 포기하고 북으로 전이, 심산밀림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로써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였다. 유격근거지의 상실과 더불어 유격구역도 점차 축소되면서 항일련군 각 부대는 부득불 장백산지구의 높은 밀림지대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환경 속에서 전투를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긴급한 정세에서 양정우는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항일련군밀영에서 1939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제1로군 주요 령도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양정우, 위증민, 전광, 방진성, 서철, 한인화, 황해봉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토벌’투쟁을 벌릴 것인가 하는 책략문제를 놓고 세심히 토의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준엄한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실력을 보존하고 섬멸적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각 부대들을 소부대로 분산시켜 활동할 방침을 제정했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각 부대의 반‘토벌’ 활동구역과 전투임무를 획분했는데 제1방면군은 조아범의 지휘하에 몽강, 휘남, 금천, 림강 등 현의 린접지대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며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무송, 화전,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며 제3방면군은 두갈래로 나누는데 한갈래는 위증민의 지휘하에 돈화, 화전, 길림 지구에서 활동하고 다른 한갈래는 진한장의 지휘하에 녕안, 동녕, 교하, 오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면서 북만의 형제부대와 련계를 맺기로 했다. 양정우는 총사령부의 경위려와 1방면군 일부 부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각 부대와 배합작전을 하기로 했다.

제1차 두도류하회의 후 각 부대는 기동령활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일제의 거점과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식량 등 긴요한 필수품을 해결했다. 근거지를 상실한 불리한 환경 속에서 항일련군은 신출귀몰하면서 적을 주동적으로 타격, 자신의 력량을 지켜나갔다. 적들이 기재한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1939년 하반년에 항일련군 제1로군은 적들과 276차의 싸움을 벌렸는데 아군이 주동적으로 적을 습격한 차수가 177차였다.

양정우가 직접 지휘하는 사령부부대 400여명 전사들이 적들과 여러차례 접전하면서 제1차 두도류하회의 정신을 각 부대에 전달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원 양정우가 불행하게 전사한 것이다. 1940년 2월 23일, 35세의 나젊은 항일명장 양정우는 수백명이나 되는 적들과 혼자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양정우의 희생은 1로군의 투쟁형세에 급작스러운 역전을 불러왔다. 적들은 ‘만주치안의 암’을 근치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더욱 발광적인 ‘토벌’을 벌렸던 것이다. 이에 1로군의 중임을 한 어깨에 떠메게 된 위증민은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다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주요 령도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위증민, 전광, 서철, 한인화, 박덕범, 리명산, 진수명(사령부 비서), 김광학(제1방면군 정치부 주임), 김백산(경위려 제3퇀 퇀장), 황해봉(경위려 제1퇀 정위), 김재범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지방 당조직이 엄중히 파괴되고 지방 군중사업이 박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대내의 우수한 간부를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각 계층 가운데서 군중을 발동하고 반일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련락원을 쏘련에 파견하여 중앙(국제당주재 중공대표)과 련계를 맺기로 하였다.

전광이 지방 당사업을 전면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김재범 등 5명으로 구성된 연변지방사업위원회를 구성, 동남지구에 내려가 지방사업을 개척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장백산지구에서 장기적인 ‘토벌’을 받아 엄중한 손실을 본 정황에서 제1로군 주력부대를 장도선철도 이북에로 진군시켜 목릉, 오상, 녕안, 왕청 등지에서 소부대의 분산 유격활동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외에 1로군 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했다. 중공동남만성위 서기 위증민이 1로군의 총지휘를 맡았다. 전광이 동남만성위원회 겸 제1로군 지방사업부장과 군수처장을, 한인회가 성위 위원 겸 제1로군 군부 참모 겸 경위려 정위를, 서철이 성위 위원 겸 군의처 처장을, 김재범이 성위 후보위원으로 각각 임명되였다.

당시의 형세가 얼마나 참혹하고 위급했는가 하는 것은 위증민이 각기 1940년 4월과 7월에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에 보낸 보고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월의 보고서에서 위증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대해 속에서 키잡이를 잃은 작은 배 같으며 두 눈을 잃은 어린 아이 같다.” 7월 1일 보고에서는 “올해 아군의 식량 및 용품은 아주 결핍하다. 촌락과 작은 도시를 습격해서만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모험을 무릅쓰고 촌락을 치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습격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부상과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제2차 두도류하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1로군은 위증민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즉각 분산활동에 들어갔다. 한인회는 경위려를 이끌고 통화, 동만, 길림, 녕안 방면으로 나갔고 전광은 부대를 이끌고 남만으로 이동했다.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림강, 안도, 화룡, 연길, 돈화 등지를 누볐다. 제3방면군은 진한장의 지휘하에 교하, 서란, 오상, 녕안 일대에서 움직였다.

‘토벌대’를 유인

올기강전투 후 제2방면군은 1939년 11월, 돈화 방면으로 원정하여 12월 17일에 마호 부근의 륙과송을 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삼림경찰대를 소멸하고 부대를 확충하였다. 륙과송전투에서 7퇀 퇀장 오중흡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 24일에는 기신자에 가서 그 곳 삼림대를 들이쳐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940년초, 제2방면군은 재차 안도현과 화룡현 접경지대로 진출하였는데 적들은 제2방면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화룡현경찰‘토벌’대대 및 마에다중대를 출동하여 추격하게 했다. 3월 11일, 2방면군은 안도현 대마록구 삼림경찰대를 돌연습격하여 적 10여명을 살사하고 현금 만여원과 많은 총과 탄약, 식량을 로획하였다. 아군은 140여명 목재소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로획물을 메워가지고 감쪽같이 자리를 떠났다.

부대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일부 전사들에게 군수물자를 지고 온 로동자들을 도로 데리고 다시 대마록구쪽으로 가면서 눈 우에 발자국을 크게 내도록 하고 주력부대는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면서 반대방향으로 떠났다. 화라즈에서 2.5키로메터 가량 떨어져있는 홍기하의 서북방향 대마록구 상류인 735고지의 한 협곡에 이른 주력부대는 이번 전투의 승리를 경축하면서 충분하게 휴식하였다.

대마록구삼림경찰대가 습격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이 상투밑까지 치민 일제는 삼도구에 가미오까를 위수로 하는 전투사령소를 설치하고 마에다중대, 아까후리부대, 야마네중대 등을 동원하여 제2방면군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항일련군 발자국을 따라가던 토벌대는 발자국이 다시 대마록구 쪽으로 간 것을 보고 허둥지둥 대마록구로 가보았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없었다. 련며칠 수색했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찾지 못하게 되자 아까후리부대와 야마네중대는 돌아가고 마에다중대만이 계속 남아서 산속을 참빗질했다.

한편 2방면군은 적들을 따돌린 후 얼마동안 화라즈밀영에서 휴식하다가 3월 25일 다시 대마록구방향으로 진출하였다. 그 때 아군의 숙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적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대마록구방향으로 가자면 그 길을 건너야 했다. 아군은 발자국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길 우에 가로놓여있는 진대나무를 타고 길을 건넌 후 눈 속을 내처 걸었다. 부대가 지나간 다음 두 전사가 뒤에 떨어져서 눈 우에 난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이 때 농민차림의 두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혀갔던 당지 농민들이였다. 두 농민은 화라즈골짜기에 적 ‘토벌대’가 170여명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안군 300여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정보를 접한 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추격해오는 적들을 홍기하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월이라 하지만 장백산 고산지대는 아직까지도 적설이 허리를 치고 있었다. 이는 적아 쌍방의 행동에 다 지장을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행군속도가 아군보다 더 빨랐다. 아군이 앞에서 생눈길을 내면 적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왔기 때문이다. 하여 적아의 거리가 5~7.5키로메터 정도로 좁아졌다.

홍기하 상류의 대마록구하는 여러 갈래의 골물로 되여있었다. 그 한골에 이르니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을 푹 쉬우지 않고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지휘부에서는 목재소 로동자들이 사용하다가 버리고 간 헌집에 들어가 푹 쉬라고 지시했다. 적들의 코앞에서 시름 놓고 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전사들은 배낭을 벗자 마자 코를 곯았다.

다음날, 행군길에 나선 아군은 소마록구 쪽으로 릉선을 타고 나가다가 골짜기로 떨어졌다. 그 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 골짜기 량옆의 산들이 묘하게 생겼습니다. 상류를 향해서 오른쪽에는 3형제 같이 생긴 3개의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매복진지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골짜기 왼쪽에도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그 봉우리 기슭에 자그마한 수림이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이였습니다. 나는 지휘관모임을 열고 간단한 전투조직을 했습니다. 골짜기 오른켠에 있는 3개 봉우리에는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를 배치하고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에는 7련대와 8련대를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되 각 부대들은 일부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고지로 올라오는 발자국을 메우면서 제가끔 지정된 장소에 매복하고 유인대는 발자국을 크게 내면서 계속 골짜기의 첫 고지 북쪽을 차지하고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유인대는 골짜기 끝에까지 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 날은 날씨가 갑자기 따스해졌기 때문에 양지쪽에서는 눈이 녹아 길이 질척질척했다. 2방면군 전사들은 눈속에 몸을 숨기고 적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오도 지나고 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에야 적이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10명 가까이 되는 적 척후병이였다. 놈들은 눈 우에 난 발자국을 따라 두리번거리면서 매복권 안으로 기여들기 시작했다. 척후병들의 뒤로는 첨병들이 나타났다. 첨병들이 마지막 고지의 앞을 지나갈 때 군도를 찬 장교가 골짜기에 들어섰다. ‘토벌대장’ 마에다였다. ‘토벌대’의 앞머리가 매복권 안에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마에다는 걸음을 멈추고 눈 우에 찍힌 발자국과 골짜기의 묘한 지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나는 그가 골짜기 우에 척후대를 파견하거나 부대를 뒤로 뽑을 궁리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0여일이나 산악지대를 돌아치며 헛탕만 치는 통에 지칠 대로 지친 마에다는 랭철하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할 그 운명적인 시각에 탕개를 늦추고 방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에다가 독립수 밑에 서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부하장교들이 그 옆에 모여들었습니다. 마에다는 군도를 짚고 서서 그들에게 무슨 지시를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적의 기본대오는 전부 매복권 안에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격신호를 내렸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에서의 묘사이다.

일제 ‘귀신 곡할 작간’이라 한탄

김일성의 사격명령과 함께 산천을 들었다놓는 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아군은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기관총이 불을 토했고 수류탄이 류성마냥 적들 속으로 날아갔다. 마에다는 당장에서 총알받이가 되여 뻐드러졌다. 불의의 날벼락을 맞은 적들은 갈팡질팡 헤매기만 하다가 순식간에 절반의 병력을 잃고 말았다.

‘토벌대’ 부대장 이즈미는 급급히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북쪽 고지에 있는 아군을 향해 돌격하려 하였다. 이때 맞은켠 산밑 수림 속에 매복해있던 아군이 놈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맹렬한 교차사격은 놈들 진영을 대뜸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놈들은 숨을 곳을 찾느라고 허우적거렸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아군의 돌격나팔소리가 대마록구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아군전사들은 매복지점에서 번개마냥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면서 놈들을 향해 육박해내려갔다.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도 그만 질겁하여 두손을 쳐들고 기여나왔다. 전사들은 항복하는 놈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전투는 2방면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아군은 마에다중대장 이하 100여명을 격사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그리고 기관총 5정, 보총 87자루, 권총 12자루, 무전기 1대, 탄알 수만발을 로획했다.

이날 3키로메터 쯤 거리를 두고 마에다부대의 뒤를 따라오던 정안군 300여명은 왜놈들이 녹아나는 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도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눈먼 총질만 해대고 있었다. 아군이 로획한 5정의 기관총으로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자 놈들은 어둠을 타 내꼴 봐라 도망치고 말았다.

홍기하전투를 두고 일제의 경찰잡지는 “어떻게 된 노릇인가. 토벌에 있어서는 천군만마의 오랜 강자인 마에다대장, 이러한 술책에 빠져본 적이 없는 토벌의 왕자인 마에다대장이 뜻하지 않게도 이런 궁지에 빠져들어간 데 대하여 이러저러한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요컨대 흔히 말하는 귀신의 작간이라 할 수 밖에 다른 말을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력사학자 김철수씨는 홍기하전투유적지를 답사하던중 1982년 4월, 홍기하전투가 일어난 곳에 일제시대에 세운 돌비석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폭발해버렸다는 것을 한 림산작업 일군으로부터 알게 되였다. 하여 폭파해버렸다는 비석 파편을 찾으려고 현장에 가 풀밭을 샅샅이 뒤져 끝내 비석쪼각 3개를 발견했다. 그것을 맞추어놓으니 한쪼각이 비록 모자라기는 했지만 새겨진 글은 모두 있었다. 거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前田中队激战之地)’라고 새겨져있었다.

이전에는 홍기하전투유적지를 찾으려면 도보로 갔지만 지금은 차가 통할 수 있는 림산도로가 닦아져있다. 또 지난 한시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 비석을 세웠던 자리에 널판자로 ‘홍기하전적지’라고 쓰여진 나무패말이 스산하게 세워졌지만 지금은 ‘홍기하전투유적지’라고 번듯이 새겨진 대리석 비석이 보기 좋게 세워졌다. 비석 뒤면에는 이런 글이 조, 한 문자로 새겨져있다.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 ‘마에다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화룡현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홍기하전투에서 승전고를 올린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안도현의 처창즈, 돈화현의 소하발령과 훈춘현 경내에 진출하여 계속 적들의 ‘포위토벌’을 격파함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항일련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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