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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자동차공장 생산설비 제조에 밤 새던 나날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11 10:27:23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6)

장춘제1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 퇴직로동자 남승호의 이야기

제1자동차공장의 20여개 분공장중에서 공구분공장의 선반 등 설비는 가장 정밀하고 가격대가 비싸다. 올해 74세에 나는 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의 퇴직로동자 남승호는 정밀선반을 다루면서 일하던 때를 회억하면서 "당시 서방국가들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선진설비 수출을 엄격히 통제할 때라 이런 정밀선반들을 수입하기 매우 어려웠지요. 여러 경로를 통해야 들여올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렵게 들여온 설비들을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1970년대 초에 호북성 십언시에 우리 나라에서 자체의 힘으로 건설하는 제2자동차공장에 보낼 생산설비들을 가공하는 로동에 종사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제2자동차공장에 생산설비를 가공하던 시절을 회억하는 남승호와 부인 리영순.

1945년 8월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서 투항한지 한달후에 태여난 남승호는 고향이 룡정이다. 그는 소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해방전쟁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 퇴역한 제1자동차공장의 1대 창업자인 큰형님을 따라 장춘으로 전학왔다. 1962년 남승호는 장춘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모집에 신청하여 입대, 흑룡강성과 내몽골자치구에서 5년 남짓이 복역하다가 1968년에 퇴역하여 제1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에 입사하였다.

"공구분공장의 일을 쉽게 말하자면 자동차부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부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산공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바로 생산을 위한 생산공구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남승호는 이렇게 자신이 공장에서 해왔던 일을 소개했다.

자동차부품 생산을 위한 생산공구를 만드는 작업이기에 일단 기준에 도달 못되는 공구로 부품을 생산하게 되면 전부 불량품이 나오게 되므로 로동자들에 대한 기술요구 또한 전 공장내에서 제일 높았다. 자기절로 설계도면을 보고 선반 앞에서 작업하려면 적어도 3년이라는 견습공시간을 거치면서 스승한테서 기술을 배우고 또 부지런히 련마해야 한다.

"제가 공구분공장에 들어갈 때는 바로 ‘문화대혁명' 시기라 공장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혼잡했습니다. 그래서 기술도 제대로 배우기 어려웠지요. 원래는 3년을 배워야 하는데 1969년부터 우리 나라에서 호북성에 제2자동차공장을 건설하면서 생산공구가 엄청 수요되였지요. 그래서 2년밖에 못 배우고 선반 앞에 서게 되였습니다."

배운 경력이 2년밖에 안되는 남승호는 작업반장이 설계도면을 가져오면 막히는 것이 적잖았다. 그럴 때마다 경험이 풍부한 선배 로동자들한테 달려가 허심히 가르침을 청했으며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그냥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하면 잘 완성할 수 있을가를 골몰히 사색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그의 기술수준은 몰라보게 제고되였으며 얼마 후 부터는 스위스로부터 수입한 정밀선반 앞에서 능숙하게 기계를 다루면서 생산공구를 만들어 냈다.

"제시간에 공장에 출근하고 조퇴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반에서 내려오는 제품이 합격품으로 되기까지는 고도의 책임감이 있어야 하지요. 그렇잖으면 불합격품이 나와 전반 자동차부품생산에 영향을 미치기 십상입니다. 수출하는 생산공구를 만들 때에는 나라의 영예와 관계되는 일이기에 더욱 높은 책임감이 수요되지요." 남승호는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말을 거듭 반복하면서 밤낮을 이어가며 로동생산 일선에서 분투하던 때를 감명 깊게 회억했다.

1969년 우리 나라에서 호북성 십언시에 제2자동차공장을 세울 때 장춘에 있는 ‘큰형님' 제1자동차공장에서는 행정에 있는 지도일군으로부터 설계와 연구부문의 기술자 그리고 생산일선의 숙련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군들이 지원을 떠났다. 그리고 생산라인에 필요한 거의 모든 생산공구는 제1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에서 만들어 보냈다.

"1970년부터 우리 공구분공장의 일이 갑자기 많아 졌습니다. 제시간에 요구하는 공구들을 생산해내기 위하여 로동자들은 초과근무를 해가면서 임무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남승호는 다른 로동자들과 함께 퇴근 후에도 제2자동차공장에 보낼 생산공구를 만들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밤 열시, 열한시까지 선반 앞에서 일하다가 배가 꼬르륵해나면 공장에서는 옥수수가루로 만든 구운 떡 두개에 배추국을 야식으로 줬다. 새벽이 다 되여 집에 돌아가 쪽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대충 먹고는 또 제시간에 출근해 하던 일을 계속 해나갔다.

"그때는 밤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한다고 보수도 더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 로동자들은 한마디 원망도 없었지요. 나라건설에 자신의 힘을 이바지한다는 영광스러운 사명감에 벅찼던 시대였지요."

남승호는 열정에 책임감과 세심함까지 더하여 제2자동차공장으로 보내는 생산공구를 만들어 냈는데 간혹 부쳐 보낸 물건들이 품질에 문제가 있어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지만 본인한테서는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한번에 열몇가지 생산공구를 동시에 만들어야 하였는데 그때면 고도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하다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조의 생산공구를 만들어 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때에는 두달도 넘게 걸리기도 했는데 남승호는 다른 로동자들과 함께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연장작업을 이어가면서 드디어 제2자동차공장에 보내는 임무를 원만히 완수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 우리 공구분공장에서는 또 알바니아, 로므니아, 조선, 윁남 등 나라들에 지원으로 보내는 자동차제조에 들어갈 생산공구도 만들어서 수출했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만큼 품질에 문제가 없도록 더욱 신경을 써야 했지요." 남승호는 수출공구를 만들던 때를 회억하면서 밤낮을 이어가는 련속되는 초과근무에 체력은 급격히 저하되고 대신에 먹는 것은 따라가지 못하지 그래서 몸도 많이 망쳤다면서 그러나 나라건설을 위하여 다른 로동자들과 함께 자신을 하얗게 불태웠던 시절이 자랑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남승호는 자신의 열정과 꾸준한 노력으로 당시 기술로동자 직종에서 최고급인 8급 기계가공로동자로 되였으며 제1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에서 세심함과 책임감 그리고 일에서 사고하기를 즐기는 우수한 로동자로 손꼽혔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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