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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6)-엄혹한 시련 속에서의 악전고투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21 12:34:56 ] 클릭: [ ]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간악한 적들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뒤엉킨 간고한 시련에 맞서

제2방면군 역경을 뚫고

홍기하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2방면군은 이튿날인 1940년 3월 26일, 화룡현 화랜라즈에서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일본군 ‘토벌’대를 공격, 40여명을 소멸한 후 적들을 물리치고 안도현으로 빠져나갔다. 안도현에 도착한 2방면군은4월 29일, 련속하여 남도툰, 한가가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자위단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며칠 후 제7퇀 오백룡부대는 만보툰의 위만경찰과 자위단을 습격하여 몇놈을 죽이고 무기와 량식을 로획했다.

안도현 경내에서 여러 차례 타격을 받은 일제는 병력을 집중하여 2방면군의 뒤를 밟았다. 이에 2방면군은 적들의 ‘토벌’에 대처할 책략을 연구하기 위하여 5월 2일, 총지휘 김일성의 주최하에 돈화현 륙과송에서 금후의 전략전술방침을 연구하는 긴급회의를 가졌다. 제2방면군 정치부 주임 려백기, 부관장 필수문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 후 려백기는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현 쌍동툰, 대황구, 대마록구 등지의 일만군 기지를 련속하여 습격하였다. 대마록구전투에서 려백기는 중상을 입고 이미 변절하여 특설부대의 우두머리로 된 림수산(2월 24일 몽강현 쟈피거우에서 일본군에 투항)에게 체포된 후 역시 수치스러운 변절자로 되였다. 이로써 려백기가 인솔하던 부대는 해체되고 말았다.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분산적인 전투를 벌렸다. 7월 2일, 돈화현 하발령정거장을 습격하였고 7월 11일, 제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이 경위려와 2방면군 일부 부대를 이끌고 화룡현 와룡툰을 기습하여 일본군 20여명을 죽이고 군량을 로획했다. 같은 날, 2방면군 한 부대는 훈춘현 신안툰, 이도구를 야습하여 량식과 생활용품을 로획했다. 이튿날인 7월 12일, 다른 한갈래 부대는 안도현 신흥부락을 공격, 일본군 20여명을 격살했다.

아군의 이러한 부단한 기습과 공격에 일제는 더욱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이에 2방면군은 8월 10일, 돈화현 하발령에서 회의를 열고 상응한 대책을 강구했다. 계속하여 분산활동을 하는 한편 입동 후 부대는 장백산 밀림으로 철퇴해 들어가 한시기 휴정하기로 했다.

이 때 제1로군의 파견으로 지방공작에 나섰던 김재범 등 5명이 동불사 평성촌에서 활동하다가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 김재범은 변절해버렸다. 경위려 려장 박덕범도 왕청현 삼가구 부근에서 체포된 후 역시 변절해버렸다.

이 시기 위증민은 병이 악화되여 부득불 부대를 떠나 화전현 쟈피거우 이도하자밀영에서 병치료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1월, 2방면군 7퇀 퇀장 오백룡은 17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쟈피거우에 가 위증민을 만나 과동물자 등을 남긴 후 서북차, 따푸차이허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3방면군 피어린 결전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은 제2차 투도류하회의 후 화전, 녕안, 연변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편 교하, 서란, 오상 등지를 넘나들면서 전전했다. 3방면군은 ‘강적을 피하면서 약한 고리를 공격하고 기회를 엿보아 섬멸성 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리용하여 때로는 련합작전으로 때로는 분산출격으로 일본군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40년 1월, 3방면군 한 부대는 연길현 무학동에서 50여명 위만경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격살했다. 같은 달 최현이 이끄는 13퇀은 선후로 연길현 사방대, 돈화현 따푸차이허, 관지 등지를 습격하여 일만군에 타격을 주었다. 3방면군 일부 부대와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5군 2사는 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5군 2사 사장 도정비의 인솔하에 돈화 일대에서 활동했다. 1940년 봄, 진한장이 인솔하는 부대는 돈화현 우심정자밀영에서 2,000여명 일만군의 포위에 들었다. 적들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진공해 들어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7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진한장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진한장은 부상당한 몸으로 계속하여 부대를 지휘하여 포위를 돌파한 후 사하연 일대로 전이하게 했다. 그러나 련이어 우심정자의 여러 밀영이 훼멸되였으며 피복공장 전사들이 참혹하게 참살당했다. 재봉침, 식량, 남새 등을 모조리 빼앗기면서 후방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였다.

제3방면군 15퇀 퇀장 리운룡이 인솔하는 한갈래 부대는 연길현으로 전이해왔으나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적들의 추격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한 리운룡부대는 부득불 왕청현으로 전이하여 소부대 유격활동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1940년 5월, “적들의 ‘토벌’ 중심지 돈화현을 신속히 떠나라”는 1로군 대리사령원 위증민의 명령을 받은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오상 방면으로의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길에서 3방면군은 도처에서 적들의 포위공격과 추격을 받으면서도 돈화현 쌍하령 동강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30여명을 격살했고 교하현에서 추격해오는 적들을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일본군 13명, 위만경관 14명을 살상했다.

6월초, 부대는 드디여 오상현 경내에 들어섰다. 6월 5일, 3방면군은 오상현 랍림하삼림벌목경찰대 향수하자분주소를 야습하여 일본군 10명과 위만경찰 4명을 죽이고 로동자 120여명을 해방시켰다. 오상현에 들어선 후 3방면군은 류도적자, 석두하자, 신가영자 등 위만군 거점을 습격했다. 6월 18일, 오상현 장가만에서 일본군 수비대 60여명, 위만경찰 30여명과 조우전을 벌린 3방면군의 한 부대는 10명의 적들을 죽인 후 포위를 돌파했다. 6월 25일에는 오상현 충하진을 기습, 적 30여명을 포로하고 현금 8,700여원을 로획했다. 3방면군 15퇀과 2로군 5군 2사는 진한장과 도정비의 지휘하에 돈화, 교하, 오상 등지에서 전투를 벌리면서 원정하는 도중 대오가 한배 증가했다.

1940년 7월, 진한장은 1로군 총부와 분산 작전하고 있는 3방면군 13퇀과 14퇀 및 대오를 떨어진 전사와 부상병들을 찾기 위해 130명 대오를 이끌고 돈화로 나오는 길에 교하현 평지구, 평창툰 등 집단부락을 공격한 후 액목의 목단강 삼차구에서 적들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였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항격하여 포위를 돌파하였지만 절반의 병력을 잃고 말았다. 이에 돈화에서의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녕안현으로 전이했다.

1940년 10월, 진한장은 나머지 병력 60여명을 이끌고 녕안현 경박호 남호 부근에까지 갔다. 그 곳에는 원래 4개월 남짓이 먹을 수 있는 량식이 비축되여있었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몽땅 적들에게 소각되여버리고 없었다. 하여 부대는 ‘안으로는 량식이 떨어졌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그러나 진한장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1월말 진한장과 도정비는 행동계획을 짠 후 유격전을 벌려 량식을 해결하려 했다. 진한장은 4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1940년 12월 3일 밤, 진한장은 녕안현 황가툰 도로건설 공사장과 고강자집단부락을 쳐 무기와 량식 및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2월 5일에는 북호두의 일제벌목작업소를 습격, 량식을 로획했다. 그러나 몇차례의 전투에서 아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는바 진한장의 신변에는 겨우 전사 10여명만 남았다. 이에 진한장은 소만만구밀영으로 돌아가 한시기 휴정하려고 했다.

12월 6일 밤, 밀영으로 돌아오던 중 대오내에 변절자가 생겨 진한장의 신상이 적들에게 밀고되고 말았다. 적들은 즉시 부대를 동원해 소만만구밀영을 포위했다. 진한장은 10여명 전사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공격에 대처해나섰다. 죽어도 굴할줄 모르는 아군 전사들은 적들과 2시간 남짓한 격전을 벌려 여러 차례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10여명의 적군을 격살했다. 그러는 동안 아군 전사들도 한명한명 쓰러졌다. 적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적들은 공심전을 벌려 진한장을 사로잡으려고 시도했으나 진한장은 남은 몇몇 전사들더러 포위망을 돌파하게 하면서 자신은 맨 뒤에서 한편으로 엄호하고 한편으로 철퇴했다.

진한장이 죽어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적들은 아군 대오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진한장은 오른손과 가슴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간신히 일어난 진한장은 커다란 소나무에 의지해 마지막 탄알이 떨어질 때까지 왼손으로 권총을 휘둘렀다. 한무리의 적들이 소나무를 빙— 둘러쌌다. 한놈이 진한장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진한장은 분노의 눈길로 적들을 쏘아보면서 된욕을 퍼부었다. 이에 흉악한 왜놈은 달려들어 단도로 진한장의 눈을 도려냈다.

연변출신의 항일명장 진한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전략적인 전이

1939년부터 1940년에 거쳐 진행된 일제의 대규모적이고 철저한 ‘토벌’ 작전으로 동북항일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지 않으면 안되였다. 원유의 항일유격근거지가 몽땅 파괴되고 양정우, 진한장 등 우수한 지휘원과 용감한 전사들이 희생되였다. 3만여명이던 동북항일련군이 1941년에 이르러 2,000명도 되나 마나 하게 남았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000명도 채 안되였다. 적들은 1로군의 ‘뿌리’를 완전히 빼버리기 위해 끊임없는 ‘대소탕’ 작전을 벌리였다.

적들은 분산되였거나 흩어져있던 1로군 전사들을 수색, 체포하기 위하여 1로군 각 부대의 활동구역을 샅샅이 뒤지면서 엄격한 ‘반문(盘问)’과 ‘대검거’를 실시했다. 이른바 ‘반문’이란 행동이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온갖 악형을 다 가하면서 끝까지 따져묻는 것이며 ‘대검거’란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호구와 거민증을 조사하는 것인데 일단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불량분자’로 취급하여 체포했다.

1940년 11월, 위만간도성정부는 ‘동만 공산당조직을 복멸’시키기 위해 ‘특수반’이라는 전문기구를 설립했다. 각 현의 경방대에서 특수반을 지휘하고 관리했다. 아울러 정규적인 ‘토벌’과 배합하여 공산당조직을 파괴했는데 중점을 항일교통원과 지하공작자를 수색, 체포하는 데 두었다. 1941년 초에 이르러 형세는 급격히 악화되였다. 항일련군과 지방 군중조직의 련계가 기본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였으며 각 부대와의 련락도 철저히 두절되여버려 병력 집중 등 군사적 행동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였다. 량식, 복장 및 군수물자를 보충받을 원천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근거지가 없이 산간지대에 분산되여 활동하고 있는 항일련군 전사들은 극히 곤난한 처경에 빠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일부 나약한 자들이 무치하게 변절하여 부대의 종적과 비밀을 적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항일련군은 더욱 큰 봉변을 당했다. 그 간고성을 위증민이 1940년 11월, 당중앙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증민의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키잡이를 잃은 바다 속의 작은 배마냥, 두눈을 실명당한 어린이마냥 우리는 어쩌할 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할 뿐이다.

동북항일련군의 앞에는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의 박투, 간악한 적들과의 치렬한 싸움이 하나로 뒤엉킨 모진 시련이 닥쳐왔다. 이러한 정세에서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려면 유격운동의 전략적 책략을 개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0년 11월,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적들의 끈질긴 포위‘토벌’을 떨쳐버린 후 남은 병력을 인솔해 훈춘에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1940년 9월 29일, 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은 왕청현 천교령에서 일본 ‘토벌’군의 특별공작반에 체포된 후 변절, 하여 경위려의 주력이 기본상 와해되였다. 그중 일부가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제3방면군 13퇀, 14퇀 일부는 최현, 안길의 인솔하에 훈춘, 왕청, 녕안, 동녕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봄,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를 거쳐 쏘련 국경지대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1941년 봄에 이르러 원 연변의 제2군 출신 항일련군 생존부대는 일제의 악착한 ‘포위토벌’을 헤치고 기본상 쏘련 국경지대인 울라지보스또크 부근에 이르게 되여 전략적인 전이임무를 완수, 항일혁명세력을 보존하게 되였다.

하바롭스크회의

1935년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6.3 지시’ 정신에 의해 1936년 1월 9일,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된 후 동북에는 당의 통일적인 지도기구가 없어졌다. 공산국제 중공대표단도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었는지라 직접적으로 동북의 당조직과 항일무장 활동을 령도할 수 없었다. 1939년부터 동북항일 유격전쟁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였지만 의연히 중공중앙의 통일적인 령도를 받을 수 없었다. 이에 위증민, 주보중, 풍중운 등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은 편지를 쓰거나 사람을 파견 혹은 직접 쏘련으로 건너가 쏘련측의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상황보고를 전달했다.

1939년 9월, 중공북만성위 상무위원 풍중운은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여 쏘련 원동 해방부문과 교섭, 쏘련측의 협조로 북만, 길동 회의를 소집하여 길동과 북만의 당조직을 통일하고 2로군, 3로군의 합병과 통일을 꾀하려 했다. 쏘련측에서 풍중운의 건의를 접수하고 정치, 조직, 군사상에서 동북항일련군을 방조하기로 했다. 이에 1940년 1월 24일부터 2월 5일까지 쏘련 경내의 하바롭스크에서 중공길동성위와 북만성위 대표 련석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를 세칭 ‘제1차하바롭스크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중공길동성위 책임자이며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 북만성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풍중운, 항일련군 제3군 군장 조상지 등이 참가했다. 회의가 열릴 때 중공동만성위와 제1로군 군부가 이미 파괴되였기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회의에서 동북 항일유격전쟁의 겸험, 교훈을 총화한 후 부대 편제는 반드시 정세의 발전에 적응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토론하고 ‘실력을 보존하고 점차 편제를 줄여야 한다’는 회의 방침에 근거해 각 로군을 10개 지대로 줄이기로 하였다. 아울러 중공북만 당조직, 중공길동 당조직, 동북항일련군의 대표는 쏘련 극동군정당국과 국제공산당의 도움 밑에 항일련군이 쏘련의 일부 필요한 원조를 받지만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반드시 견지하며 동북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협의를 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의 항일유격운동과 중공 당조직을 분리시킬 데 관한 제안을 부결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 항일구국운동에 관한 새로운 제강초안〉 등 문건을 채택하였다.

1940년 여름, 독일이 서구라파를 병탄하자 일본은 아시아주와 태평양 지구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급급해했다. 1940년 9월27일, 독일과 이딸리아, 일본은〈3국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파쑈들의 결맹은 쏘련으로 하여금 구라파와 원동 변계를 수시로 침략당할 위험에 놓이게 했다. 쏘련 당국은 원동의 국세에 특수한 관심을 보이면서 1940년 9월말,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인 양정우, 위증민, 주보중, 조상지, 왕효명, 장수전, 풍중운, 시세영, 리청 등에게 통지를 발부하여 “금년 12월에 당과 유격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당조직과 목전의 유격운동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했다.

1로군에서는 양정우가 이미 희생되고 위증민이 중병으로 치료중이였기에 2방면군 지휘 김일성, 1로군 총부 군의처장 서철, 3방면군 안길 등 3명이 동남만성위와 1로군의 정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였다.

하여 1940년 12월 하순부터 1941년 1월 상순까지 두번째 하바롭스크회의, 즉 만주전당대표대회가 열리게 되였다. 회의에는 주보중, 최석천(최용건), 리청, 왕효명, 시세영, 김책, 김일성, 서철, 장수전(리조린), 풍중운 등이 참가했다. 회의는 중공중앙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정황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조직 편제에 관한 중요한 결의를 지었다. 동북항일투쟁을 통일적으로 령도하기 위하여 회의에서는 동북항일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주보중을 총사령으로, 장수전을 부총사령으로, 위증민을 정치위원으로 추천한다고 지적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으로 동북의 당 림시 지도기구, 즉 ‘3인단’ 을 조직했다. 이번 회의는 중공중앙과 련계를 맺으려고 하였지만 객관적 원인으로 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총사령부를 건립할 문제가 제기되고 결의까지 지었지만 정황의 변화로 하여 그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쏘련원동군 제88려단으로 편성되여 쏘련 하바롭스크에서 야영훈련과 소분대활동을 펼친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간부들. 앞줄 왼쪽 두번째로부터 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회의에서는 동북의 각 항일부대가 쏘련 경내로 철퇴해 들어온 정황에서 소부대를 동북 경내에 파견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할 데 대한 중요한 결책을 내오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전국의 형세를 보다 정확하게 예견하고 장기적으로 투쟁을 벌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환경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공산당의 령도하에서 단결하여 항일련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최후의 승리를 안아올 때까지 항일을 견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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