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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29]초신도 아까웠던 맨발소년의 70리 통학길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2-11 10:25:37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9](림원춘편-1)

전국단편소설상을 수상한 조선족작가 림원춘

고향의 옛집터에서(2016.7.5)

중국조선족 대표적인 소설가의 한사람인 림원춘은 1936년 12월 15일, 길림성 연길현 덕신향 안방촌 즉 지금의 숭민촌에서 태여났습니다. 그가 창작한 <몽당치마>, <꽃노을> 등 단편소설들은 근 반세기동안 조선족중학교 교재에 선재되여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특정시기 우리 조선족사회의 생활모습과 인정세태를 알려주고 정확한 인생관을 수립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만년에도 《우산은 비에 운다》, 《산귀신》, 《산사람》 등 굵직굵직한 장편소설들을 창작하면서 로익장을 과시하는 림원춘 선생님을 찾아 그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문학인생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림원춘 프로필:

1936년 음력 12월 15일 길림성 연길현 덕신향 안방촌(지금의 숭민촌)에서 출생.

1956년―1960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1960년―1982년 연변인민방송국, 연변텔레비죤방송국 편집, 주임

1982년― 연변작가협회 전직작가,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리사.

주요작품: 단편소설 <몽당치마>, <꽃노을> 등 90여편, 중편소설 <눈물젖은 숲> 등 10여부, 장편소설 《우산은 비에 운다》, 《산귀신》 등 5부, 장편실화문학 《예고된 파멸의 기록》등 3부

수상 및 영예:

1980년 단편소설 <꽃노을> 중국제1차소수민족문학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수상, 초급중학교 조선어문교과서에 편입

1983년 단편소설 <몽당치마>로 중국단편소설우수문학상, 중국소수민족문학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등을 수상, <몽당치마>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고급중학교 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됨.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진달래문학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연변작가협회50주년 특수공헌상, 공로상 등 다수 수상.

1988년 중공연변주당위 선전부 문화사업돌출상, 2007년 중공연변주당위, 연변주인민정부 민족문화사업특수기여인물상을 등 수상하고 2008년에는 20세기중국소수민족작가 100명가운데 선정되여 《20세기중국소수민족문학백가평전》에 수록됨.

2014년 연변작가협회 주최로 림원춘소설연구세미나 개최.

2017년 연변주 민족문화전승발전 평생영예칭호를 수여받음.

2019년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공로상 수상.

소학교시절 형님(림휘)과 함께.

초신도 아까웠던 맨발소년의 70리 통학길

저는 연길현 덕신향 안방툰 (현재의 룡정시 덕신향 숭민촌)에서 1936년 12월 15일 태여났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자식들이 12명이나 되였는데 병으로 모두 요절하고 셋만 남았다고 합니다.

저도 여섯살인가 하던 해에 홍진에 걸려 열이 나면서 거의 죽게 되였는데 아버지께서 석문골에 가서 얼음을 끄고 가재를 잡아다가 탕을 끓여주어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저의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있었는데 모두 대여섯살에 요절했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는 살아남은 우리 셋을 제일 모자란 찌꺼기들만 남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연변대학에서 교수로 사업하던 림휘선생이 바로 저의 형님인데 저도 형님한테서 배웠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예로부터 소를 팔고 땅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키는 그런 민족이 아닙니까? 그때 형님이 룡정의 영신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래서 룡정으로 이사오게 되였습니다. 1944년도에 들어왔는데 밭이 있나? 직업이 있나? 다행이 아버지께서 룡정 다무깡공장이라고 하는데 취직하게 되였습니다. 그 공장은 일본놈들의 공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남방 열대지역에 나간 일본군대들에게 염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무우짠지를 생산하는 공장이였습니다.

72년만에 고향을 찾아간 림원춘선생.(2016.7.5)

아버지가 다행이 그 공장에 들어가 일하였기에 먹고 살만 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광복이 나(터지)면서 땅도 없고 직장도 없이 나앉게 되였습니다. 1947년도에 어머니가 시집 올때 례단으로 가져온 삼베천 한 필을 시장에 나가 팔아 괭이 두자루를 사더니 용신구 이천촌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머니의 언니가 살고 있는 이천촌 자성툰에 가서 묵밭을 일구게 된 것입니다.

그때 집은 룡정에 단칸방이 있었는데 형님은 룡정중학교를 다니고 나는 룡정소학교(현재 대성학교 자리)인 신안소학교를 다니는데 형제간이 빈집에 있자니까 먹을게 있어야지요? 다행이 아버지, 어머니가 묵밭을 일궈 보리, 감자, 호박농사를 했는데 어머니는 35리 길을 이런 농산품을 머리에 이고 단칸방에 왔다가군 하였습니다. 감자가 가장 먼저 나오고 다음은 보리 이런 순서였는데 어머니는 나는 족족 날라다가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먹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다른 집같으면 형이 집을 책임지고 동생을 공부시켜야 하는데 우리는 아홉살짜리 제가 밥을 하면서 형님을 공부시켰습니다. 왜냐 하면 형님은 대성중학교 축구선수였고 연극대에 들어 지주를 청산하고 투쟁하는 데 자주 나가다나니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밥이라던가 좁쌀이라던가 이런거라면 하기도 좋았겠는데 보리쌀을 삶아서 거기에 감자를 넣고 호박을 넣고 끓여 절반은 지금 말하는 푸대죽을 끓여 먹은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생활이 말이 아니였습니다.

두번째 고향인 이천촌에서 한고향 동생부부를 만나.

용신구에서 내려오는 물이 홍수가 지면 다리가 끊기고 그러면 어머니가 제때에 우리가 먹을 뭔가를 이고 올 수 없을 때가 있었어요. 한번은 사흘인가 먹지 못해서 학교에서 쓰러져서 애들이 집까지 부축해다 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상이 깊은 것은 어릴 때는 왜서 그리도 잠이 많은지…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저의 시계는 아침해살이였지요. 창문에 비치는 아침해살이 나의 시계였지요. 아침해살이 제자리를 비추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시작하지요. 그때 나무라는 것도 통나무나 싸리나무가 아닌 아버지가 베여 말리운 쑥대였는데 그것은 연기가 참 많이 납니다. 그걸로 보리쌀을 삶고 밥을 하느라 3년간 고생하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두번째 고향인 이천촌에 소학교가 서면서 자성동에 가서 어머니가 끓여주는 밥을 먹게 되였어요. 제가 4학년에 올라가서 2년간 다녔는데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지요.

저는 1950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어요. 그때 (한학기 주숙비가) 소두로 여섯말이였는데 그러니까 쌀 90근쯤 되는데 우리는 밭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가 뚜져서 일군 황무지에서 나온걸로 살다보니 그 쌀을 댈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없이 저는 중학교에 입학한 후 13살부터 도보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그때 (왕복 70리 통학길) 길이 멀거나 왔다갔다 하는게 힘들거나 그런 어려움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입고 신는 신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제자랑인지는 몰라도 저는 8살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초신 삼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소도 없이 농사하다보니 힘들었지요. 그래서 저절로 초신을 삼아 신었습니다. 지금도 삼으라면 잘 삼을 수 있어요. 연변방송국시절 민병들이 왕청에 가서 민병훈련을 할 때 초신 10컬레를 삼아 그들에게 주면서 과거를 잊지 말고 잘 훈련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초신도 룡정까지 오면 모래와 자갈이 많다보니 단통 밑굽이 나갑니다. 너무나 아까워서 집에서 걸머메고 맨발로 35리를 걸어 룡정시교까지 와서야 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공부가 끝나 3시에 귀가할 때도 시교까지 신고 와서는 벗어 둘러메고 다녔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여름에 비오거나 겨울에 눈보라 치거나 할 때였습니다. 어린 녀석이 그 칼바람이 몰아칠 때면 사람이 날아갈 지경이고 여름에 비올 때면 우산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래도 책이 젖지 않게 책보를 배에다가, 저고리밑에 꼭 끓어안고 다녔어요.

고향집 앞에서 후배문인들과 함께.(2016.7.5)

그때 어머니 곁에 녀자가 없었어요. 제는 혼자이다보니 두부를 앗거나 신떡을 하거나 찰떡을 치거나 메주를 쓰거나 하는 것을 어머니곁에서 다 배워냈어요. 자랑인지는 모르나 저는 못해본 밥이 없고 못해본 떡이 없습니다. 그리고 메주, 장간사리 만드는 것도 어머니한테서 배워서 지금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저는 지금 집사람이 있지만 주방에 잘 나섭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가 나서서 해서 먹군 합니다. 특히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 어린 나이에도 여러번 밥을 해서 아버지, 어머니가 나간 밭에까지 날라다주군 하였습니다.

물론 그 시절 많은 동년배들도 고생하였겠지만 저는 특별히 어렵게 공부를 하였습니다.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제가 소학교 때 2학년부터 반장을 하였는데 가장 근심나는 것이 봄, 가을에 가는 산보였습니다. 산보가는 음식마련을 할 수 없었기때문입니다. 닭알이나 고기붙이는 구경도 못했지요. 반장이다보니 가긴 가야 되지 그래서 보리쌀에 좁쌀을 약간 놓고 살짝 떠서 점심밥을 만들고 된장을 쪄서 한쪽에 넣고 갔는데 그냥 근심되였지요. 점심이 빨리 지나야 되는데 하면서. 점심시간 학부모들이 찾아와서 학생들을 찾을 때 슬그머니 바위굽밑에 찾아가서 밥보자기를 푸는데…그때 정말 눈물이 납데다. 부모가 같이 가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닭알 한알도 가져가지 못하다보니…

그래도 먹어야 되는데 하면서 밥을 뜨는데 “원춘아!”하는 부름소리가 들리더군요. 돌아보니 반주임선생님이였습니다. “내가 네가 여기로 피해 올 때 보고 눈치를 차렸다. 왜 이러냐? 내가 있는데…”그때 선생님이‘원춘아’하던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나를 막 끌고 가더니 나를 선생님 옆에 앉히더군요. 제가 싸간 도시락은 빛도 보이지 않고. 선생님이 내 몫을 따로 가져갔는데 거기엔 닭알 하나와 돼지고기볶음채, 하얀 이밥이 담겨져있었지요. 그런가 하면 학부모들도 가져온 사탕과자를 내앞에 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그 정은 지금도 잊어지질 않습니다. 바로 제가 지금만큼이라도 성공할 수 있은데는 그 선생님들의 그 뜨거운 사랑이 하나의 밑바탕이 되였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렇게 소학교때 림순금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원족을 갔다온 다음부터 그 선생님은 내가 너를 잘 몰랐구나 하면서 좋은 음식이 생기면 가져다 주고 장도 가져다 주고 그랬습니다. 그런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자성동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지금의 지신향 승지촌을 지나는데 오후 세시에 룡정에서 떠나니 한창 배고플 때였지요. 그래서 승지촌 길옆에 자리잡은 우물터에서 물을 먹고 다녔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 집이 바로 주덕해동지 옛집이였지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태국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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