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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중국조선족력사(71)]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1)

편집/기자: [ 유창진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9-12-11 14:41:38 ] 클릭: [ ]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가면서

절대적 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불멸의 시성-윤동주

윤동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 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 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 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 리해할 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 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2005년),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 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尹惠媛)녀사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녀사의 부군 오형범(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 있음)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 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제막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이였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들이 환히 알렸다. 비문정면에는 윤동주의 친필 서시와 일어로 번역된 것이 세겨져있고 뒤면에는 오오무라교수의 비문이 씌여져있었다.

尹东柱诗碑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중인 1931년경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회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회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하여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의 협의를 입어 체포되였다. 재판 결과 그는 치안유치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였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친필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 번역은 이부키고씨의 것이다.

—학교범인도시샤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가면서 절대적 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채찍을 들던 윤동주,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윤동주는 바로 연변이 낳은 아들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尹永锡)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金跃渊)선생의 누이 김룡(金龙)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 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 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10세까지 해환이라 불리웠으며 그 밑이 달환이고 그 밑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이름이 별환이였다. 해, 달, 별을 뜻하고있는 이들의 이름에서 윤동주가 많은 시작을 창출했다고 어떤 학자들은 력설하기도 한다.

《윤동주평전》의 작가 송우혜(한국)선생은 윤동주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윤동주가 두살이던 1919년에 그 땅에서 독립운동의 거대한 봉화가 타올라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진행되였고 1920년에는 우리 민족의 대일무력항전사에서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그 땅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집요하고 거세게 지속되였다. 그가 15세의 소년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1년에 일본은 드디여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손에 넣었고 이듬해인 1932년에 그 땅에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만주전체를 일본판도에 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때로부터 만주국의 국민이 되였다.

윤혜원녀사의 회억에 따르면 소년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 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한 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 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후 윤동주는 5키로메터 동쪽에 있는 대립자(지신)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서 패(佩), 경(镜), 옥(玉) 이런 소녀들의 이름은 아마 이 때의 만남이였을 것이다. 대립자소학교를 마친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 잡은 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 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 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 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잘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 대해 굳은 신념을 지닌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식하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손주를 보다못해 할아버지가 나서서 윤동주의 편을 들어주었고 외삼촌인 김약연선생까지도 도와주어서야 윤동주의 뜻은 펴질 수 있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면서 3년간의 서울학창생활이 시작된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의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는 저녁밥을 먹고 나면 교내 잔디 우를 뒹굴고 친구들과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론 밤을 새우면서 별을 세기도 하였다. 맑은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을 동무 삼아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였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 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 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5월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눈 감고 간다〉 등은 5월 31일에, 〈돌아와보는 밤〉, 〈바람이 불어〉는 6월에,〈 또 다른 고향〉, 〈길〉은 9월에, 〈별 헤는 밤〉, 〈서시〉, 〈간(肝)〉등은 11월에 창작되고 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들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사람들로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리상, 서정주, 발레리,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쟘, 라언 마리아 릴케, 장 콕토 등이였다. 본격적인 문학수업이 닦아지면서 터쳐버린 독서열은 막을 수 없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들어 자신의 졸업을 기념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자필시집이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 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여있었고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여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3부로 만든 후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 이름을 《병원》이라고 할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 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가〉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 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 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농 속에 깊숙이 감춰졌다가 결국 광복 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 것이다.

윤동주가 검거된 반년 후 나는 소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피차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마당에 이르러 나는 윤동주의 시고를 나의 어머님께 맡기며 나나 윤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여 주십사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여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윤동주》(이(리)건청 저, 건국대학교출판사)에 수록된 정병욱의 회고록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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