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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중국조선족력사(72)]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2)

편집/기자: [ 최승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2-18 12:48:40 ] 클릭: [ ]

후꾸오까형무소의 이슬 되였어도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등이 이 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 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 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 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빠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 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 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윤동주는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3년 7월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게 되였는데 떠나기 직전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고 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여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본경도재판소에서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

주소: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번지 무전아빠트내 사립 동지사대학 문학부 선과 학생

윤동주

1917년(대정 7년) 12월 30일 생

우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강도 효(江島 孝)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판결 구류일수중 120일을 우 본형에 삽입한다.

리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그 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1942년(소화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때 동경 릿교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하였으나 동년 10월 이후 경도 동지사대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찌기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간의 소위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차(怨嗟)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리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현시에 있어서의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동지사대학에 전학 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 있던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선인 학생 송원휘중(松原揮忠), 장성언(張圣彦)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여왔는데 그중에서도…(이하 략)

우의 재판기록에 서술된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고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후꾸오까에 도착하자 우선 송몽규부터 면회하였는데 송몽규는 주사를 맞는 행렬에 섰다가 나와서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 간수가 “윤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라고 전해주었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역(개산툰 대안)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가 몹시 휘몰아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 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세웠다. 김관석씨가 한문(漢文)으로 비문을 작성하여 비의 뒤면에 새겨넣었는데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아래와 같다.

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부 이미 이루었어도 그 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였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 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만 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 만했는데 춘풍이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을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연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긴 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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