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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15]타향서 찾은 나의 집-석도로인협회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1-16 13:24:06 ] 클릭: [ ]

  정범철 구술 /류은종 정리

석도는 위해시 영성에 속한 하나의 자그마한 반도라서 조금만 나서면 바다가 보이고 부두가에는 크고작은 고기배가 파도에 넘실대며 정박해있다. 봄이 오면 오붓한 석도마을은 온통 과일꽃 벗꽃들에 묻혀 세외도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2013년에 석도에 와서 B구역에 자리잡았고 석도 로인협회는 A구역이라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걷자면 한참 가야 협회에 당도할 수 있었다. 나는 금년 67세 나이로 로인협회에 다닌지 7년이 된다. 7년동안 나는 석도에서 전기장판 필림을 가설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은 나의 직업으로 되였다. 일을 하다가도 짬만 나면 로인협회에 들려 눈에 걸리는 일들은 빠짐없이 손질하군 하였다.

로인협회 장식을 위해 아침일찍 길에 나선 정범철.

로인협회는 따스한 나의 집이였다. 모두가 로인협회에 정을 두고 서로 한가정처럼 보내는 사이다. 활동실에 모이면 이야기 꽃을 피우면서 오구작작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활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못내 행복감에 젖어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6살부터 고아로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자랐기에 부모가 그리웠고 무척 이런 자리가 그리웠다.

나는 우리 조선족들이 모여 활동하는 자리라면 무엇이나 주고 싶었다. 내 손에 무엇이 있으면 있는 대로, 우리 집에 무엇이 있으면 있는 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활동실 건설에 바치고 싶었다.

2009년에 조선족로인협회가 설립되자 석도 판사처에서 활동실을 내여주었다. 비록 활동실은 초라한 콩크리트바닥이였지만 모두들 모여 흥겹게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때 나는 우리 민족은 과연 춤을 즐기고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란 것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이런 환경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동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였다. 처음에 착수한 것은 전기장판이였다. 전기장판 기술은 내가 독일에서 배워 한국에 나가 써먹던 솜씨라 내가 번 돈으로 장판지와 전기필림을 구입하고 면적이 80평방메터 남짓이 되는 바닥을 깨끗하게 장식해놓았다. 그리고 알루미늄 등으로 옷장, 싱크대를 만들고 나들이 문, 화장실까지 집안 모든 필요한 장식을 해놓았다.

악기와 춤노래로 삶을 즐기고 있는 회원들.

무용을 창작하자면 무용도구가 필요했다. 그걸 사자면 근 500원 돈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자체로 설계하여 만든 짝짝궁도구는 값도 싸거니와 소리도 잘 나고 보기도 좋았다. 나는 협회에 행사가 있으면 자진하여 거기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만들어 기부하였고 행사에 맞는 좌석배치까지 화려하게 해놓고야 시름을 놓았다. 협회의 김화 회장은 나를 협회의 살림군이라고 거듭 치하하군 하였다. 그후 협회 어떤 분들은 돈을 기부하였고 어떤 분들은 노래방기구, 확성기 등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여러가지 가마솥, 그릇을 비롯하여 살림가구들을 하나하나 일구었다. 오락기구, 상고모자, 집체활동에 쓰는 민족복장, 한복까지 일정하게 갖추었고 북, 장고 등도 마련해놓았다. 악대도 자원에 의해 어떤 분들은 2만원짜리, 4만원짜리 색스폰을 구입했다.크라네, 손풍금수까지 합쳐 8명으로 구성된 악대가 설립되였다. 악대가 설립되니 문체활동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위해시에서 우리 민족들이 펴내는 활동은 다채롭다. 민족운동회, 민속놀이, 문예경연대회는 해마다 엇갈아 조직되였다. 그럴 때마다 거기에 따르는 기자재가 필요했다. 문구를 하면 문구채, 문구뽈, 문대 등이 필요했으며 유희놀이엔 병걸개, 동그란 쇠테, 무용엔 짝짝궁 도구들이 필요했다. 경연대회에 필요한 기자재들은 그때그때 설계했으며 필요한 재료는 사서 만들어냈다.

나는 연변병원의 유명한 제일대 교수 정규창의 맏손자다. 6살 때 량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 헤매다가 고아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할아버지 정규창 교수는 일본류학을 가고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시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린 녀동생 둘을 데리고 나는 고아원 생활을 하게 되였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나는 고아원생활을 하면서도 어린 녀동생을 돌보아야 했다.

나는 고아원생활을 하면서 집체생활에 적응되였고 중국공산당의 덕분에 성장하면서 모택동 주석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심과 기부문화의 헌신정신을 체감하게 되였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 할 때도 고아원이 있으면 찾아가 고아원의 일을 도와 주고 다문 얼마라도 기부하고야 시름을 놓았다. 학교는 소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어도 무슨 일에나 집착하여 열심히 배우고 하다보니 손재간이 늘었고 돈도 넉넉히 벌었다. 왕청현에 있을 때 맥주병마개, 포도주마개, 병원에서 쓰는 링겔마개 그리고 목정 고체덩이도 자체로 설계하여 제작하였다. 나는 금형제작, 신모형과 같은 모형을 떠서 여러가지 물건을 제품의 요구 대로 만드는 손재간을 키워 거기에서 번 돈으로 왕청고아원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고아원장식을 내가 자진하여 도맡아 하다보니 거기에 든 돈만 해도 10만원 실히 되였다.

이런 기부정신이 안받침되여 석도에 와서도 로인협회의 일이라면 몸을 내번지고 해냈다. 실지 안해의 지극한 도움과 뒤바라지가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안해(최순복)는 젖암이 림파에까지 확산되여 확산된 곳을 다 잘라던지고 화료와 방료를 9개월동안이나 한 몸을 지탱하면서 나를 도와나섰고 나도 척추결핵으로 척추수술을 받고서도 좀 회복되니 활동실 장식에 이어 옷걸이 가구 등 필요한 장식에 달려들었다.

로인협회를 제 집처럼 사랑하는 정범철 최순복 부부.

몸은 고달파도 일을 하고나면 지긋한 몸이 좀씩 풀리군 하였다. 활동실 활동을 위하여 안해는 40명 이상 먹을 료리를 집에서 만들었고 탁주, 청주도 담그어 30여근씩 만들어 활동에 참석하는 분들에게 공급하기도 하였다. 바다낚시, 민물낚시로 낚아온 고기는 협회의 분들과 함께 먹거나 몸이 허약한 김봉순과 같은 분들에게 나누어주어 몸보신도 하도록 하였다. 석도의 산과 산나물밭, 부두 낚시터 그 어디에나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제 우리 내외는 몸을 잘 돌보아야 하는 형편인데 집의 일을 제쳐놓고 철따라 미나리, 취, 도라지, 삽지, 더덕 여러가지 산나물들을 캐여다 활동실의 행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헌신적인 기부정신은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고아생활 환경이라 하겠다.

내 몸은 내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길러주고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당의 덕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이만한 일쯤은 응당한 것으로 여긴다. 나는 항상 당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한다. 아직도 모택동 초상을 집에 정중히 모시고 마음속에 담고 다닌다. 내 이 몸이 살아있는 한 로인협회는 내 집이며 협회 성원들은 모두가 내 형제들이다. 내 집 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아까운 것이 없고 베풀며 사는 것에 보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범철이 만든 운동기자재로 훈련을 하고 운동경기에 나선 협회 선수들.

     정로인이 만든 무용도구는 회원들이 애지중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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