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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77) 조선의용군 제5지대(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4-02 12:57:44 ] 클릭: [ ]

조선의용군 여러 갈래 지대 편성 남만 북만 동만서

국민당 반동무장 섬멸 전국 해방전투서 혁혁한 전공을

조선의용군

‘7.7’사변 전후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연안에 가서 중공중앙당교 아니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거나 공부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무정 장군과 중앙당교의 진광화 등 많은 조선인 혁명자들은 항일 최전선에 나아가 피어린 싸움을 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동지들은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에 배치되여 공작하였다.

일찍부터 중국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각 반일 민족주의 정당, 단체들은 각지에 간부학교, 군사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7.7’사변 후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실현되고 전 중국 인민들이 일제와의 성전에 떨쳐나서자 이에 고무된 조선인 각 정당, 단체들은 분산된 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38년 5월 김규식, 김약산이 령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발기에 의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련합하여 조선민족해방전선련맹을 결성하였고 1940년 5월에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이 련합하여 김구를 위수로 한 한국독립당을 건립하였다. 이 두 조직은 서로 손 잡고 중국 항일력량과 련합하여 항일의 길에 떨쳐나섰다.

연변에 진출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12월, 연길)

관내에서 맨 처음 항전에 나선 것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등 청년들이였다. 그들은 1938년 7월에 조선청년전지복무단을 조직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함께 무한보위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후 그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과 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고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도하에 1938년 10월10일 무한에서 김약산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군사학교 출신이 대다수를 점한 이 의용대는 무한보위전의 포성 속에서 태여났고 후에 3개 지대로 나뉘여 항일 제1선으로 달려나가 일본 침략군과 싸우는 한편 적 병사들에 대한 선전, 고동 공작에서 뛰여난 전과를 올림으로써 중국 정부와 인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다른 한편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한국 림시정부에서도 건군 공작을 다그쳐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우고 간부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3개 지대의 군사인원들을 중경, 서안 등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적군 공작을 돕는 한편 앞으로의 대부대 건설계획을 세우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중일전쟁이 대치 단계에 이르자 국민당정부는 소극적으로 항전하고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반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2년 남짓이 국민당군대와 련합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려오던 조선의용대는 당시 화북지대의 20여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항일에로 불러일으키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손 잡고 항일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중경, 호북, 광서 일대로부터 북상하여 끝내 팔로군 총부 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이르렀다.

그 후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중국 관내의 조선인 항일력량을 통일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정부의 지지와 협조를 받고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총사령에 리청천, 부총사령에 김약산을 추대한 광복군은 원 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성하고 김약산이 지대장을 겸하였으며 원 광복군 제2지대로 편성하고 림범석을 지대장으로 임명했다.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온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팔로군내의 조선 동지들과 화북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청년조직과 련합하여 조선의용대를 화북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하였다.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했던 무정 장군을 사령원으로, 박일우를 정치위원으로, 박효삼을 참모장으로 한 조선의용군은 전투력이 강한 항일무장대오였다. 항일근거지의 가렬처절한 반‘소탕’전투에서 의용군은 헌신적으로 싸웠다. 진광화, 석정 등 의용군 지휘자들은 성스러운 항일구국 공작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였다. 그들의 영웅적 업적은 전 중국인민들로부터 찬양을 받았고 항일근거지 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1942년 7월에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재조직되였고 연안에 들어가서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최창익과 한빈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화북조선의용군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한 후 무정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를 받으면서 많은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또 화북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항, 태악, 기로예, 진찰기 등지에 독립동맹분맹을 내오고 북평, 천진, 신향, 개봉, 석가장, 승덕 등지의 조선인 농민, 지식인, 중소상인들 속에서 여러가지 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북과 조선에 공작원을 파견하였으며 할빈 일대에는 독립동맹 제12지부를 내왔으며 평양과 서울에서도 동지들을 쟁취하는 공작을 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화북에서 싸우던 조선 독립동맹과 의용군은 팔로군과 어깨 겯고 동북에 진출하여 일제의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새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들중의 일부는 조선 북반부로 나가고 중경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 요인들과 중경, 서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은 ‘개인의 신분’으로 조선 남반부로 돌아갔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

1945년 8월 8일, 쏘련 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인 8월 11일, 주덕 총사령은 제6호 명령에서 우리 나라 관내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적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을 조직하여 조선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라고 지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 후 조선의용군은 무정 사령원의 인솔하에 관내에서 나와 도보로 동북으로 진군하여 11월 4일, 심양에 도착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지도기관은 심양에서 회의를 열고 변화된 형세에 대처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때 조선 북반부에 진주한 쏘련군은 중국에서 나가는 조선의용군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의용군은 림기응변하여 부대를 1, 3, 5 지대로 편성한 후 조선인이 모여사는 남만, 북만, 동만으로 나가서 중공중앙 동북국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먼저 동북근거지를 건설하는 투쟁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심양에 집결한 조선의용군(1945년 11월 7일)

제1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 정치위원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 정치부 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 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명의 병력과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졸업생, 각 항일근거지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보병 9개 중대, 기관총중대, 경위중대 등 11개 중대를 두었다. 제1지대는 그 후 리홍광지대로 발전하였으며 1946년 12월에는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로, 1948년 11월 심양이 해방된 후 독립 제4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였으며 이미 만2천여명 병력을 가진 정규군 사단으로 발전, 성장되였다.

1945년 11월 25일, 북만으로 진군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한다고 선포하였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 주임에 리근산, 참모장에 김연이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아군 359려와 송강군구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목란, 통하, 방정, 연수, 상지 등 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와 토비숙청에 참가하면서 2,000여명으로 병력을 늘였다. 3지대가 할빈으로 들어왔을 때는 병력이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할빈시의 위수임무를 맡은 3지대는 부대를 파견하여 동북국을 비롯한 성, 시의 주요한 당정기관을 보위하였으며 송화강대철교, 발전소 등 큰 곳을 수비하였다. 그리고 일부 병력을 시교, 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의 순조로운 진전을 보장하게 하였다. 1948년 1월,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였다. 그 해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을 받고 할빈을 떠나 길림성 연통산 일대에 가서 길동경비 사령부의 조선인 부대와 목단강에서 온 조선인 전사들로 무어진 목단강군구 제14퇀과 함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편성되였다. 그 해10월, 3지대는 장춘포위전에 참가했다. 장춘이 해방된 후 3지대는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1949년 3월,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 후 3지대는 제4야전군 독립 164사 491퇀에 편입되여 료심전역에 참가했다.

1945년 11월 21일, 길림시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소부분 인원을 남겨 길림시에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11월 29일, 화전현 소재지에 주둔한 길림성보안총대 제7대대는 상부의 명령과 조선의용군 심양회의 정신에 따라 12월 말에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되였다. 이 부대는 화북에서 온 의용군을 골간으로 하고 7대대를 주력으로 화전현, 서란현, 교하현 등지의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조직한 무장대오로서 지대의 지휘부는 괴뢰만주국 화전현공서 울안에 설치되여있었다. 박훈일(朴勋一)이 지대장 겸 정치위원을 맡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치위원, 김극이 참모장을 맡았다. 지대부 아래에는 6개 중대가 소속되여있었다. 1946년 3월, 7지대는 화전현 보안퇀으로 개편되였다. 양상곤이 퇀장으로 임명되고 현위서기 왕소천이 정치위원을 겸임했으며 송무선이 부퇀장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창건된 뒤 길림지구에서 반혁명적 무장을 짓부시는 투쟁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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