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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78)조선의용군 제5지대(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4-08 16:13:41 ] 클릭: [ ]

조선의용군 여러 갈래 지대 편성 남만 북만 동만서

국민당 반동무장 섬멸 전국 해방전투서 혁혁한 전공을

돈화역에서의 풍파

1945년 11월 9일,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동만을 향해 진군하였다.

5지대는 태항산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대오였다. 조선의용군 부사령이며 정치위원인 박일우가 제5지대의 정치위원을 겸했고 리익성이 지대장을, 전우와 리권무가 참모장을, 주혁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지대는 9개 중대로 구성되였는데 정찰, 경위, 무전, 통신, 악대 등 지대 직속까지 합하여 대원이 900여명 되였다. 지대에는 참모부, 정치부, 공급부가 설치되여있었다.

정치위원 박일우는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교장 김두봉)이였다. 박일우는 화룡현 출신으로서 일찍 30년대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였다. 1945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대회에서 재중 조선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황에 관한 보고를 하여 대표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지대장 리익성도 일찍 항일투쟁에 참가한 투사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장군

심양을 떠난 부대는 연도에서 조선부락 동포들의 환영을 수없이 받으면서 행군했다. 새하얀 조선옷을 떨쳐입은 부락민들은 동구 밖까지 나와 부대를 맞아주었고 마을에 들어가서는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군 했다. 의용군 전사들은 마을사람들에게 눈물겨운 전투담을 들려주었고 조선의용군행진곡 등 항일혁명가요를 가르쳐주었다.

행군 도중 리익성 지대장은 행군속도를 다그쳐 동만에 진출하라는 조선의용군 사령부의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도보로 행군해서는 명령에 지정된 시간내에 동만에 도착할 수 없다고 판단한 리익성 지대장은 한 참모일군에게 청원역에 가서 기차를 구해보라고 지시했다. 역에 갔다온 참모일군은 기관차와 차량 10바곤은 구했는데 기관사가 없다고 했다. 기관사가 없어 골치를 앓고 있는데 때마침 한 중대에 참군전에 기관사 조수로 일한 적 있는 한 전사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차를 타면 길림까지 쉽게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전사들을 기뻐 날뛰였다.

의용군 전사들을 꽉 박아실은 기차는 악대가 연주하는 〈조선의용군행진곡〉의 장엄한 군악소리 속에서 서서히 반석역에 들어섰다. 플래트홈은 마중 나온 수백명 조선인 군중들의 환호성, 만세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워낙 반석역에 잠간 멈춰 점심식사를 하려고 기차를 세웠으나 환영 나온 군중들의 성의와 열성에 감동된 의용군 전사들은 차에서 뛰여내려 그들과 부둥켜안고 한덩어리로 엉켜 돌았다. 남녀로소 할것 없이 의용군 전사들을 부둥켜안고 “우리 군대! 우리 군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일우 정치위원이 플래트홈에서 군중들을 향해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박일우는 제5지대를 대표하여 반석지구 조선인 군중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 국제 국내 형세,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정책, 동북 조선인들의 당면한 과업에 대하여 말했다.

박일우의 연설은 무시로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선인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 “조선의용군 만세!”를 웨치면서 호응했다. 박일우는 반석지구 조선인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박정덕, 장천립, 채동성, 차진 등 10여명을 남긴다고 선포했다. 반석에 남은 이들은 그 후 반석지구에 조직된 조선족 자위무장대오를 기초로 하여 2개 중대의 조선인 무장력량을 조직함으로써 반석지구의 인민민주정권을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확보하는 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길림에 이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전원이 기차를 타고 갈 수 없는 형편에서 먼저 2개 중대로 선발대를 무어 전우의 인솔하에 화물차를 타고 연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선발대를 태운 화물차가 돈화역에 멈춰섰을 때였다. 사면팔방에서 총성이 요란히 울리고 “네 놈들은 포위됐다!”, “손 들고 차에서 내리면 살려준다!”는 중국말 고함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그 웨침소리 속에는 로어로 뭐라고 꽥꽥거리는 고함소리도 섞여있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파악한 전우는 당황해하는 전사들을 눅잦혔다.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전에는 누구도 절대 총을 쏘아서는 안됩니다. 진상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그렇다 쳐도 쏘련 붉은군대까지 가담했길래 충돌이 생기면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쏘련 붉은군대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 지고무상의 권력을 갖고 있으므로 절대 맹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째야 한단 말입니까?”

“먼저 쏘련 군대를 설복해야지요. 진상이 밝혀지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자, 모두들 무기를 놓고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립시다.”

결국 선발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돈화시내로 압송되고 말았다. 참모장 전우는 우선 붉은군대 사령원을 만날 것을 요구했다. 쏘련 공산주의대학의 졸업생인 전우는 류창하게 로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은 쏘련에 있을 때 또꼬브라는 이름을 썼으며 지금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한 후 연변으로 나가는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나 붉은군대 사령원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발대가 돈화에서 국민당 계통의 지방무장에 의해 억류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제5지대 대부에서는 상황을 즉시 조선의용군 사령부에 무전으로 알렸다. 이에 조선의용군 사령부에서는 이미 연길 쏘련군 사령부에 정황을 알렸다는 답전이 왔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교하현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여키로메터 상거한 조선인 부락에서 출발하여 돈화를 향해 강행군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연길 쏘련군 사령부의 강신태 대위는 돈화사건에 대한 조선의용군 사령부의 급전을 받고 즉시 돈화에 가서 쏘련군 사령부와 교섭하였다. 전우와 강신태의 인내성 있는 해석과 설복 끝에 자기들이 돈화보안사령부 류화일의 꼬임수에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돈화 쏘련군 사령부에서는 5지대 선발대 전원과 몰수했던 무기를 내놓았다.

위만군의 상위로 일한 적 있는 국민당원 류화일은 돈화지구가 혼란한 틈을 리용하여 치안유지회를 조직했고 돈화현 현장자리에까지 기여올랐다. 현장이 된 후 이 자는 돈화보안사령부를 조직했다. 류화일은 국민당 특무들과 공공연히 결탁하여 돈화에 건립된 인민민주정권을 뒤엎고 돈화 국민당 당부까지 세웠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돈화를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화일은 일본군 패잔병 부대가 비밀리에 돈화를 거쳐 연변 쪽으로 도망간다고 쏘련군 사령부에 거짓보고를 했다. 류화일의 말을 믿은 쏘련군은 군대까지 파견하여 류화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제5지대 지대부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돈화 남쪽의 림강툰에 이르렀을 때 돈화사건이 금방 해결되였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돈화지구에 인민민주정권을 세워주고 앞으로 동만지구의 혁명형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계획의 첫단계로 돈화의 반동무장을 소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돈화에는 8개 보안대대가 있었는데 7개 대대가 변절하여 류화일을 괴수로 하는 국민당측에 넘어갔고 유독 1개 조선인 대대만이 마호에 철퇴하여 투쟁을 견지하고 있었다. 제5지대는 조선인 대대와 손 잡은 후 주밀히 정찰하고 세밀하게 전투를 포치하여 12월 중순의 어느 날 반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류화일의 반동무장을 일거에 섬멸해버렸다.

제5지대의 재편성

1945년 12월 8일 밤에 문정일이 조선의용군 선견대를 거느리고 먼저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 관선정과 연변 교육계의 박재하가 마중 나갔다. 연길에는 조선의용군 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을 맡았다.

12월 31일, 박일우,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제5지대 400여명 장병을 거느리고 연길에 도착하였다. 1946년 1월 초순, 5지대는 연변경비 1퇀, 2퇀과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15, 16퇀을 편성하고 조양천에 교도대를 세웠으며 훈춘에 1개 중대를 파견하여 건군 사업을 벌렸고 포병부대의 건립에 착수했다.

15퇀은 5지대의 절반 력량과 경비 2퇀이 합병한 부대였다. 1946년 3월, 15퇀은 길동경비 2려의 1개 퇀으로 되였고 그 후에는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개칭되였다. 1948년 1월에는 동북군구 독립 6사에 편입되여 16퇀으로 되였다가 1948년 11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6사 466퇀으로 개칭되였다. 부대가 자주 재편성되는 과정에 1개 한족영이 편입되기는 했지만 기본상에서 조선인퇀의 본색을 확보하고 있었는바 2영과 3영, 퇀 직속의 대부분은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이 퇀은 라자구 일대에서의 토비숙청, 하발령 방어축성물 로동, 동만 철도경비, 길림 외곽지구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등에서 견강한 집단으로 장성했다. 관내로 진군한 후 이 퇀의 2영 7련, 즉 ‘김성범련’은 이름을 떨친 영웅련대, 모범련대로 되였고 3영 9련은 장강도하작전의 서막인 단풍전투에서 전투련으로 되여 대담하고 용감하며 신속하고 령활하게 전투를 하여 2분 만에 1호보루를 폭파하고 6분만에 부두를 점령함으로써 전반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였다. 1949년 11월에 열린 156사 제1차 영웅모범대회에서 리순임, 정형련이 1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고 19명이 각기 2, 3, 4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였으며 김성범, 주광문, 박문수 등 13명의 렬사가 인민영웅으로 추인되였다.

16퇀은 1946년 3월에 동북민주련군 길동경비 1려 1퇀으로 되였고 그후 동북군구 독립 1사 1퇀으로 개칭되였으며 1947년 8월에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0사 89퇀으로 개칭되였다. 이 퇀은 1946년 1월 중순부터 삼도만, 대흥구, 묘령, 천교령 일대를 주름 잡으면서 토비를 숙청했고 1946년 4월에 장춘 제1차 해방전투에서 ‘조선퇀’의 영예를 떨쳤다. 그 후 화전, 로야령에서 운동전을 벌렸고 덕혜전투, 진단목전투, 법고추격전, 개원전투에서 다시 한번 ‘조선퇀’의 이름을 날렸다.

1948년 4월 25일, 10종대 30사는 개원에서 공로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89퇀의 박국제(특등공), 조영희(대공 2차)를 비롯한 103명이 대공 수훈자로 표창받았다.

료심전역의 마지막단계인 흑산―대호산 저격전에서 89퇀 1영은 101고지를 쟁탈하는 관건적인 전투에서 아군 28사의 전우들과 함께 고지를 쟁탈하고 끝까지 지켜냄으로써 흑산저격전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흑산저격전이 끝난 후 89퇀은 제4야전군 47군 141사 422퇀으로 개칭되였고 관내로 진출하여 평진전역에 참가하고 장강을 뛰여넘어 곧추 중경까지 쳐들어갔고 그 후 호남 서부의 산악지대를 주름 잡으며 ‘동북범’의 본때를 보여주면서 토비를 족쳤다.

훈춘에 파견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1개 중대는 1개 퇀으로 편제를 확대 발전시켰다. 그리고 5지대의 성원들을 골간으로 조직된 포병대대도 그 후 포병퇀으로 확대되여 제4야전군 포병부대의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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