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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79)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4-15 14:07:52 ] 클릭: [ ]

동북근거지 창설의 크나큰 장애와 우환 제거

4,000여명 토비 숙청 대량의 군수물자 로획

우환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패망한 후 동북의 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국민당은 항전승리의 과실을 빼앗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륙, 해, 공 3로로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하는 한편 일본군과 괴로군 패잔병, 경찰, 헌병, 특무, 일제의 앞잡이들과 토비들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진공하는 이른바 ‘지하군’, ‘선견군’, ‘정진군’을 편성하였다. 동북 경내에는 갈래가 복잡한 정치토비가 무려 9만여명이나 있었는데 이들은 동북에서의 국민당의 사회적 기초가 되여 국민당의 조종 밑에 도처에서 살판치면서 공산당과 민주정권을 뒤엎고 교통을 파괴하고 인민들의 재물을 로략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정권을 적대시하면서 때만 오기를 기다리는 일만 잔여세력을 철저히 숙청해버리지 않는다면 농민대중을 폭넓게 발동할 수 없을 것이고 근거지의 안정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국민당이 대거 진공해오면 정면과 배후의 량면협공을 받는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될 것이였다. 때문에 일만 잔여세력과 정치토비는 튼튼한 동북근거지를 창설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장애와 우환이였다. 이리하여 동북에서는 ‘근거지를 건설하며 토비숙청을 다그치자’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따라 1945년 겨울부터 기세 드높은 토비숙청투쟁을 벌리였다.

 
로흑산 일대의 토비숙청 기념촬영

연변에서의 토비숙청은 전 동북적으로 제일 먼저 시작되였다. 중공연변지방위원회와 연변군분구에서는 동북국의 지시와 ‘군대를 건설하는 한편 토비를 숙청하자’는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 정신에 좇아 군분구 사령원 강신태와 정치위원 옹문도가 몸소 책임지고 토비를 숙청하기로 결정하였다. 토비숙청에 동원된 병력은 군분구의 경비부대와 각 현 보안퇀 및 조선의용군 제5지대였는데 병력은 만 1,000여명, 절대다수가 조선족들이였다.

삼도만을 두번 치다

1941년 가을, 연길현 삼도만 평강촌에는 지방인민정권 수립을 반대하는 한무리의 토비들이 있었다. 위만 퇴역 기병소좌 진보흥을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이였다. 이 자들은 지방인민정권을 반대하면서 백성들을 략탈하고 유린했다. 전보흥은 위만 군사부 삼도만 평강촌림대 부대장이였는데 해방 후에도 계속 반동립장을 견지하면서 원 촌림대의 무기와 병마를 긁어모아 토비대를 세웠다. 전보흥은 인민정권이 나날이 발전, 공고화되는 것을 보고 한때 명월구경비퇀의 개편을 접수하였으나 다시 배반을 시도하였다. 하여 경비퇀 영장 손장상이 가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외면하면서 같이 간 30여명의 무장인원을 억류하였고 두번째로 권유하러 간 팔도구민주대동맹 위원장 최성학 등도 억류하였다. 경비퇀에서는 몇번이나 서신으로 억류된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으나 전보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완강하게 대항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경비퇀 퇀장 남창수가 2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평강촌을 포위하였다. 토비들은 통제고지를 차지하고 포대에 숨거나 토성 화구에 매복하면서 아군의 진공에 맞섰다. 아군은 진지를 리용하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서 전투를 벌리였다. 결과 2시간 남짓이 격전을 벌이였지만 적을 무찌를 수가 없었다. 도리여 40여명 전사자를 냈을 뿐이였다. 이렇게 하여 제1차 평강촌 포위토벌은 실패하고 말았다.

1946년 1월, 연변경비 제1퇀과 제3퇀이 련합하여 두번째로 삼도만 토비를 포위 토벌하였다. 1퇀은 직접 삼도만을 공격하고 3퇀은 삼도만 서북쪽에 있는 인삼장 부근에서 퇴로를 막았다.

1월 27일 새벽, 드디여 전투가 벌어졌다. 자지러진 총소리 속에서 아군의 땅크가 토성 대문을 들이밀자 대문은 부서져버렸다. 이에 당황망조한 토비들은 북산 길로 하여 평강으로 도망쳤다. 토비두목 전보흥과 오건은 도망 직전에 억류하고 있던 팔도구인민민주동맹 위원장 최성학, 명월구수비영 영장 손장상 등 9명을 삼도만 평강촌 북쪽 오품엽자 골짜기에서 살해하는 ‘오품엽자구참안’을 빚어냈다.

곽영춘의 토비무리를 격멸

송하평탄광은 일명 ‘만탄’이라고도 불리웠는데 화룡 시가지에서 2.5키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있다. ‘9.18’ 사변 후 일본이 ‘만주탄광주식회사’를 운영하였는데 수천명의 중국인 광부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압박과 착취를 당했으며 무고하게 목숨을 앗기였다.

곽영춘은 탄광의 경찰이였는데 후에는 로동자들을 때려죽이고도 눈 한번 깜박하지 않은 십장으로 되였다. 1945년 9월, 송하평탄광 ‘보안대’ 두목 자리를 차지한 곽영춘은 인차 안도의 선병준, 오도양차의 단수림과 결탁하였다. 그는 100여명 병사에 보총 100여자루, 기관총 2정을 가지고 있었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이 대오를 개조해보려고 했다. 현당위 서기 운청, 현보안퇀 부정위 장보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송하평에 가 귀순할 것을 권고하였다. 2개월 남짓이 공작한 결과 곽영춘은 자신의 대오를 동북인민자치군 화룡보안퇀 독립영으로 재편성하고 영장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귀순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군대가 기세 사납게 장춘과 길림을 공략하자 그는 선병준, 단수림과 반변을 밀모하면서 공산당을 반대하고 장개석을 옹호해나섰다.

곽영춘은 사람을 보내여 길림에 가서 국민당의 위임장을 얻어온 후에는 위장을 벗어버리고 공공연히 공산당을 원쑤로 대했다. 그는 무장대오를 거느리로 화룡 시가지에까지 와서 시위하였고 기관총을 들고 현정부에 들어가 식량과 돈을 내라고 강박하였다. 그는 또 퇀광 주위에 방어공사를 설치하고 초소를 증설하면서 “화룡거리를 밀어버리고 공산당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떠들어댔다.

1945년 12월 24일, 룡정의 보안 제4퇀과 쏘련 홍군 20여명이 지원하러 왔다. 25일, 화룡의 보안 제6퇀에서는 날자를 정하고 곽영춘에게 련장 이상 간부를 데리고 회의하러 오라고 명령했다. 곽영춘이 정한 날자에 오지 않으니 제4퇀과 제6퇀은 쏘련군과 함께 탄광으로 출발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곽영춘은 한창 술판을 버리고 질탕 먹고 마시고 있었다. 아군이 초소를 지나 곧바로 영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자 곽영춘 등은 술좌석에서 뛰여나와 저항하였다. 총소리는 송하평 하늘가에 자지러지게 울려퍼졌다. 적들의 저항은 완강하여 좀체로 누구러들려 하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전투는 2시간 나마 끌어 3시경에야 끝났는데 적 43명이 격살되고 48명이 생포되였다. 곽영춘과 나머지 놈들은 포위를 돌파하고 안도로 도망쳤다. 아군은 곽영춘의 집에서 국민당 퇀장 위임장을 사출해냈다.

1952년 곽영춘은 화전현에서 체포된 후 처형되였다.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격멸

오도양차는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었다. 1945년 8월 하순, 위만경찰 경위 로진이 여기에 ‘보안대’를 세웠다. 그 해 11월초에 ‘보안대’를 ‘안도현공안대대 고동하 3중대’로 고치고 단수림이 중대장으로 되였는데 병력은 100명 좌우였다. 단수림은 안도현 반동두목 선병준의 문객이였다. 단수림은 화룡현을 누비면서 살인, 략탈, 강간을 일삼았으며 때로는 교통을 차단하고 우리 군을 매복 습격하였다. 곽영춘의 무리가 소멸된 후 단수림은 더욱 기고만장해 미쳐날뛰였다.

1946년 음력설 직전에 화룡현보안 제6퇀 퇀장 박근식은 일부분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룡현과 안도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오도양차에 둥지를 틀고 있는 단수림의 토비무리를 공격했으나 2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적 11명을 소멸했을 뿐 토비소굴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에 3월 15일, 연변군분구 부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제6퇀과 제8퇀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였다.

단수림이 거점을 잡고 있는 마을은 2메터 높이의 담장과 화점으로 둘러쌓여있었고 경비가 삼엄하였다. 마을 뒤산에는 또치까까지 높이 솟아있었고 마을 안에는 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주밀한 정찰을 거친 후 구회괴는 제8퇀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마을을 진격해 들어가고 제6퇀은 서북산의 또치까를 치고 포병련은 마을 동남에 있는 산의 진지를 차지하고 기회를 엿보아 싸움을 돕기로 하였다.

전투는 아침 7시경에 시작되였다. 적들은 마을 안팎의 방어공사에 의지하여 밀집 화력으로 아군의 진공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면적인 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후 3시까지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이 때 제6퇀은 서북산 또치까에서 가까운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또치까에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적들은 차츰 기가 죽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치까가 파괴되고 적의 화력이 갑자기 즘즉해졌다.

구회괴는 단신으로 동남쪽 담벽을 넘어들어갔다. 전사들도 잇달아 구회괴의 뒤를 따라 담을 넘어들어가 단숨에 전 촌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또치까를 탈취하였다. 마을의 적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빠져나가 안도 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80여명을 소멸하고 총 40여자루를 로획했다.

필서문의 끝장

필서문은 두번 혁명대오에 기여들었다가 두번 변절하여 적에게 항복한 자이다. 필서문은 하북성 사람으로서 안도현 처창즈에 와서 토비질을 하다가 1932년 항일대오에 기여들어 구입원, 유격대 중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퇀 퇀장, 군부 부관장 등 직무를 맡았다. 후에 일본 헌병대 나가지마공작반에 투항하여 대전자특수반에 편입되였고 항일군민을 해치였다. 항일전쟁은 승리하였으나 안도현 소재지가 아직 해방되지 못하고 있을 때 필서문은 선병준에게 빌붙어 치안유지회의 반동무장공안대를 조직하고 제4중대 중대장을 담당하였으며 우리 경비부대가 안도를 해방하는 것을 여러번 저애했다.

1946년 3월, 연변경비부대가 선병준 비적을 치고 안도를 해방할 때 필서문은 대오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4중대는 길동군구 보안 제3퇀 제1영 제4련으로 재편성되였다. 필서문은 또다시 혁명대오에 기여들어온 후 적극성을 보이면서 공산당을 옹호한다고 표시하였다. 필서문은 1946년 4월에 현대대장이 되기까지 했다.

대대장이 된 후 반동 본성이 재발한 필서문은 반란을 일으킬 꿍꿍이를 하였다. 5월 19일, 제1영 제4련이 명령을 받고 훈춘으로 갔을 때 필서문은 심복을 보내여 제4련의 사무장 조개선, 패장 곡화림 등과 반란을 밀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련의 많은 사병들이 6월 13일 밤에 도망쳐버렸다. 필서문은 또 여러번 사람을 림강, 돈화 등지에 보내여 토비들을 긁어모으고 무기를 수집하게 하였다.

중공안도현위 서기 겸 현대대 정치위원 박덕흠은 필서문의 음모활동을 료해한 후 길동군구에 보고하였다. 군구에서는 보안 제3퇀이 제1련의 무기를 해제하도록 결정하였다.

제1련은 지도원을 내놓고는 다 필서문의 심복들이며 반란의 주력이였다. 군구에서 파견한 선견부대 리자상 영장이 거느리는 제2영이 6월 29일, 안도에 도착하였다. 현위에서는 즉시 전화로 대전자에 있는 필서문에게 현에 돌아와 회의에 참가하라고 통지하였다. 교활한 필서문은 요긴한 일이 있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에 문득 현에 와서 방정위를 찾았다. 그는 낌새를 노리다가 현장의 첩이 죽어서 조문을 간다면서 자리를 떠버렸다.

간부들이 현대대부에서 행동계획을 짜고 있는데 필서문이 또 대대부에 갑자기 뛰여들었다. 이 때 리자상이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체포하였다. 그를 제1련에 압송하여 심복들더러 무장을 내놓도록 명령하게 했으나 심복들의 완고한 저항을 받아 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에서 필서문은 다리를 상했으나 혼란한 틈을 타서 담을 넘은 후 도망치고 그외의 비적들은 격살되였거나 포로되였다.

장백산 밀림으로 달아난 필서문은 다시 120여명의 비적을 긁어모아가지고 9월에 길림에 가서 장백군에 투항하여 제1퇀 제3영 소좌 영장으로 되였다. 1948년 해방군이 길림을 포위하였다. 길림성군구 사령원 주보중, 길림시경비구 사령원 구회괴가 친히 쓴 명령을 필서문에게 보내여 투항할 것을 권고했으나 필서문은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해방군에 포로되였고 1949년 3월 안도현에서 처단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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