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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80]제78장 동만에서의 토비숙청투쟁(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4-22 15:32:14 ] 클릭: [ ]

동북근거지 창설의 크나큰 장애와 우환 제거

4,000여명 토비 숙청 대량의 군수물자 로획

토비를 치고 안도를 해방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 후 연변의 대부분 지구는 해방되였으나 안도현에서는 1945년 8월 20일, ‘림시유지회’를 내오고 후에는 또 괴뢰림시현정부를 내왔다. 대악질지주 선병준 삼형제가 조직한 무장은 이 정권의 기둥이였다. 그들은 이도백하, 송강, 량강구, 만보 등 교통요지를 지키면서 우리 군의 안도 해방을 극력 저지하려 시도하면서 국민당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946년 3월, 동북민주련군은 안도현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한갈래는 남만의 양정우지대 즉 료남독립 제2사 제3퇀과 제1퇀(1개 영) 그리고 리홍광지대 한개 패로서 이도백하를 치기로 하였으며 다른 한갈래는 길동군분구 부사령 구회괴가 길동군분구 경비려 2개 퇀을 거느리고 화룡을 거쳐 오도양차와 대전자를 치기로 하였다.

오도양차에는 한개 대대의 토비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3월 6일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전투는 오후 4시경에 끝났다. 이리하여 안도를 해방하는 돌파구가 생기게 되였다. 3월 8일 밤, 부대는 대전자에서 15키로메터가량 떨어진 십기가 서남툰 일대에 주둔하면서 적정을 분석한 후 투항을 권고하기로 하였다. 이튿날 구회괴 부사령원이 직접 적의 주둔지에 가서 담판했다. 적들은 하는 수 없이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총 한방 쏘지 않고 대전자를 해방했다.

이도백하에서는 선병준의 한개 중대가 지키고 있었다. 대장 강승무는 완고분자로서 투항을 거부하였다. 남만부대와 동만부대는 이도백하에 집결하여 남북에서 협공할 태세를 취하였다. 3월 16일 점심때 공세를 발동하여 12시간의 격전을 벌려 비적을 전부 섬멸하고 그길로 안도현소재지 송강진으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선씨의 지주무장을 전부 소멸하고 림시현정부도 뒤엎었다.

3월 18일, 제1임 현장 주유숭이 해방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안도현인민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마희산 비적집단의 괴멸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대오를 40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이 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 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 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 동북정진군 제1련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였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였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은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였다.

마희산 비적단은 구성된 그 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질렀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 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 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 해 3월에 마희산 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사람을 쏴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략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페), 입쌀 16만 3,500키로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마리, 이부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략탈해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하에 마희산 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 주력부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려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 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 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 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 후 그 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에 녕안에서 총살 당했다.

왕경운 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 경찰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락후한 군중 40여명을 롱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을 맡았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 해 10월 15일, 일본 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 지하건군 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 자들을 긁어모으고 청년들을 롱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제1퇀, 묘령에 제2퇀, 대흥구에 제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으로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장에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 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제1영은 묘령에, 제2영은 계관라즈에, 제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 등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1948년 8월, 토비 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략탈하다가 김태길 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략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 군도로 찔러 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제1영, 제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제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되여 처형 당했다.

안진유 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헌주, 위만 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라자구 일대에서600여명을 긁어모아 자위대를 조직한 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였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 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 건군조직에서 련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 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여 토비들이 미처 손 쓸 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외에 나머지는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 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제1영은 미처 막을 사이 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소영장은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포로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민족을 죽였고 조선민족 녀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민족의 재산을 략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 64명 조선민족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민족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 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 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 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 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부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입혔다. 류방무는 토지개혁 때 붙잡혀 총살 당했다.

돈화의 토비숙청투쟁

일본이 무조건투항한 후 쏘련군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제때에 일본군을 집중시키지 않아 흩어진 패잔병들이 돈화의 산야에 숨어 늘 부근의 마을을 습격하였다. 이에 군중들은 무기를 들고 자위하기 시작했다. 한달 남짓한 사이에 이런 대오가 각지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 때 지주, 위만 관리와 경찰, 자위단 및 오랜 비적들은 갖은 애를 써서 이런 대오의 령도권을 탈취하였다. 그들로는 액목의 리충옥, 성서의 당옥, 대석두의 리옥보, 따푸차이허의 장영춘, 관지의 장진호, 태평령의 등진상, 삽어하의 주흥복, 남황니허의 왕대법사 등이였다. 이 자들은 오로지 국민당을 동경하고 있었고 무장을 쥐자 극력 세력을 늘이였다.

1945년 8월 19일, 동북항일련군 소분대 리문장 등이 쏘련군과 함께 돈화에 왔고 얼마 후에 또 류건평이 왔다. 9월초, 류건평을 사령으로 하는 돈화현보안사령부가 건립되자 자연발생적인 무장대오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1월, 양상규 등 연안간부들이 와서 중공돈화현위와 현림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공산당원이 현장이 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 위만군 소좌군의 출신인 류화일이 현장으로 되였다. 그는 국민당 돈화현당부의 려명과 언녕부터 배짝이 맞아 들락날락하는 자였다. 그는 수하에 수백명의 공안대를 두고 보안대와 엇섰다.

보안사령부는 먼저 교도대를 조직하고 4개 향의 8개 대대를 받아들여 재편성, 간부를 파견하였다. 국민당은 각종 수단으로 이런 지방무장을 끌어당기며 보안사령부에서 재편성하여 임명한 대대장을 국민당의 상좌 퇀장으로 위임하였다.

11월 하순부터 류화일은 공개적으로 국민당 간판을 내걸었고 향의 대대들을 국민당에 기울어지게 하였으며 항일련군 간부였던 리문장을 따푸차이허에서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양상규는 미리 기미를 알고 관지를 떠났기에 살해 당하지 않았다.

돈화 주둔 쏘련홍군사령부에서는 중공돈화현위에 즉시 현소재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현위는 교도대대와 함께 현소재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는데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겨우 륙과송까지 왔다. 때마침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연길 방면으로 가는 도중에 돈화를 지나다가 양상규를 만나 돈화의 정황을 듣고 그들을 반격하기로 하였다. 하여 교도대대와 부근의 조선민족들로 구성된 두개 중대가 합쳐 800여명 병력으로 돈화로 쳐들어갔다.

5지대의 지원을 받아 요충지를 점령한 리공발이 류화일을 사로잡고 무장해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길가에서 류화일이 마차를 타고 온다는 정보를 장악한 리공발은 마차를 가로막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류화일의 호위병 서규영 등이 무장해제를 거절하면서 보안사령부 전사 2명을 쏘아죽이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리공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하면서 마차에 뛰여올라 류화일을 끌어내리고 호위병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보안사령부에서는 뒤이어 쏘련 홍군의 지지하에 류화일이 통제한 공안대대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고 돈화림시정부의 대권을 탈취하였다. 그러나 4개 향은 여전히 토비가 통제하고 있었다.

1946년 2월, 동북민주련군에서 파견한 등극명려가 돈화 경내에 왔다. 부대의 선견대가 서관툰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토비의 습격을 받았다. 격전 끝에 토비를 물리치고 진지를 점령하였다. 나흘 후 대황툰에서 토비를 타승하고 마을을 점령하였다. 아군은 정치적 공세를 들이대여 따푸차이허의 장영춘, 홍석의 석덕진 등을 항복시켰다. 기타 토비들은 혼란에 빠져 장춘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후에 장춘에서 전부 소멸되고 돈화의 잔여 비적들은 산속으로 도망쳤으나 선전교양을 거쳐 대부분이 항복하였고 완고분자들만이 포로되였거나 진압 당하였다.

이리하여 1945년 겨울부터 시작한 토비숙청투쟁은 1946년 7월에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이번 투쟁을 통하여 동만근거지 건설의 우환을 제거하고 항일전쟁의 승리를 보호하였다. 이번 토비숙청에서 아군은 토비 4,000여명을 소멸하고 각종 포 24문, 경중 기관총 76정을 포함한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로획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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