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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52] 김학철과 그의 《격정시대》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03 11:35:51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52](김학철 편-1)

저희 특별기획프로에서는 오늘부터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이며 항일문학의 거장, 조선족문단의 ‘로신’이라 일컫는 고 김학철선생의 파란만장한 전기적 인생을 되돌아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김학철선생은 젊은 시절 나라를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반도에서 중국 상해로 건너와 지하반일테러활동을 벌렸으며 중국의 항일최전선에서 반파쑈전쟁의   첨병으로, 공산주의혁명가로, 국제주의전사로 성장하였습니다.그는 중국, 조선, 일본 등 나라를 전전하면서 진리를 향한 굳은 신념과 강철같은 의지로 전투적이며 전기적인 인생드라마를 엮었습니다.

“김학철 작가의 문학세계를 알려면 그의 전투적 인생부터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김학철선생의 아들 김해양선생의 구술을 통해 김학철의 문학과 인생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학철 프로필

김학철(金学铁 1916년-2001년) 본명 홍성걸(洪性杰) 조선 원산 출생

1935년 중국 상해로 건너와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지하 반일테러활동에 종사

1937년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입학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으로, 후날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 활약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 지하당조직에 가입

1941년 12월 태항산 대일 호가장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됨

1942년 일본 나가사끼형무소에서 10년 형으로 수감됨

1945년 2월 일본 투항 반년 앞두고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고 10월 석방

1951년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정령의 휘하에 연구원으로 창작활동, 정령과 평생 우정을 쌓음

1952년 주덕해 초청으로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주임 력임, 연변에 정착

1966년-1977년 문화혁명 10년동안 정치범으로 옥살이

1980년 12월 복권, 65세로 창작활동 재개

1985년 11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으로 당선

1994년 한국 KBS 해외동포상 수상

주요작품

1940년대 단편소설 《지네》,《아아 호가장》, 《담배국》 등 10여편의 단편소설 서울에서 발표

1950년대 중편소설 《범람》, 단편소설집 《군공메달》, 단편소설집 《새집 드는 날》 등 출판

로신의《아Q정전》, 《풍파》, 정령의《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등 최초로 중국에서 조선어로 번역출판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 출판

1980년대부터 전기문학 《항전별곡》, 《김학철단편소설집》, 장편소설《격정시대》, 《20세기 신화》, 산문집 《태항산록》, 《무명소졸》, 《사또님의 말씀이야 늘 옳습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산문집 《나의 길》 등 출판

젊은 시절의 김학철

김학철의 문학에 관해서는 그 본인의 저서도 전집으로 이미 12권 나왔고 또 김학철문학에 관한 평론집도 8권이나 출판 되였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 자리에서 김학철의 문학에 대해 각도를 달리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학철의 대표작 《격정시대》와 같은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그 배경은 어떠하며 그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하는 식으로 될수록 쉽고 재미있게 얘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김학철의 문학창작에서 세계관의 변화와 그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세계관의 흐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김학철의 삶의 려정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원산, 서울, 중국의 북경, 상해 또 일본의 나가사끼를 통해 다시 서울-평양-북경-연길 이렇게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인생무대가 펼쳐집니다.

태항산의 호가장전투기념비

김학철의 대표작 《격정시대》는 사실 항일전쟁시기 우리 민족의 첫 정규화 항일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와 그 전신인 의렬단의 진실한 모습을 다룬 장편소설입니다. 그럼 이 소설이 어떻게 탄생되였는가? 그 배경에 대해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학철은 왜 《격정시대》를 창작하려 했을까요? “나의 전우들은 이미 떠나가고 그들의 업적이 잊혀지기 전에 내가 써 놓아야 후세에 전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력사적 의무감을 짊어지고 창작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시다 싶이 태항산은 중국항일전쟁의 상징입니다. 북경 서편에서 쭉 남으로 흐르는 중국의 중심지에 태항산맥이 있는데 이 태항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호가장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치열하게 진행된 대일 전투가 바로 호가장전투입니다.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은 대부분 호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였습니다. 이 마을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호가장전적지에 세워진 항일렬사기념비와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기념비

마을입구의 태항산자락에는 높다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정부가 세운 호가장전투기념비입니다. 그 량켠에는 또한 기발모양의 두 항일문학비가 있는데 한켠에는 김학철항일문학비가, 다른 한켠에는 김사량항일문학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지역의 항일투쟁을 기념하고 또한 항일문학을 기리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럼 왜 현지사람들은 호가장전투를 잊지 않고 기념비를 세워 많은 사람들을 추모할가요? 사실 항일전쟁시기에도 연안의 소학교 교과서에 호가장전투에 관한 문장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북성 소학교 교과서에는 호가장전투와 조선의용대에 관한 사적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기념관도 설치되여 있습니다.

우리 조선의용대는 줄곧 태항산일대 최전선에서 대일무장선전을 위주로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호가장마을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새벽에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며 일본군의 포위공격이 시작되였습니다. 마을의 한 친일파가 일본군한테 가서 밀고를 한 것이였어요. “지금 조선의용대가 호가장에 주둔하고 있는데 수자가 많지 않으니 얼마든지 섬멸할 수 있다.”고 정보를 제공했어요.

워낙 일본군은 조선의용대를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전투수법을 보면 한 밤중에 적들의 진지에 바짝 다가가 수류탄을 하나 터치웁니다. 그러면 그 고요한 밤에 잠들었던 일본군들이 다 깨여나지요. 이때면 우리 전사들은 일본군한테 직접 일본말로 무장선전을 합니다. "일본군 전사들이여, 당신들은 일본파쑈들에게 속히워 전쟁에 참가했으니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어서 돌아가세요."라고 하면서 적군을 감화시키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또 의용대전사로 된 일본군 녀성포로들이 일본인들이 가장 즐기는 《황성의 달밤》과 같은 일본 민요를 부르지요. 그러면 일본병사들은 너무 슬퍼 많이 울었다고 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후에 잡혀온 일본병사들이 자기들이 고향노래를 듣고 모두 울었다고 실토를 한 것이였어요. 이렇게 군기가 와해되고 정신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니 일본군관들은 조선의용대를 가장 싫어하고 미워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날 밤, 일본군 100여명이 박격포 등 중무장을 하고 원씨현을 출발하여 태항산자락으로부터 호가장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날 밝기를 기다려 푸름한 새벽이 되자 습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의용대는 평소 잘 때 보통 보초를 세우는데 보초도 그날 피곤하여 잠이 들었던 것이였어요. 갑자기 새벽에 총소리가 울리자 전사들은 서둘러 머리맡에 순서대로 놓아두었던 총이며 수류탄을 더듬어 챙겨 들고 뛰쳐나갔습니다.

그날 따라 새벽안개가 자욱하여 적아가 서로 상대방을 볼 수 없었어요. 우리 의용대원들이 팔로군 부대가 있는 건너편 마을 쪽으로 탈출해 나가면 되는데 그러자면 마을을 지나가야 하고 또 마을 촌민들이 피해를 많이 입게 되지요. 하여 북쪽외각 산등성이 비탈로 탈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서 상대편 일본군이 어느 부대냐고 물어왔어요. 우리 의용대원들은 능숙한 일본어로 의용대가 지금 저 아래쪽으로 도망쳐 내려 갔으니 그들을 추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호가장전투에 대해 몇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제 일처럼 들려주는 마을 로인들

한참 아래 쪽으로 내려가던 일본군은 급기야 속은 줄 알고 방향을 돌려 다시 위쪽으로 추격해왔어요. 적들이 바짝 따라붙으니 부대 전체가 적들과 맞서 싸우면 전부 희생되기에 몇 사람만 남아 일본군과 저항전을 펼치며 다수 전우들을 엄호하기로 했지요. 이렇게 남은 여섯 사람 중에 김학철도 포함되여 있었습니다. 이들 남은 전사들은 부대가 탈출할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하게 혈투를 벌렸습니다.

끝내 그 중 네 전사는 현장에서 총탄을 맞고 영용하게 희생되였습니다. 그리고 한 분은 팔에 총상을 맞고 탈출을 했으며 김학철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학철은 당시 다리를 야구방망이로 되게 맞은 느낌이었답니다. 그리고 깨여나 보니 일본군의 담가에 들려 끌려가고 있었는데 담가에서 굴러 떨어졌더니 일본군은 다시 단단히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일본군 사령부로 끌어갔습니다.

당시 옆 마을에 주둔한 팔로군부대 전사들은 총소리를 듣고 호가장 쪽으로 조선의용대를 구원하러 왔는데 그 번 전투에서 12명의 팔로군 전사가 희생되였습니다.

그 당시 호가장 마을 농민들이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 실례들이 지금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요. 평소에 우리 의용대 대원들이 농민들의 민가에 들어 주숙을 하는데 집이 좁으니 마당에 멍석 같은 것을 깔고 자군 하였지요.

100리밖 팔로군근거지에 안전하게 매장된 4명의 조선의용대 전사자들의 무덤

그런데 한 밤중에 몸이 따뜻해 나서 일어나 보면 농민들이 자기들이 덮던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는 것이었어요. 사실 농민들도 가난해서 이불이 한 채씩 밖에 없었지요. 그러면 의용대들은 또 살그머니 일어나 그 이불을 가져다 농민들에게 덮어주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밤중에 서로 이불이 오고 가는 모습이 의용대 대원들과 현지 농민들 사이의 따스한 정이였습니다.

농민들은 당시 조선의용대를 두고 외국인들이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일본군과 싸우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돌봐 주겠는가 하면서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습니다.

당시 호가장은 팔로군 점령구와 일본군 점령구 사이의 경계에 있었어요. 그리하여 밀물과 썰물처럼 때로는 팔로군이 들어오고 때로는 일본군이 들어오고 하였지요. 그래서 마을 농민들은 우리 의용대 네 전사자 시신을 그대로 놔두면 일본군이 와서 시신을 훼손할 것이 우려 되여 10여명 호가장 농민들이 의용대 네 전사의 시신을 담가에 메고 100리 밖 팔로군 근거지로 떠났습니다.

희생된 전사들을 추모하는 조선의용대 대원들

대통로는 일본군이 지키기에 갈 수 없으니 시신을 엇바꿔 메면서 산길을 타서 팔로군의 후방인 짠황(황북평)이라는 곳에 가져다 안전하게 묻었습니다. 하여 네명의 전사자는 호가장에서 희생되였지만 호가장에 묻히지 않고 지금도 백리 밖 짠황에 묻혀있는 것입니다. 현지 농민들은 의용대원을 이렇게 사랑하였고 의용대 대원들은 또 그들 농민들을 위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지요. 이렇게 피로써 맺어진 우정이 있기에 우리 의용대가 살아남을 수 있고 또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은 것이지요. 그런 힘이 바로 이런 우정에서 나온 것이였습니다.

후날 제가 호가장 마을을 찾아갔는데 당시 네 전사자의 시신을 메고 100리 산길을 다녀오신 10명 농민 중 한 분이 살아 계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너무 감격스러운 만남이였습니다. 그곳 농민들도 김학철의 아들이 왔다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었어요.

현지 정부에서는 당시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네 전사자와 팔로군 12명 전사자를 기리여 호가장 전적지 산마루에 멋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기념비 뒤면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당시 전투정황을 소개한 비문을 새겨 넣었어요. 오늘 그곳은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되여 많은 청소년 학생들과 외국의 벗들도 찾아오고 있습니다.

조선의용대 주숙지인 호가장마을 민가를 찾은 외국의 력사탐방팀

그 당시에 전사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추모하는 추도식이 있었는데 그 추도식에서 김학철이 작사한 조선의용대추도가를 불렀어요. 당시 이 추도가는 의용대에서 널리 불러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십년 후에 호가장으로 찾아갔을 때 너무나 감격적인 것은 그 세월을 넘어 호가장소학교 어린이들이 선생님의 지도아래 우리 말로 의용대추도가를 불러 주는 것이였습니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 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작곡가는 룡정 출신의 류신이라는 김학철의 전우였습니다.

호가장전투기념비 량켠에는 또 김학철항일문학비와 김사량항일문학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작가 김사량은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그의 소설 《노마만리》에 호가장전투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김학철과 김사량은 후날 평양에서 깊은 친분을 맺고 지냈는데 김사량이 당시 김학철한테 전선에 나가 취재를 할 수 있게 해달라 부탁을 했지요. 하여 김학철은 황포동창생 사령관들에게 말하여 그의 전선취재를 허락 받았어요. 그런데 김사량이 전장에서 희생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 일로 하여 김학철은 늘 후회를 했습니다.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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