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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53]포로된 조선의용대 분대장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2 12:08:35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3](김학철편2)

포로된 조선의용대 분대장

사실 그 당시 희생된 줄 알았던 김학철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포로되여 석가장에 있는 일본군헌병사령부로 끌려갔습니다. 그 사령부 건물은 지금도 완벽하게 원 상태로 보존되여 있는데 하북성 성급문화유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여 있습니다.

김학철이 총을 맞고 끌려간 석가장 일본헌병대 사령부 옛터를 찾은 김학철의 아들 김해양.

김학철은 헌병대사령부 2층 건물 끝방에 수감되였습니다. 당연히 여러가지 취조를 받았지요. 총상을 맞은 다리는 끈으로 매여 지혈은 시켰지만 치료는 못 받았어요. 본인도 그때 파산풍에 걸리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운이 따른 것이였지요.

한시기의 취조가 끝난 후 김학철은 한울안에 있는 일본령사관구치소에 몇달간 갇혀 있었습니다. 하루는 감방 바깥 철문이 철커덕 열리면서 헌병들이 새 포로를 끌고 들어왔어요. 끌려 온 사람을 보고 김학철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바로 전우 마덕산이였습니다. 끌려 들어오던 마덕산이는 또 복도 량쪽 감방을 둘러보다가 한 뙤창속에서 김학철의 얼굴을 발견하고 너무도 기뻤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김학철이가 여기에 버젓이 살아 있으니 너무 반가운 것이였지요. 김학철은 또 어쩌면 너까지 여기에 잡혀오게 되였는가 하면서 서로가 놀랍게 상봉하게 된 것이였지요.

석가장 일본령사관 건물.

마덕산이도 일본헌병들에게 잡혀와 취조부터 받게 되였어요. 김학철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워다 보니 일본인들과 똑같이 일어를 했는데 마덕산이는 일본어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대화는 못하는 편이였습니다. 하여 일본헌병은 마덕산이를 취조하다가 소통이 잘 안되니 문밖에 대기하고있는 일본군 번역을 불러들이며 말하였습니다.

“너희 조선청년들 속에도 훌륭한 사람이 있다. 헌데 너는 왜 일본국민으로서 일본을 반대하는 군대에 참가하여 싸우고 있느냐?!”

마덕산이는 일본군복차림을 하고 감방으로 들어오는 청년군관을 보고 기절할 지경으로 놀랐지요. 그놈이 어쩌면 의용대에 함께 있던 전우 유빈이였던 것이였어요.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 이놈이 고발하여 내가 잡혀왔구나!) 드디여 깨달은 것이지요.

마덕산이는 워낙 조선의용대 새 대원을 모집하러 북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부대는 항상 희생으로 손실이 생기기에 새 부대원을 모집하여 확충해야 하였어요. 조선의용대는 대다수 조선청년들로 구성되기에 마덕산은 북경으로 조선청년을 모집하러 온 것입니다. 이것을 안 유빈이가 일본헌병사령부에 알려 북경에서 마덕산이를 체포한 것이였지요.

석가장 일본령사관 건물 안내도.

일본군관으로서 조선의용대에 잠입하여 마덕산이를 고발한 유빈은 취조과정에 마덕산이를 극력 군사정탐으로 몰아가면서 마덕산이한테 불리하게 번역을 하였습니다. 당시 군법으로는 신병모집은 몇해 옥살이로 끝나지만 일본군사시설을 정탐하였다면 총살인 것이였어요.

(오, 이놈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유빈이가 일본군 군관이고 스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마덕산이 밖에 없으니 마덕산이를 살려두면 유빈이가 속 편할리가 없지요. 그래서 유빈이는 마덕산이를 기어코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였습니다.

취조를 받던 마덕산이는 격분한 나머지 옆에 있는 재떨이를 들어 유빈의 머리를 쳤어요. 유빈이는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고 취조는 중단되였지요. 그리고 며칠 후의 어느 날 아침 헌병들이 와서 마덕산이 갇혀 있는 감방의 철문을 철커덕 열고 마덕산이를 끌고 나갔습니다. 김학철이 뙤창으로 내다 보고 있는데 마덕산이가 자기 손에 쥐고 있던 종이 쪽지를 뙤창 안으로 던져 넣는 것이였어요.

“학철아, 원쑤를 갚아다오. 다시는 볼 것 같지 못하구나!” 이것이 마덕산이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였습니다.

그 종이쪽지에는 마덕산이 체포된 원인과 취조과정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김학철이도 유빈이가 첩자임을 알게 됩니다. 당시 마덕산은 체포된 곳인 북경에 다시 끌려가 총살당했습니다. 그때 북경의 일본령사관 구치소에 같이 수감되였던 동지로는 유명한 항일투사 이육사가 있었습니다.

마덕산이 남기고 간 쪽지를 손에 들고 김학철은 얼마나 울었는지 그 쪽지는 눈물에 다 젖고 말았습니다. 소중한 전우를 잃은 슬픔과 원쑤를 갚으려는 념원이 일평생 김학철이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40년 후에 드라마 같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서울에서 광복군과 의용군 출신의 십여명 항일로장들이 김학철환영연회를 가졌어요. 그 모임에는 당시 국방부장을 지낸 분도 있고 하였는데 연회석상에서 여러 사람들이 얘기하는 중에 뜻밖으로 유빈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깜짝 놀란 김학철은 “방금 말한 그 유빈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어요.

“학철동지 의용대에 같이 있었겠는데 왜 유빈이를 모르시오?”

“아니 그럼 그 유빈이는 지금 어디 있소?”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한 것이였어요. 그 천벌을 받아 마땅한 유빈이는 우리가 서울로 가기 전해에 지병으로 죽은 것이였습니다. 유빈은 일본이 망할 무렵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이 망하니까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였어요.

그리고는 자신은 일본감옥에 갇혔다가 풀려 나왔다고 했지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항일투사로 호의호식하면서 잘살다가 죽었던 것이였어요. 이 사건은 김학철이를 너무나 슬프게 하였습니다!

《격정시대》의 국내외 여러 출판사 판본들.

당시 석가장 구치소에 갇혔던 김학철은 원치 않은 일본국민대우를 받아 일본감옥으로 압송되여 가게 되였어요.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조선사람들을 자기 나라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이였어요. 하여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닌 자국 국민이 천황페하를 반대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일본군법에 따라 일본 본국의 감옥에 가서 형살이를 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김학철은 석가장 구치소에서 북경으로, 북경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 나가사끼 감옥으로 가게 되였습니다. 바로 김학철이 항일에 투신하기 위해 서울에서 북경으로 다시 상해로 오던 길을 총 맞은 다리를 끌고 되돌아 가는 셈이였습니다.

당시 북경 정거장은 지금 천안문광장 남쪽에 위치한 챈먼(前门)정거장이였습니다. 현재 북경철도박물관이지요.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두 일본 헌병에게 압송되여 기차에 오르는데 북경시민들은 팔로군 군복 차림의 이 젊은 장교를 경의로운 눈빛으로 바래였습니다. 그것이 김학철에게는 이름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였다고 했습니다.

김학철이를 호송해 가는 두 헌병은 사실 다 순진한 농민들이였어요. 김학철의 반전 선동에 감화된 그들은 북경을 떠날 무렵 김학철의 어머니가 원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만나게 해 주겠다는 것이였어요. 그들은 자기들 돈으로 원산의 김학철 모친께 전보를 쳐 어느 날 몇시 서울역에서 몇번 차바곤에 오르면 아들을 만날 수 있다고 알렸습니다.

하지만 김학철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단정하였지요.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 구석에는 혹시나 하는 한 오리의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렬차가 서울역에 거의 도착하게 되자 김학철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만나보지 못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난 것이였어요.

서울역에 기차가 멎고 렬차문이 열리면서 오르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어쩌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였습니다. 누이동생이 먼저 오빠를 부르면서 좇아오는데 김학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어머니를 맞는 아들이 옷으로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뭔가를 알아챘지요. 다행이 농민헌병 둘이 이들을 자유롭게 얘기하라고 자리를 피해줬어요.

누이동생은 울며 불며 오빠를 안고 흐느끼는데 워낙 성격이 굉장히 강한 어머니는 사랑의 눈빛으로 수년 리별 끝에 만난 아들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습니다.

김학철의 어머니 김상련.

“네가 무슨 뜻으로 이 처지가 되였는지는 모르나 엄마는 너를 믿는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갈 길을 가거라!” 어머니는 눈물 없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였어요. 이것이 김학철에게는 무한한 용기로 되였고 더욱 신념을 다지는 힘이 되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김학철이 당시 도저히 리해할 수 없었던 것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같이 가면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다음 정거장인 수원역에서 내리는 것이였습니다. “아들아, 우리는 너를 끝까지 기다릴테니 꼭 살아서 돌아오거라!” 어머니가 남긴 말씀이였습니다.

그렇게 갈라지면서 김학철은 섭섭하기 그지 없었지요. 그런데 해방 후 일본감옥에서 풀려나와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다시 만났을 때에야 그 리유를 알게 되였어요. 누이동생의 입에서 알게 된 것인데 그 때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차표도 어렵게 돈을 꿔서 사다 보니 도저히 부산까지 동행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였습니다. 이를 알고 김학철은 속으로 어머니를 나무랐던 자신이 더욱 원망스러웠지요.

당시 렬차에서 어머니와 만난 것은 옹근 7년 만이였습니다. 김학철은 조선 원산에서 태여났는데 아버지가 누룩제조업을 하며 근근득식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김학철이 7살나는 해에 아버지는 일찍 세상떴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김학철과 누이동생 둘을 힘들게 길렀던 것이였습니다.

한국 KBS라지오방송 드라마제작진과 함께 있는 김학철 김혜원 부부.

김학철의《격정시대》에는 이러한 뜨거운 용암 같은 얘기가 밑바탕에 흐르니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였어요. 《격정시대》는 80년대 중반에 중국에서 출판된 후 당시 중한외교관계가 건립되지 않았을 때인 1988년에 서울에서 출판되였습니다.

《격정시대》는 조정래의《태백산맥》과 함께 그 당시 한국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 대학과 중학교 교재에 《격정시대》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외 6개 출판사에서 8개 판본으로 출판되였으며 한국 KBS라지오방송에서도 드라마로 각색되여 방송되였습니다.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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