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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기행]백년 전설이 잠든 봉오골을 가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8 10:58:38 ] 클릭: [ ]

답사 첫 출발지 간평촌에서.

금년 6월 7일은 구한말 반일의병의 대표적인 인물인 홍범도(1868-1943)가 반일련합군을 이끌고 교묘한 유인전술로 일본정규군에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중국조선족력사민속동호회의 26명 회원들은 백년전의 전설적인 반일투사들의 력사에 길이 남을 거사와 그들이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봉오동전투 100주년 기념답사”를 조직하였다.

답사는 봉오동전투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삼둔자전투발생지로부터 시작되였다. 최씨, 박씨, 김씨네 가족이 각자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지어진 삼둔자는 당시는 화룡현 경내였지만 지금은 도문시 월청진 간평촌으로 되였다. 중형뻐스로 이곳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 당지부서기 라철룡씨의 해설을 들으면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현재의 마을 동남쪽에 널려 있었다는 삼둔자마을의 위치와 지세를 나름대로 그려보았다.

두번째 역은 유인전의 두번째 매복지점인 봉화리, 현재 일광산릉선에 자리잡은 봉화리는 옛날 봉화대가 있던 자리였고 서남쪽으로부터 달려드는 일본군의 동향을 환히 굽어볼 수 있고 앞으로는 적의 진공을 격퇴시킬 수도 있고 뒤로 재빨리 철퇴할 수도 있는 좋은 위치였다. 봉화리습격전은 1920년 6월 6일 오후에 벌어졌다고 한다.

봉화리

일본군 유인임무를 맡은 소분대의 로정을 따라 답사팀은 회막동과 도문시경내를 지나 안산을 거쳐 곧바로 후안산에 이르렀다. 후안산은 고려령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일본군이 이곳까지 추격해왔을 때는 이튿날인 1920년 6월 7일 새벽 3시 반경, 밥짓는 연기를 따라 소분대의 동향을 찾아냈다고 하는데 이 곳 역시 유인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란다.

푸른 초지를 지나 앞으로 앞으로.

뉘연하게 뻗은 세멘트길을 따라 목도고개를 바라고 답사대의 도보가 시작되고 옛날 유인전이 벌어졌음직한 푸른 초지와 습지를 지나니 멀리 벽해운천이라 이름한 새로 건설하는 관광단지가 맞이한다. 라철룡서기는 이 곳은 수남촌과 연길시의 기업가들이 손잡고 건설하는 관광지로서 음식문화와 홍색관광을 리용한 수남촌의 새 항목대상이라고 소개한다.

목도고개에 올라 땀을 들이고 있는 대원들.

그곳에서 화물트럭을 리용하여 도착한 곳은 고려툰(흥진촌), 남봉오라고도 불리운 이 마을은 유인 소분대가 일본군을 북봉오로 유인해들이는 길목이였다고 한다. 라철룡서기가 안배한 4명의 촌민이 길잡이로 답사대에 합류하고 년장자와 발목부상 등 신체상황으로 장거리 답사를 할 수 없는 몇몇 회원들이 고려툰에 남았다. 촌민들을 따라 뒤산의 갈지자 길을 톺아오르는 답사대원들은 섭씨 28도 고온과 늘차게 이어지는 올리막길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고려툰뒤산을 배경으로.

고려툰 뒤산 등성이에서 우거진 숲을 헤치면서 북봉오골에 내려서니 시계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 줄 알았는데 인제 겨우 정식 답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하촌이라 불리웠던 그 곳은 이미 도문시수원지인 봉오동저수지 북단이였다. 저 멀리 높게 솟은 초모정자산이 봉오골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 작은 골안에 3개 부락이 있었고 인가만 해도 백여호 넘어 있었답니다.”라철룡서기는 오불꼬불 길게 뻗은 흙길을 걸으면서 일본군이 바로 이 로정을 따라 추격했으며 상촌의 삼개골에 도착하여 반일무장부대의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은 점심무렵이였다고 소개한다.

땡볕이지만 가담가담 그늘진 곳도 있어 답사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답사대가 상촌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시경이였다. 무더운 날씨에 지루한 행진으로 대원들은 지치기 일보 직전이였다. 가져간 점심보자기를 풀고 허기진 배를 달래는 데는 반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시절 인가가 많았던 상촌은 봉오골의 중심마을이나 다름없었지요. 수백명의 반일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정미소와 훈련장이 있었지요.” 라철룡서기는 당시 상황을 눈앞에 보는 듯이 소개하여 준다.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나무가 많아 시야가 넓지 못하지만 그때는 백여가구의 인가가 들어서고 부근의 산에서 땔나무를 많이 하였기에 거의 민둥산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일부대가 사면에 포위망을 설치하고 매복권에 든 일본군추격대를 단꺼번에 족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의 백년동안 풀밭에서 굳잠에 빠진 석마돌앞에서.

세상에 당할자 없는 최강의 군대노라 으시대던 일본정규군에 악몽과도 같은 대패를 안겨준 봉오동전투는 오후 내내 지속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주춤해지고 거의 같은 시간대에 반일부대는 서쪽으로 왕청 대감자쪽으로 철퇴하고 일본군은 여기저기 너부러진 100여구의 시체를 버려둔채 비파동을 거쳐 꽁무니를 뺏다고 한다…

답사대원들은 이날 전투현장인 삼개골어구에서 아름드리 나무와 우거진 숲사이로 치렬한 전투상황을 그려보기도 하고 백여년 이 땅에 잠들었을 큼직한 석마돌과 우물터 등지를 돌아보면서 당시 수백명이 거주했음직한 상촌의 상황을 나름대로 그려보기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는 중국 경내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 3개 반일무장단체가 힘을 합쳐 일본군을 대패시킨 첫 반일전투였으며 불패의 강군이라 자처하던 근대 일본침략군에 정신적인 공포를 선물한 첫 전투였다고 한다.

삼개골입구, 바로 이곳에서 유명한 봉오동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답사대가 원 로정을 따라 다시 고려툰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 오전 11시에 고려툰에서 출발하여 장장 8시간이 걸린 후였다.

“1920년은 윤년이 아니였으므로 날씨는 지금보다 더 무더웠을 것이고 또 전날 저녁 큰 비까지 내렸다니 무거운 무기를 휴대한 전사들이 미끄럽고 오불꼬불한 산길을 어떻게 그리 빨리 이동했을가?”지친듯한 어느 회원의 말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고려툰 뒤산을 톺는 대원들, 힘든 모습이 력력하다.

라철룡서기는 총화발언에서 “수남촌에는 봉오동전투유적외에도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항일투쟁시기의 기념비와 렬사비도 많다. 부동한 시기의 반일, 항일 유적과 선렬들의 업적은 기념가치가 있을 뿐더러 촌에 풍부한 홍색관광자원을 제공했다. 이런 자원을 충분히 리용하여 촌의 경제도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후대들도 교육시키는 것은 현재에도 앞으로도 모두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에는 대학교 교수, 박물관 연구원, 중학교 력사교원, 촬영가, 공무원, 언론사 기자와 편집 등 다양한 신분의 회원들이 참가하였는데 최고령자가 78세, 최소년령자가 37세였으며 부부동반, 부자동반하여 참가한 회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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