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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57] 철창에 비낀 풍운의 세월 속에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7-10 12:00:54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7](김학철편 6)

김학철은 연변에 정착하여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책임자로 행정사업을 하다가 이 사업이 자신에게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주덕해의 동의를 거쳐 전업작가로 문학창작을 시작하였습니다.

1955년 김학철과 그의 아들 김해양.

중국조선족의 첫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상, 중, 하 1954년 출판)가 이 시기에 출판되였지요.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연변지역 조선민족들의 항일투쟁을 소설화하였는데 그 창작의 흐름은 서울로부터 시작됩니다. 서울에서 창작한 (단편소설) 담배국, 밤에 잡은 포로 등 10여편 작품들도 대부분 중국항일전쟁시기 우리 민족의 피 어린 투쟁사를 다룬 작품들입니다.

1955년 연길의 아들집을 찾은 김학철의 어머니 김상련과 며느리 김혜원 그리고 손자 김해양.

그리고 김학철은 철저한 맑스주의자로서 사회진보를 위해서라면 인민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민주권리를 지켜줘야 한다는 사명을 시종 잊지 않았지요. 그리하여 소설창작 외에 잡문, 수필을 무기로 불의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김학철은 상해 의렬단 시절부터 로신을 가슴 깊이 우상으로 모시고 있었어요.

로신의 글은 항상 김학철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여 상해시절 하루는 친구와 함께 무작정 로신의 집을 찾아갔지요. 로신을 무조건 만나 그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소원을 풀려 하였어요. 그러나 정작 로신선생의 집 대문을 두드리자니 용기가 안 나서 후날 뭔가 글이라도 써 가지고 와서 찾아뵈야겠다고 생각하고 되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이듬해에 로신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만나려던)그 념원을 실현할 수 없게 되였고 그 꿈은 평생의 한으로 되였지요.

하지만 로신에 대한 믿음, 로신의 사상에 대한 신앙은 평생 김학철의 인생을 인도하였지요. 김학철은  로신전집 을 항상 책상머리 책꽂이에 두고 통독하였는데 그것이 김학철문학의 원천이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학철은 중국에서 최초로 로신의 작품을 조선어로 번역출판하였습니다.

50년대 김학철이 조선어로 번역출판한 로신의 작품들

50년대에 벌써 로신의 《아Q정전》(중편소설집 1953년), 《고향》, 《축복》(중편소설집 1955년) 등 대표 소설작품들을 번역, 출판하였지요. 그리고 정령의 장편소설《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도 이 시기에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김학철은 이 작품들의 원작 언어와 문학적 숨결이 모두 살아 숨쉬게 하려고 심혈을 기울였어요.

하지만 연변에서의 작품활동은 어느날 갑자기 중단됩니다. 중국의 반우파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20여년 동안 그만 붓을 꺾고 모든 작품활동을 중지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시기 갖은 풍파 속에서도 정령과의 우정은 끊기지 않았지요. 정령은 터무니 없는 '정령, 진기하(陈绮霞)반당집단'이라는 죄명으로 흑룡강성 북대황(北大荒)에 추방당해 반지하 움집에서 지내고 그것도 부족하여 북경의 진성감옥(秦城监狱)에 끌려가 옥살이까지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어느날 김학철은 집에서 《인민일보》를 구독하다가 전국문련대표대회에 정령이 출석한 소식을 보고 너무 기뻐하였어요. 그 때 김학철은 10년 감옥살이를 하고 금방 풀려 나왔지만 아직 복권이 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정령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자신의 편지가 방금 복권된 정령에게 루가 될가 두려워 아들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띄웠어요. 제가 자세한 주소도 모르고 그저 '북경 중국작가협회 정령 수신'이라고만 써 보냈는데 신기하게도 그 편지가 정령의 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또한 회답이 온 것이였지요.

1981년 김학철을 찾아 연길로 온 정령, 진명(陈明)부부(가운데 두분)와 작가 루적이(楼适夷)부부(상해시절 로신의 전우).

“꼬마해양아, 너희 편지를 받으니 너무나 기쁘다. 그런데 왜 너희 아버지는 편지를 하지 않고 네가 편지를 했지? …우리는 북대황의 황야에서도 진성감옥의 힘든 세월에도 시종 김학철을 잊은 적이 없다. 김학철은 일본감옥에서도 외다리로 피를 흘리며 견지하였는데 두다리가 성한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곤난이 뭐가 있겠느냐 버텨왔지…”

1981년 정령은 장춘 회의를 핑계로 일부러 김학철을 만나러 연길로 왔습니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가 끝날 줄 몰랐지요. 정령(어릴 때부터 정엄마“丁妈妈”라 불렀음)이 집을 나설 때 제가 신끈을 매여 드렸어요. 그러니 정령은 “세월이 참 많이 흘렀구나. 북경이화원에서는 내가 너의 신끈을 매줬는데 오늘은 네가 내 신끈을 매주는구나!”라고 하며 세월의 흐름을 개탄하는 것이였지요.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의 로신동상앞에서.

두분의 우정은 생의 마지막까지 유지되였어요. 정령이 돌아가셨을 때 김학철은 통탄하시며 그의 남편 진명에게 위안 편지를 보냈는데 끝에는 로신의 말을 인용해 적어 보냈습니다. “정령을 괴롭힌 악인들을 나는 한사람도 용서치 않겠다.” 이 편지는 후날 북경에서 출판한《정령기념문집》에 수록되였어요.

반우파운동시기에는 지금 보면 우스운 현상들이 많았어요. 작품 속에서 어느 한마디를 꺼내들고 앞뒤를 련계시키지도 않은 채 반혁명 언사로 만들어 우파모자를 씌웠지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우파와는 거리를 두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인간애가 숨쉬고 있었지요.

60년대 초 저의 집도 먹을 것이 모자라 어머니는 지어 나무껍질을 벗겨 우려서 가루내고 옥수수가루와 섞어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지요. 우파분자 김학철은 작가협회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아들을 좀 더 먹이겠다고 점심을 굶는 것이였어요. 그 당시 저는 그런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때 문화처라는 부서의 과장 박찬구는 김학철이 점심마다 굶는 것을 보고 자신이 점심을 더 챙겨와서 나눠먹군 하였어요. 김학철은 후날 박찬구선생과 영원한 친구가 되였고 김학철이 (사망되여) 두만강 따라 고향 가는 생의 마지막 길도 박찬구선생이 끝까지 바래다주었어요.

북경에서 로신의 아들 주해영(周海婴)과 만나.

그 시기 주덕해 주장께서는 밤이면 통신원을 시켜 배추랑 감자랑 김학철의 집에 날라왔어요. 워낙 주덕해와 김학철, 최채 셋은  '장기귀신'이였어요. 휴일이면 주덕해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피해 김학철의 집에 와서 셋이 함께 장기를 두며 옥신각신 다투는 것이 재미였지요. 장기 수가 좀 약한 김학철과 최채가 늘 한편이 되였는데 관건시기 최채가 훈수를 들려고 하면 주덕해는 그걸 막느라고 야단이였습니다. 김학철이 우파분자로 되면서 함께 마주앉기 어렵게 되자 주덕해는 밤이면 몰래 통신원을 보내 이런 저런 도움을 주었지요.

제가 소학교를 졸업할 때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는데 평소 학급에서 1, 2등을 다투던 제가 지역 일류 중학교에 못 붙게 되였어요. 아들이 이렇게 당하자 김학철은 더는 참지 못하고 주덕해 주장에게 얘기하였지요.

“내가 벌을 받는 건 그렇고 아들까지 영향을 받아야 하겠어요?!”

주덕해는 어쩌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냐며 깜짝 놀랐지요. 그리고 며칠 후 자치주학생모집위원회 주임이 부하를 데리고 갑자기 저의 집을 찾아왔어요. 그리하여 저는 생각 밖에 연길시 1중에 가게 되였어요. 그 시기의 그런 우정은 지금도 이어져 두 가족 자녀들끼리 서로 자주 련계를 가지며 정을 이어가고 있어요.

65세에 창작 고봉기를 맞은 김학철은 글쓰기가 고되지만 즐거웠다.

김학철은 또 그 시기 항일전쟁시기의 우상이였던 팽덕회를 위하여 장편소설을 썼어요. 팔로군사령부 주둔지에서 조선의용대를 환영하는 팽덕회 부사령원의 연설을 듣는 그날부터 김학철의 가슴속에는 팽덕회는 둘도 없는 위대한 혁명우상이였어요.

그런데 그 팽덕회장군이 정치박해를 받고 죄인이 되자 서슴없이 붓을 든 것입니다. 사회의 비리를 폭로한 그 작품은 발표되기도 전에 홍위병들의 가택수색으로 세상에 공개되였고 그 때문에 문화혁명 10년 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어요.

김학철은 연길에서 7년간 고된 류치장생활을 하고 이어 돈화 추리구감옥에서 3년 감옥살이를 하였어요. 1977년 12월에야 만기출옥 하게 되였는데 제가 마중을 갔지요. 그때 감옥과 추리구 기차역사이가 약 10리가 되였는데 뻐스도 없고 짐차도 별로 없었어요. 다행히 평판마차 한대가 정거장쪽으로 가려 하고 있었어요. 평판마차란 두 바퀴우에 달랑 넓은 널판자만 있는 마차입니다. 마차군이 우리를 보고 친절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해서 너무 고마웠지요.

항전력사를 기록하고 전우들의 영웅형상을 기린 작품들.

마차에 오른 김학철은 쌍지팡이를 몸 가까이에 두고 외다리를 걸치고 앉으셨는데 너무 즐거워하시는 것이였지요. 겨울의 따스한 해볕이 그리고 자유의 공기가 너무 좋다고 하시면서 얘기를 하셨어요.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은 희생된 전우들을 이 세상에 알리는 것이야. 내가 그들을 안 쓰면 영원히 력사 속에 묻혀버리게 되니까. 그들은 피와 청춘을 이땅에 바쳤어!” 이것이 《격정시대》가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였지요.

김학철은 출옥 후에도 여러 해 반혁명전과자로 실업당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문정일이 나서서 관련 부서에 적극 연줄을 달고 하면서 최고인민법원을 통하여 1980년 12월에 완전 복권되였지요.

65세 나이에 김학철은 문학창작의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의 한계를 느끼고  '한인막고문'(闲人莫敲门)이라는 패쪽을 문앞에 붙여놓고 한가한 손님들의 방문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기문학《항전별곡》(1983년),《김학철단편소설집》(1985년), 《격정시대》(상,하 1986년),산문집 《태항산록》(1989년),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5년) 등이  련이어 출판되였어요. 그 중에서 《격정시대》는 현재까지 국내외 여섯개 출판사에서 여덟개 판본으로 재판(再版)되였어요.

1996년 11월, 김학철 문학창작 50주년 좌담회 기념촬영.

그런데 하루는 괴상한 일이 발생했어요. 그 때는 중한수교가 있기 전인데 서울에서 기자들이 방문온 것이였지요. 그들이 뭔가 자그마한 기계를 펼치는데 그것이 지금의 노트북이였지요. 그속에서 영상편지가 나타났습니다.

“학철아! 네가 살아있다니 너무나 신기하다!...” 일본 나가사끼형무소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감옥동창 송지영의 영상편지였어요.

그는 울먹이면서 부하들에게 영상편지와 함께 책을 보낸다고 했어요. 그 책이 바로 한국에서 출판된 《격정시대》였습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한국에서 《격정시대》가 출판된 줄도 몰랐지요. 수교전의 그 해적판 《격정시대》가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함께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였다고 하는 것이였어요.

송지영도 한국에서 출판된 《격정시대》를 보고서야 감옥동창 김학철이 중국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였어요. 당시 한국 KBS방송국의 제1대 사장인 송지영은 너무도 흥분되여 한 연회장에서 지갑을 몽땅 털어 공중에 날리면서 웨쳤답니다.

“내 친구 김학철이 중국에 살아있다!”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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