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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97)제93장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8-31 17:00:47 ] 클릭: [ ]

주덕해 조선민족 대표해 천안문에 오르고

연변 인민 떨쳐나와 공화국 탄생을 환호

개국성전

1949년 10월 1일, 이날은 중국 인민에게 있어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더없이 감격스러운 날이였다. 수도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경축하는 성대한 기념대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날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에서는 제1차 회의를 열고 국가 주석, 부주석의 명단을 선포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며 주은래를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모택동을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으로, 심균유를 최고인민법원 원장으로, 라영환을 최고인민검찰서 검찰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을 〈중앙인민정부의 시정강령〉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을 경축하는 연길시민들(1949년 10월 1일. 연길)

오후 3시, 수도 북경의 30만 인민대중은 천안문광장에 구름처럼 모여들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경축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 속에서는 무시로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천안문 성루에는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요인들이 올랐고 관례대에는 여러 민족 대표들이 올라섰다. 그중에는 조선족을 대표한 주덕해도 있었다.

국가의 주악 속에 모택동은 국기게양대의 스위치를 눌렀다. 오성붉은기가 10월의 상공에 나붓겼다. 뒤이어 모택동의 우렁찬 목소리가 천안문광장에 울려퍼졌다.

“중앙인민정부는 성립되였다!”

“중국 인민은 일떠섰다!”

격동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중국대지를 진감하였으며 전세계에 울려퍼졌다.

중국 인민은 피어린 투쟁을 거쳐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모택동의 장엄한 선포는 낡은 중국에 대한 결속의 선고였으며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통치의 붕괴에 대한 선고였으며 100여년 동안의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결말에 대한 선고였다. 새 중국을 창립하기 위해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일제와 싸웠으며 국민당 반동파와 싸웠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조선족들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생명을 바쳤다. 때문에 오늘 조선족은 중화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여 자신들의 대표를 당당하게 천안문 성루에 세울 수 있게 되였다.

이어 주덕 총사령이 중국인민해방군의 지휘원과 전투원들에게 중앙인민정부 및 모택동동지의 명령을 견결히 집행하며 재빨리 국민당 군대의 잔여부대를 숙청하여 아직 해방되지 못한 국토를 해방하라는 중국인민해방군 총부의 명령을 반포하였다.

이어 륙해공군의 열병식이 있었다. 보무당당한 인민해방군 3군 전사들은 름름한 모습으로 천안문광장을 주름잡았다.

이날 연길시 2만여명 군중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경축모임을 가지고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를 목청껏 웨쳤다. 집회에서 연변의 당정 지도일군들은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하였으며 모택동 주석과 주덕 총사령에게 보내는 축전을 채택하기도 했다.

“오늘 우리 연길시 5만명 여러 민족 인민들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승리적 페막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탄생을 열렬히 경축하고 있습니다. 갖은 고통과 압박을 받은 우리 중국 사람들이 오늘부터 새로운 시대—인민민주독재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중국 인민은 더는 제국주의와 반동파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공산당, 모주석, 주총사령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령도 밑에 단결하여 생산계획을 견결히 완수 또는 넘쳐 완수함으로써 전국 인민해방전쟁을 계속 지원하며 반동세력을 소멸하고 전 중국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하여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및 부강한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하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보문은 그날로 전파를 타고 북경에 전하여졌다.

“나라가 섰다!”

아래에 저명한 민간문학가 리룡득선생의 〈나라가 섰다!〉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리룡득선생이 직접 겪은 일을 서술하고 있는 이 글은 당시의 연변인민들의 뜨거운 정서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내가 열살되던 해였다. 나는 편벽한 산골학교인 안도현 량병향 보광촌소학교 4학년생이였다. 10월 3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가 앞뜨락에서 한창 놀고 있는데 사무실 쪽으로부터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신문 한장을 들고 다그쳐 오시며 소리쳤다.

“동무들! 우리 나라가 섰습니다!”

“뭐? 우리 나라가 섰다구요?”

나와 반 친구들은 일시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벙벙해 서있기만 했다.

“우리의 새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되였소!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어데요? 좀 보자요!”

나는 다른 애들을 제쳐놓고 선참으로 선생님한테로 달려갔다. 그리고 선생님 손에 쥐여져있는 《동북조선인민보》(10월 2일부 신문)를 빼앗다 싶이 받아쥐였다.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라는 대형 활자체와 그 아래에 모신 모주석의 초상화가 첫눈에 안겨왔다. 오른쪽 톱에 ‘중국인민정협 원만 성공리에 페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고, 모택동 중앙정부 주석에 당선’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찍혀있었다.

“애들아! 우리 새 나라가 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되였다!” 친구들은 나를 빼곡이 에워쌌다.

“얘들아! 우리도 인젠 나라의 주인이 되였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날 오후 상과는 예상 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나라 창립의 크나큰 기쁨에 휩싸인 선생님이나 우리의 심정은 모두 이 일 외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학교에서는 인차 전교 사생(전교 사생이라야 겨우 100여명)이 참가한 경축모임을 가졌다. 교장선생님은 격앙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소식을 알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우리는 인젠 어엿한 자기 나라가 있는 학생으로 되였습니다. 우리는 꼭 새 나라의 어린이답게 학습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뒤이어 교무주임선생님께서 장엄하게 신문독보를 하시였다.

“…부주석들로는 주덕, 류소기, 송경령, 리제심, 고강, 장란…”

이날 오후 산간벽지의 자그마한 운동장에선 오래도록 “중화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날 집으로 뛰여간 나는 집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와 어머니(당시 우리 집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세 동생이 살았다)를 보고 소리부터 쳐댔다.

“할매, 엄마! 우리도 인젠 내 나라가 있게 되였어요!”

“아니 내 나라가 있게 되다니?”

할머니와 어머니는 중뿔난 나의 말에 잠시 일손을 멈추시고 쳐다보셨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 얘기했다.

“응, 그런 일이였구나.”

주름투성이 된 할머니의 얼굴은 대뜸 환해지시였다.

“그래요. 우린 비록 이 몇년간 자유해방 속에 살았다지만 여태까지 나라라곤 없었지요. 그런데 인젠 당당한 내 나라가 있게 되였단 말이예요!”

나는 선생님한테서 들은 도리를 제법 내리풀었다.

“참으로 기쁜 일이로구나!”

어머니도 환성을 올리셨다.

뒤미처 동생들이 들어왔다.

“얘들아! 우리들에게도 인젠 나라가 있게 되였단다!”

그러면서 나는 동생들에게 오성붉은기를 그려보이면서 내 아는 대로 제법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때였다.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이댔다.

“할매, 엄마, 돈 좀 줘요.”

“아니, 밤중에 갑자기 돈을 해선 뭘하니?”

“나라가 선 기쁨을 경축해야지 않겠어요?”

“참, 얘두. 우리 끼리 어떻게 경축한단 말이냐?”

“아니, 꼭 할 수 있어요. 빨리, 응!”

나의 성화에 어머니는 200원(동북화페)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나는 공소사로 펄쩍 달려가 과자 두근을 얼른 사왔다.

“자, 이 한근은 우리 몫이고 이 한근은 동생들 몫, 우리 이 과자를 먹으며 새 나라 창립을 경축하자요!”

1950년 3월 20일, 《동북조선인민보》 제2면에는 우리 나라 〈국가〉가 실렸고 뒤이어 우리 학교에서는 〈국가〉를 배워주었다.

일어나라 노예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 쌓자…

나는 학교에서 〈국가〉를 배우고 돌아오자마자 또 할머니와 어머니에게〈국가〉를 배워드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첫돐을 경축하는 훈춘인민들.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은 중국 력사에서 천지개벽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으며 우리 조선족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앞길을 틔워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후 중국공산당은 민족압박제도를 철저히 페지하고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조선족 인민들은 중화인민공화국 대가정의 한 성원으로서 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빛발 아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게 되였다. 조선족인민들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었던 자기들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오매에도 그리던 나라의 주인이 되여 국가대사와 지방사무 관리에 참여하게 되였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지 1년도 채 안되던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불길은 압록강과 두만강가에까지 퍼져왔다. 이웃 나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위기에 처하여있었고 우리 나라안전이 엄중한 위협을 받게 되였다. 이에 중국 정부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구호를 내걸고 그 해 10월 25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선 전선에 파견, 조선인민군과 배합 작전하여 북진하고 있는 미군을 3.8선 부근에까지 밀고 나갔다.

이 때 《인민일보》는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조선으로 가서 조선보위전쟁에 참가하라는 보도를 게재하면서 조선족들의 참군 열조를 불러일으켰다.

北京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집회를 열어 미제의 조선 침략을 반대하고, 리(이)승만의 내전 발동을 질책하며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 동포들의 인민해방전쟁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원할 것이다.(《인민일보》 1951년 7월 12일 제1판 기록에서 인용)

동년 10월 17일 《동북조선인민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延边大学 林民镐 副校长은 동북 조선족 대표의 신분으로 중앙인민방송국의 초청을 받고 10월 14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족인민은 모두 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 인민들의 해방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외교부 발언인의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돌아가 조선을 보위할 권리가 있다’는 광명하고 정대한 성명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 담화의 발표는 중국 조선족들에게 보낸 동원의 호소였다. 조선족들은 도시와 농촌에서 참군 열조를 일으켰다. 부모가 자식을 전선에 보내고 새색시가 남편을 전선에 내보냈으며 학교 학생들과 기관 일군들이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청원했다. 도문철도국에서는 선후로 500여명의 종업원들이 기관차를 몰고 조선 전선에 나가 철도운수 사업에 참가하였고 연변전원공서에서는 1,000여명의 녀간호원을 양성하여 전선에 파견하였다.

항미원조총회에서는 전선을 지원하기 위하여 비행기와 대포를 헌납하라고 호소하였다. 각지의 조선족들은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애국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연변지구에서는 97억여원(낡은 화페)이나 헌납하였는데 이 돈으로 비행기 7대 반을 살 수 있었다.

항미원조전쟁중에서 “근근히 연변지구에서만 6만여명이 조선전쟁에 참군했으며 8천여명이 희생되였다.” (《중국항일전쟁과 조선족》 고영일 주필, 도서출판 백암)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인민군과의 2년 9개월의 협동작전 끝에 드디여 미군과 함께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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