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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구술시리즈66] 개천에서 룡 난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9-10 10:13:45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66](정판룡편1)

정판룡 프로필:

1931년 10월 2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향교리에서 출생

1949년 연변대학 입학

195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55년 쏘련 모스크바대학 류학

1960년 쏘련문학 준박사 학위를 획득

귀국후 장장 40여년간 연변대학에서 교수와 연구 및 사회활동

1960년 5월 연변대학 어문학부 당총지부서기 겸 부학부장 직무를 맡은 후 중국의 첫 동방문학 교재 편찬 시작, 1978년부터 외국문학사편찬활동을 회복, 1980년 동서방문학이 다 들어있는 중국의 첫 완정한 외국문학사 전(全) 4권 출간.

1979년 교수로 평의, 이듬해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승진, 1986년부터 조선어문 박사연구생 도사로 근무하면서 20여명의 박사를 양성. 선후로 《세계문학간사》, 《제2차세계대전이후의 세계문학》, 《외국문학강좌》, 《조선어문수첩》, 《정판룡문집》1, 2, 3권, 《세계속의 우리 민족》, 《중국조선족과 21세기》 등 많은 저서들을 출간.

중국외국문학회 상무리사, 중국조선족문학연구회 리사장, 하와이 동서방쎈터 객원연구원, 길림성문련 부주석, 중국비교문학연구회 리사,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회장 등 많은 사회직을 맡고 활약.1991년 국무원 특수수당금 획득자. 부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1993년 길림성 영재훈장을 수상, 1997년 한국 KBS 해외동포상 학술상 수상.

2001년 10월 병환으로 타계.

구술자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 도사, 정판룡의 제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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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룡교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길림신문사에서 정판룡교수(전임 연변대학 부교장) 구술시리즈를 만든다고 해서 연변대학 전체 제자들이 큰 환희와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판룡선생이라고 하면, 저는 한마디로 (말하면) 조선족문화의 거장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오늘은  조선족문화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주로 6편으로 나누어 정판룡선생의 인생과 철학,그의 업적을 살펴보고저 합니다.

연변대학 교장을 지낸 바 있는 김병민교수는 정판룡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선생은 21세기 조선족이 낳은 가장 뛰여난 인문학자의 한분이며 우수한 교육가,작가이며 평론가입니다. 그는 소탈한 성미와 넓은 흉금,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박식함과 초인간적인 기억력,놀라운 착상과 아이디어, 그리고 뛰여난 유머감각과 천진함을 가진 천재적인 학자입니다.”

저도 김병민교수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1편에서는 “개천에서 룡 난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한국의 저명한 항일투사이며 교육자인 도산 안창호선생은 이런 창가를 만들었습니다.

“청산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고 락락장송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 되리.”

정판룡선생의 성장과정에도 맞는 창가라고 하겠습니다. 선생은 아주 미천한 가문에서 태여났습니다. 1931년 10월 2일, 한국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향교리에 있는 죽세공, 정봉주와 장중대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습니다. 막내아들이지요. 이 고장에 참대가 많이 나는데 정봉주는 참대를 베여다가 여러가지 물건들을 만들지요. 참빗도 만들고, 광주리도 만들고, 키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잡동사니를 만드는 분이 바로 정판룡선생의 아버지 정봉주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을 경찰서장의 아들이 몹시 데설궂고 까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놈을 좀 훈계하고 귀뺨을 쳤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황차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밤에 솔가도주해서 온 곳이 중국입니다. 1938년도 무렵인데 먼저 일가족은 압록강을 건너서 료녕성 영구 부근에 있는 반산현 영흥촌이라고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먼저 중국에 간 친척이 흑룡강성 주하, 지금의 상지시에 살고 있었어요. 그 고장이 농사도 잘 되고 인심도 좋다고 하면서 오라고 해서 선생네 일가족은 다시 보짐을 싸서 지고 주하, 그러니까 상지로 갑니다. 이걸 우리 이민사에서는 보통 아리랑 현상이라고 하지요. 우리 선인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가서 한자리에 정착한 게 아니라 더 좋은 곳이 있으면 또 그쪽으로 옮겨가는 거예요. 어떤 가족을 보게 되면 대여섯번씩 이주하다가 나중에 한곳에 정착하였습니다. 이 동네에 하동소학교가 있었는데 정판룡은 1939년도 봄에 이 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하동소학교를 졸업하였지만 가정상황이 점점 어렵게 돼서 중학교를 다닐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지요.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여 광복을 맞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마을에서 하동소학교의 기초 우에 하동중학교를 세우게 됩니다. 정판룡선생은 다시 중학교를 다니게 되였지요. 중학교 3학년을 채 졸업하지 못했는데 연변에서 소식이 날아 옵니다. 연변에 연변대학이 선다는 소식이지요. 이게 무슨 소리냐? 우리 민족의 대학이 연변에 선다? 세상이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정판룡선생은 한 학급에 다니는 친구 둘과 함께 기차를 타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면서 며칠동안 고생한 끝에 연변대학에 오게 됩니다.

 
1949년 연길대학 개교식에서의 전체사생들.

그 때 연변대학 주비위원회 사무실이 지금의 연변일보사 자리에 있었는데 세 친구는 주비위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때 연변대학 부교장, 실제로 교무를 책임진 분이 림민호선생인데 마침 사무실에 계셨지요. 세 친구가 들어가서 “저희들은 북만 상지에 살고 있는데 연변대학이 섰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러 왔습니다”하고 여쭈었어요. 그러자 림민호 부교장께서 “대관절 너희들은 나이가 얼마냐?”하고 물었습니다.“열일곱살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몇학년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초중 3학년입니다”하고 대답했지요.“졸업했느냐?”고 물어서 “졸업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럼 안돼요, 여긴 적어도 초중과 고중을 졸업하고 시험을 보고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고중까지 다니고 오기 바라네.”하고 림민호 부교장께서 잘라 말했지요.

세 친구는 굳은 결심을 하고 갔던지라 “저희들은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입학만 시켜주십시요. 만약 선생님께서 입학시켜주시지 않는다면 래일 아침부터 이 사무실에 출근하여 청소부터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아침마다 사무실에 나가 청소를 하고 림민호 부교장선생님이 오면 또 떼질을 썼지요. 그래서 림민호 부교장은 하도 방법이 없어서 “대관절 너희들은 누굴 믿고 왔느냐?”고 하니 “조선의용군 제3지대 지도원이 주덕해동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할빈에 와서 계셨던 분입니다. 그분을 믿고 왔습니다. 제발 그분을 좀 만나게 해주십시요.”라고 하였습니다. 림민호 부교장은 하는 수없이 주덕해 교장에게 전화를 걸었어요.“‘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흑룡강 주하 하동에서 세 젊은이가 우리 대학에 입학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초중 3학년 학생들이라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주덕해 교장은 “일단 입학시키지요. 공부를 따라가면 그냥 두고 정 힘들어하면 로자를 푼푼히 줘서 돌려 보냅시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1950년 림민호(두번째줄 왼쪽 첫번째) 부교장과 연변대학 축구팀.

림민호선생은 정색을 하고 세 젊은이를 보고 “그럼 이젠 공부를 하는거다. 그렇지만 따라가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줄 알고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는 연변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였답니다.

애초에 정판룡선생은 수학학부에 배정되였습니다. 수학을 공부하는데, 아무래도 고중과정을 밟지 못한 젊은이라 몹시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1년동안을 다니고 1년 후에 학과를 조정하는데 “어디 가겠느냐?”하니 “나는 어문학부에 가겠습니다.”그랬대요. 그때는 어문학부라고 했는데 실은 오늘의 조문학부에 가게 된 거지요. 정판룡선생은 골보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수학학부에서는 겨우겨우 따라 갔는데 조문학부에 오니까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아주 령리하고 총명하니까 교수님들의 눈에 들게 되였습니다.

그때 김창걸선생이라고 무려 다섯개 과목이나 가르치는 훌륭한 교수가 계셨습니다. 워낙 소설가였던 이분이 정판룡을 눈박아 보게 된 거지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른 법”, 이 자식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정판룡은 1년 먼저, 사실은 4년제인데 3년을 공부하고 졸업을 하고 1952년 10월에 교원으로 남게 되였습니다. 그때 셋인가 넷을 남겼다 하네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권철, 최윤갑 교수 등이 교원으로 남았는데 그들은 1기생으로 연변대학 교원이 되였습니다. 그때 정판룡선생의 나이가 스물한살입니다. 열심히 강의를 하면서 더 깊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가 하고 노리고 있던 차에 1954년도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구쏘련에 류학생을 선발해서 파견하게 된 거지요. 정판룡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굉장히 흥분했지요.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전 동북국, 말하자면 료녕, 길림, 흑룡강에서 몇을 뽑지 않는데 우리 같은 시골대학의 학생들이 달려들어 되겠는가? 그래서 모두들 감히 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문학부에서 정판룡선생이 신청을 했어요. 림민호 부교장이 래일이면 신청이 마감된다고 교수들을 동원해 암시를 주고 권고를 하는데도 신청하는 학생이 없어요. 그런데 퇴근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거예요. 들어오라고 해서 보니까 바로 정판룡이 아니겠어요. “왜 왔느냐?”하니까, “교장선생님, 제가 한번 쏘련 류학생시험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하고 말하더랍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서 앉아있던 림민호 부교장은 정판룡선생이 찾아오니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한참 말씀을 못하고 정판룡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더니 “아무렴, 길고 짧은 거는 대보는 거야. 내가 학과에 이야기해놓을 터니까 준비를 잘해 봐요.”하고 격려해주었지요. 그래서 정판룡은 수업 외의 다른 활동에는 참가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지요. 몇달 후 시험을 보았는데 무난히 합격되였습니다. 연변농학원에 있는 분까지 해서 연변에서 세사람인가 합격되였다고 하지요. 이건 그야말로 연변대학으로 놓고 말하면 령의 돌파입니다.

 
쏘련류학시절의 정판룡.

정판룡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북경외국어학원에 가서 1년간 로어를 공부합니다. 22반에 편입돼서 로어를 공부한거지요. 후에 정판룡선생의 부인이 된 왕유녀사는 18반에서 공부하였구요. 거기서 1년간 로어를 열심히 공부한 거예요. 1955년 9월, 정판룡은 마침내 모스크바대학에 가서 쏘련문학, 즉 쏘비에트문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교수는 볼리아크라고 하는 녀성인데 유태인이예요. 이 교수의 문하에서 쏘련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쏘련문학이란 바로 1917년 10월혁명 이후의 문학을 말하지요. 1960년, 5년만에 정판룡은 20만자에 달하는 학위론문을 제출했습니다. 학위론문의 테마는 《알렉쎄이 똘스또이 3부작 고난의 길에서의 인민묘사원칙》입니다. 로씨야와 쏘련에 똘스또이라는 작가가 둘입니다. 하나는 《안나 까레니나》를 쓴 레브 똘스또이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쎄이 똘스또이입니다. 보통 아 똘스또이라고 하지요. 이 작가가 3부작 장편소설 《고난의 길》을 썼는데 여기서 인민묘사원칙을 포인트로 잡고 론문을 집필한 겁니다. 이 작가가  10월혁명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가졌고 좌우로 동요를 했던 분이예요. 다시 인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쏘련에 있어서의 인민의 력사적 움직임을 자기 소설에 반영했습니다.

 
1954년, 첫패로 쏘련류학을 간 정판룡(오른쪽 첫사람 )등 류학생들이 모스크바 국립극장앞에서.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만만치 않아요. 그중에 쏘련 문예리론계 최고의 권위자인 찌모프예브, 말하자면 쏘련과학원 아카데미 원사인 찌모프예브 같은 석학들이 앉아 있었어요. 하지만 정판룡선생은 조금도 기 죽지 않고 당당히 론문을 발표하고 답변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부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이 부박사학위는 또 령의 돌파인 셈입니다. 중국에서 쏘련에 간 류학생들 가운데서 첫사람으로 문학 부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류학생들 가운데는 후에 대성해서 중국 문예리론계의 권위자로 된 전중문교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중문교수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먼저 귀국하는 바람에 부박사학위를 받지 못했어요. 그러나 정판룡은 부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첫사람으로 받은 거지요. 정판룡이 쓴 박사학위론문의 골자는 모스크바대학 학보에 실렸고 후에 또 중국 국가교육부에서 꾸리는 학회지에도 실렸습니다. 교육부에서 정판룡의 학위론문을 우수론문으로 선정해 표창을 하기도 했어요.

쏘련에서 공부할 때 제일 어려웠던 게 무엇이였습니까? 하고 언제인가 제가 물었더니 정판룡선생은 “아무래도 로어가 아니겠어.”하고 대답했습니다. 1년동안 북경외국어학원에서 로어를 배웠는데 이걸 가지고는 어림도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로어공부에 할애했다고 합디다. 아침에 학교에 나갈 때, 그리고 휴일이면 아예 《로어사전》을 들고 강기슭을 거닐면서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만들어가지고 중얼거리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마침내 로어관을 넘어섰고 20만자에 달하는 학위론문도 로어로 썼습니다.

두번째로 공부를 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건강한 신체를 가지는 것이라고 합디다. 쏘련은 다 좋은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주로 흘레브라는 빵에다가 우유를 먹었는데 반찬이 시원찮아요. 절인 오이밖에 없으니까요. 첫 몇달은 좀 먹기 힘들더래요. 그러나 이걸 먹어야 내가 학위공부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먹었노라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같이 갔던 친구들 가운데 북경, 상해 같은데서 온 친구들은 도무지 빵을 먹어 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정판룡은 음식과 생활문화에 적응해 가지고 빵도 잘 먹고 운동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1960년 봄, 외투를 입고 개선하는 정판룡의 사진을 보면 얼굴에 부등부등 살이 올랐어요. 쏘련에 갈 때는 굉장히 여윈 젊은이였는데 돌아 올때는 아주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거지요. 정판룡은 그야말로 금의환향한 셈이였습니다.

 
1997년도 서재에서.

정판룡선생은 연변대학에 돌아온 후 많은 업적들을 쌓고 많은 상을 수상합니다. 평생 받은 여러가지 상 가운데 어느 상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가 하고 제가 물은 적 있습니다. 그랬더니 1993년도 길림성정부에서 주는 영재훈장을 받았는데 이를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어요. 두번째로는 1997년 3월에 한국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다음 2001년, 세상을 뜨기 반년전에 장백산문학상을 북경에서 받았습니다. 선생은 이 세가지 상과 훈장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글구성:안상근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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