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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6)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1)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16 14:25:20 ] 클릭: [ ]

○ 최룡수(전임 중앙당학교 교수)

한락연은 이름이 광우, 자가 락연이며 아명이 윤화, 한소공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으며 조선족으로서 1898년 길림성 룡정촌(현재 룡정시)에서 출생했다.

한락연동지는 걸출한 무산계급혁명가, 저명한 인민예술가이며 사람들로부터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다. 그는 23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우리 나라 조선족들 가운데서 제일 첫 공산당원이다. 그는 동북의 조기 건당 지도자의 한사람이며 오려석, 임국정 등 동지들과 함께 심양, 할빈 등 곳의 최초 중국공산당 조직을 세웠다. 그는 국제 반파쑈전사로서 항일전쟁 초기 스메들리(史沫特莱), 스노(斯诺), 앨리(艾黎) 등 국제 우호인사들을 사귀였으며 동시에 조선혁명가들을 소개하여 연안으로 가게 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당의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하면서 국민당 원로들인 우우임(于佑任)과 서북 군정요원들인 장치중(张治中), 도치악(陶峙岳)과 래왕이 깊었다. 그는 일찍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빠리미술학원에 류학 가서 조예를 닦았다. 우리 나라 조기 유럽에 류학 간 화가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전통문화와 현대회화 창작을 결합시킨 화가로서 예술과 과학의 결합, 회화와 고고학의 결합 그리고 고대문물 보호를 위해 많은 개척적인 사업을 하였다. 그는 많은 촬영과 회화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그중 대부분이 류실되고 부분적인 작품들만이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여있다.

1. 동북 조기 건당 지도자

한락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배우기를 즐겼으며 회화를 더욱 좋아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살림이 가난해 소학교를 마치고 퇴학해 생업을 찾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 그는 전화국에 들어가 접선원 일을 하다가 후에 세관에 시험을 봐 들어가서 직원으로 있었다. 세관은 대외창구로서 그 곳에서 그는 외국의 서적들을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세상의 소식들을 알 수 있었으며 차츰 새로운 사상을 섭취하게 되였다. 1919년 3월 1일, 조선의 수도 서울에서 반일 민족독립 집회가 열렸는데 그 소식은 매우 빨리 연변에까지 전해왔다. 3월 13일, 룡정에서 3만명이 참가한 성세호대한 군중집회가 열려 조선의 ‘3.1’운동을 성원해나섰다. 한락연은 시위대오의 앞장에 서서 일제를 반대하는 구호를 높이 웨쳤다. 평화시위는 무장진압을 받았으며 골간분자들은 체포되였다. 한락연은 혁명의 진리를 찾기 위하여 1919년, 10월혁명이 승리한 지 얼마 안되는 쏘련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으며 거기에서 마침 상해로 떠나는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만나 그들과 같이 상해로 갔다.

당시의 상해는 국제적인 도시였는데 도처에 외국 조계지였다. 한락연은 상해에서 우선 전차회사와 인쇄공장에서 로동자로 있으면서 후에 류해속(刘海粟)의 상해미술전과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사회활동에 참가하면서 경상적으로 프랑스 조계지에 가 조선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가들 사이에 내부 모순이 치렬한 것을 발견한 그는 크게 실망을 느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건립되였다. 1922년 채화삼이 중국공산당 기관 간행물인 《향도》를 창간했는데 한락연은 애독자가 되였으며 차츰 중국공산당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3년말 한락연은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중앙에서는 그를 동북에 파견하여 건당 준비 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1924년 봄 한락연은 봉천에 도착하여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염보항(阎宝航)을 알게 되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유화전시를 열었다. 후에는 또 소남관 풍우대 근처에서 사립 미술전과학교를 세웠다.

한락연은 친히 교장을 맡고 자금, 교실, 교원, 학과설치 등을 책임졌으며 또 강의까지 하였다. 륙일작, 허로백, 로소비, 심립용, 왕평릉 등 이들이 선후로 교원으로 있었으며 또 3명의 로씨야 교원도 있었다. 그는 학교를 거점으로 사회 각계의 인사들을 만났으며 혁명활동을 전개했다. 청년회의 소자원 등 사람들이 조직한 청년독서회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공산주의리론을 학습하고 있는 것을 알고 한락연은 주동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활동을 지지하였다. 한락연의 련계로 《향도》, 《중국청년》과 일부 맑스주의 서적들을 부쳐왔다. 이런 서적들이 청년들 속에서 돌려가면서 맑스주의가 선전되였으며 당조직을 세우기 위한 사상준비를 하였다. 이 시기는 제1차 국공합작의 초기였다. 한락연은 손중산이 파견한 주제청을 협조해 황포군관학교 학원을 물색하였으며 또 국민당원인 매불광이 꾸린 계명학사에 참가하고 소자원을 설득해 《계명순간》 편집을 맡도록 했다.

1924년 10월 임필시는 오려석을 봉천에 파견하여 한락연을 찾아 건당사업을 상의하도록 하였다. 1925년 중공 북방국에서는 임국정을 봉천에 파견해 오려석, 한락연과 함께 봉천 최초의 당지부를 건립했다. 1925년 6월 10일 봉천학생들이 ‘5.30’ 운동을 성원하여 벌인 시위는 바로 이들의 지도와 지지하에 진행된 것이다. 1925년 여름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 울라지보스또크로 갔으며 돌아온 후 할빈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 당시 할빈은 동북지구 당활동의 중심지였으며 오려석, 임국정 등 동지들이 륙속 할빈에 가서 당의 지도일군을 담임하였으며 또 심양에서 소자원, 왕순일 등 동지들을 파견해왔다.

한락연의 공개 신분은 할빈보육중학의 미술교원이였으며 초도남, 조상지, 왕광록, 장우임 등 동지들과 함께 청년독서회를 조직하고 평민 야학교를 꾸렸으며 지식분자와 청년학생들 속에서 사업을 전개해나갔다. 한락연은 왕순일, 부천비, 부천균을 소개하여 당에 가입시켰으며 또 오려석을 협조해 왕순일과 소자원을 수분하에 파견하여 교통소를 세웠다. 후에 이 교통소는 6기 당대표들을 호송하여 쏘련으로 가는 데 중요한 작용을 놀았다.

1929년초 한락연은 치치할로 갔다. 공개 신분은 룡사공원의 감리였으며 공원의 ‘격언정’을 설계하는 일이였다. 한락연은 그 곳에서 손락천과 합작하여 락천사진관을 꾸렸으며 후에 이곳은 당의 비밀련락점으로 되여 항일전쟁 시기에 우리 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2. 국제 반파쑈전사

1929년 한락연은 치치할을 떠나 상해를 거쳐 프랑스에 건너가 근공검학을 시작하였다. 때는 자본주의 경제공황 시기였으며 유럽 경제가 엄중한 타격을 받아 대량의 로동자들이 실업을 하였다. 타향에서 설자리가 없게 된 한락연은 우선 중국 식당에 들어가 일을 하였다. 리앙에서 그는 상수홍 등 사람들을 찾아가서 중국 식당에서 수채화전시를 열 생각을 털어놓았다. 회화수준이 상당히 높은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였다. 다행히 소원 대로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게 된 한락연은 프랑스를 려행하면서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처음에 풍경이 아름다운 니스에 갔다가 후에 프랑스의 수도 빠리에 갔다. 서방예술의 보물고로 불리는 베르사유궁전에서 그는 도취되여 발길을 돌리지 못했으며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찬탄을 금치 못했다. 한락연은 프랑스의 회화예술을 계통적으로 배우기로 작심하였다. 1931년 그는 빠리미술학원에 시험에 합격되여 들어갔다.

프랑스에서의 학습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거리로 나가 그림을 그려서 팔아 공부를 견지하였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반드시 일정한 회화 실력이 있어야 했으며 또 그 장소 ‘두목’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더우기빠리 몽마르트고지광장은 실력자들이 운집한 장소로서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일찍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 그런 곳이였다. 한락연도 자주 이 광장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 솜씨를 보고 “당신은 일본사람이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몹시 성나서 큰 간판에 커다랗게 ‘중국 화가 한락연 스케치작품 전시’라고 적어놓았다. 한번은 희극가 웅식일선생이 프랑스를 방문하여 중국 문화예술 애호가들에 중국 고전명극 〈왕보천〉을 가르칠 때였는데 한락연이 주동적으로 그 무대 설계를 맡아 매우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한락연은 예술에 종사하면서도 혁명사업을 잊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프랑스공산당이 조직하는 반파쑈투쟁에 참가하였으며 네델란드, 스위스, 영국, 이딸리아에 가서 사생할 때에도 국제 선전과 조사연구 임무를 맡고 갔다. 쏘련 남부로 갈 적에 그는 소자원에게 서신을 보내 련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1936년 한락연은 유럽 화교항일련합회에 가입하여 화교부에서 일했다. 1937년 9월 그는 빠리에서 열린 유럽 화교항일련합회 2차 대회에 참석했으며 항전과 구제문제 세미나에서 발언까지 하면서 유럽에 온 화교들이 조국의 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나설 것을 동원하고 나섰다. 양호성 장군이 빠리를 방문했을 때 그는 《빠리석간》 기자 신분으로 취재를 하면서 양호성 장군의 항일사적을 널리 선전하기도 하였다. 1937년 10월 29일 양호성 장군과 수행일군들이 프랑스 ‘젤리보’호를 타고 마르세유항을 떠나 귀국할 때 한락연도 같은 배를 타고 프랑스를 떠났다. 그는 지중해와 스위스운하를 경유해 그 해 11월26일에 향항에 도착했다.

1937년말 한락연은 무한에 도착했다. 소자원은 그의 조직관계를 류란파에게 소개해주었으며 류란파는 주은래동지에게 보고하였다. 조직에서는 그를 동북구국총회에 참가하여 일을 하도록 했다. 당시 동북구국총회의 서기는 류란파였으며 성원들로는 장희요, 장경태, 염보항, 한락연, 진선주, 서중항, 우병연, 우의부가 있었다. 한락연은 선전과 련락 임무를 책임졌다. 그는 경상적으로 동북구국총회의 기관지 《반공(反攻)》잡지에 글을 썼으며 겉표지도 제작했다. 그는 또 거폭의 유화 〈전민항전〉을 창작하여 무한의 황학루에 걸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범장강과 아는 사이였으며 중국청년신문기자협회와도 래왕이 밀접했다. 한락연은 상해구국회의 총책임을 맡은 심균유, 추도분, 전준서, 류식 등 사람들과도 교제가 깊었다.

당시 국제 인사인 스노와 르위·앨리가 공업합작사 운동을 발기하고 스메들리는 한구에서 지원의료일군강습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락연은 주동적으로 이들과 접촉하며 전쟁상황 등 소식들을 교류하면서 국제 항일선전 사업을 추진시켰다. 한시기에는 무창과 한구 사이를 드나들면서 스메들리를 협조해 약품을 접수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무한에 있는 조선인 항일조직과도 련계를 유지하였으며 리명, 왕수성, 장영 등 조선 동지들을 소개해 연안으로 보냈다.

1938년 11월 곽말약이 령도하는 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은 예술일군들을 조직하여 연안을 방문하였는데 한락연은 작곡가 새극과 함께 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연안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비행기 폭격을 목격했다. 폭격을 피해 산에 파놓은 움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국민당 93군의 진보적 청년들인 여극견, 양공소, 하눌 등 사람들도 있었다. 한락연은 야외에서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피해있는 기회에 당지의 상황을 료해했다. 이들이 연안에 머무르는 동안에 모택동은 친히 움집을 찾아와서 만나기까지 하였다.

3. 통일전선의 련락원

1936년 4월 한락연은 동북구국총회의 책임자 염보항의 소개로 리제심이 령도하는 전지당정위원회에 가서 사업하였는데 소장 지도원으로 위임되였다. 그동안에 그는 두번이나 진(晋)동남 항일전선으로 가서 국공 두 부대를 넘나들며 항일통일전선 련락사업을 수행하였다. 1939년 5월 한락연은 중경을 떠나 서안으로 갔다. 동북구국총회 서북분회는 진보적 청년 구금을 파견하여 기자의 신분으로 동행하도록 하였다. 5월 21일 서안에서 출발하여 23일 락양에 도착하였으며 민지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원곡, 심수, 양성, 릉천 일대에서 사회조사를 통해 당지의 민정과 전지 상황을 료해했다. 그들은 심수에 있는 국민당 직계부대인 93군 군부에 갔다. 한락연은 그 곳에서 연안에서 면목을 읽힌 여극견, 양공소, 하눌을 만났으며 군장 류감과 참모장 위외도 만나보았다. 93군을 떠나올 때 위외는 한락연에게 “팽덕회 부총사령에게 내가 장개석의 비밀명령을 보았는데 국민당이 반공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으니 팔로군총부에서 대응 조치를 강구하기를 바란다”고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한락연은 급히 팔로군 전선총부로 가서 팽덕회동지에게 이를 보고했다. 돌아올 때 한락연은 또 93군 군부에 들려 팽덕회가 위외 등이 계속 93군에 남아서 견지할 것을 바란다는 의견을 전해주었다. 후에 장개석이 93군에 전보를 보내 염석산을 도와서 항일결사대를 진공하라고 할 때 위외는 작전명령에 싸인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하루 동안 시간을 끌었다. 한락연 일행은 진동남전선에서 전선 취재를 온 쏘련 촬영기자 까르만을 만났다. 그는 진동남기행을 통신으로 써 《반공》잡지에 발표해 후방에 있는 인민들로 하여금 항일전선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도록 하였다.

1939년 9월 한락연 일행은 다시 중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월 그는 항일구국사업을 하는 류옥하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9년 겨울 국민당이 제1차 반공 고조를 일으킴에 따라 량당의 관계는 또 긴장해졌다. 이 때 한락연은 두번째로 진동남전선으로 시찰을 떠났는데 군인 두명이 수행했으며 그중 한명은 연안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숙중휘 중위였다. 당시 93군의 진보적 청년들이 박해를 받았으며 위외와 류감 사이의 모순이 공개화되였고 국민당군위에서는 명령을 내려 위외더러 중앙훈련반에 가서 학습하도록 하였다.

한락연 일행이 93군에 도착하자 위외는 그에게 자신의 처지를 팔로군 전선총부에 회보해달라고 부탁하였으며 팔로군에 갈 것을 재차 표시하였다. 한락연 일행은 오양 부근에서 팽덕회와 좌권을 만나 93군의 상황을 회보하였다. 팽덕회는 당시 형세를 분석하고 나서 국민당 내부 사업의 중요성을 제기하면서 그들이 될수록 93군에 남아서 견지할 것을 희망했다. 1940년 5월 한락연은 팔로군 전선총부에서 돌아와 93군 군부에 가서 위외에게 팽덕회의 의견을 전해주었다. 위외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한락연에게 주면서 서안에 가서 팔로군판사처에 넘겨주거나 아니면 중경에 갖고 가서 주은래에게 줄 것을 부탁했다. 한락연이 보계를 거쳐 중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93군의 양공소도 동행했다. 보계기차역에 내리자 군경들이 쫙 널렸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검문을 했다. 그 날 저녁 서북공업합작사 보계판사처 주임 로광적이 이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한락연은 초대소에 돌아오자 마자 미리 매복해있던 헌병들에게 비밀리에 체포되였다. 한락연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거쳐 빠른 시간에 93군에 전해졌다. 위외는 한락연에게 부탁해서 보낸 편지가 발각될 것을 고려해 직접 류감을 찾아 사실을 말했다. 류감과 위외가 생사를 같이 한 사이인지라 상반되는 정치견해 앞에서 더는 같이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류감은 위외의 선택을 존중해줬다. 후에 위외는 일부 진보적 청년들을 거느리고 팔로군에 참가했다.

한락연은 체포된 후 즉시 서안으로 압송되여 국민당 성당부의 층집에 갇혀 비밀리에 심문을 당했다. 심문 앞에서 그는 태연자약하게 당의 기밀을 엄수하였다. 후에 그는 전문 공산당과 공산당으로 의심되는 범인을 감금하는 태양묘문 쪽에 있는 특종구치소에 들어갔다. 감옥에서 그는 한쪽으로 비밀리에 사상공작을 해 옥중에 감금된 사람들의 정서를 위로했으며 한쪽으로는 또 그들을 조직하여 투쟁을 벌였다. 녀성청년 부빈이 고문을 당하자 한락연은 그더러 투쟁을 견지하라고 고무하면서 조직을 파괴하지 않고 동지를 해치지 않는 전제하에서 출옥을 쟁취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 당시 일본 비행기가 경상적으로 날아와 서안을 폭격해댔다. 그는 국민당 당국에 자신들의 힘으로 방공굴을 팔 것을 제기하였다. 방공굴을 파는 로동에 참가한 후 그는 또 족쇄와 수갑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한락연은 또 감옥에 있는 전우들에게 생산로동에 참가할 것을 동원해 자신들의 로동으로 만든 장난감을 팔아 모은 돈으로 약품을 구입하여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주었다.

1943년초 당조직에서 리제심과 동북의 인사들을 통해 여러 면으로 노력한 결과 한락연은 끝내 출옥하였다. 한락연은3년 동안의 옥중생활에서 견정하고 로련하였으며 락관적이였다. 그는 주동적으로 옥중에 있는 사람들을 단결하여 투쟁을 견지하였으며 경상적으로 당조직에 정황을 보고하여 당조직으로 하여금 방법을 강구하여 부분적 동지들을 구출하도록 노력하였다.

(다음에 계속)

/번역: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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