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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리태, 박길송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26 13:22:33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3군―사급 이상 장령

리태(李泰, ?—1940): 동북항일련군 제3군 제2사 사장

일명 송중학(宋仲鶴)이라고도 하며 중공당원이다. 1933년 3월, 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의 파견을 받아 리복림 등과 함께 방현대(訪賢隊), 서성대(西省隊) 등 부대에 들어가 사상사업을 하였다. 1933년 10월 10일, 주하항일유격대가 결성되자 13명 대원중의 일원이 되였다. 1935년 1월 28일, 합동지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확대, 개편되자 제3군 제1사 제3퇀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8년 10월에 제2사의 정치부 주임 오경재(吳景才)가 방정현 로도묘전투에서 희생되자 제2사 정치부 주임직을 이어받았다. 1939년 5월, 제3군이 성당위원회 제2차 집행위원회의 회의 정신에 따라 3개 사로 개편되자 제2사 사장 겸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5월 30일,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이 덕도 조양산에서 결성되자 제2사는 제3로군 소속 부대로 되였다. 제2사를 이끌고 의란, 통하, 목란, 철려 등지로 전장무대를 옮기며 싸우던중 1940년 봄 통하현 경내에서 반역자에 의해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동북항일련군장령전》,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박길송(朴吉松, 1917—1943):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12지대 지대장

1917년 8월,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여나 1927년에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로 이주했으며 중국 국적에 가입했다. 1927년 봄, 룡북촌사립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고 1930년에 왕청현제3소학교 고등과에 입학했다. 1932년 봄, 춘황투쟁에 참가해 반제동맹에 가입했다. 1933년초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34년에 공청단왕청현위원회 아동국장, 4구공청단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1935년 12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였다가 나이가 어린 관계로 얼마 안 있어 석방되였다. 1936년 3월, 항일련군 제5군 제1사 제2퇀에 입대했고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 7월, 제3군 제3사 정치부 조직과장이 되였다. 1938년 6월, 제3군 경위퇀 정치부 주임이 되였고 9월 6일 라북을 출발해 해륜으로 원정을 떠났다. 1939년 4월, 동북항일련군 제3군이 결성된 후 독립 2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같은 해 11월, 철려현 이길밀(依吉密)에서 200여명에 달하는 관동군 정예 ‘토벌대’를 밀림 속으로 유도하여 대부분 전멸시켰다. 1940년 2월, 항일련군 제6지대 제17대 지도원이 되였고 그 해 가을 제6지대의 정치부 주임까지 겸임하였다. 1941년 4월, 대오를 거느리고 항일련군 제6지대 지대장 장광적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하여 철려 남산에서 항일구국 선전 활동을 수행했다. 같은 해 7월에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12지대 대장이 되여 왕양철도경호퇀 분주소, 도산기차역, 도산철도경호퇀 분주소, 괴뢰경찰 분주소 등을 습격하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1943년 1월, 부대를 거느리고 경성의 괴뢰경찰서를 습격하고 밀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안현 복합륭(福合隆)툰에서 일본 ‘토벌대’와 조우하여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고 체포되였으며 8월 12일 북안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8월 24일 북안 성북 토교(城北土橋) 아래에서 살해당했다. (자료 출처:《중공흑룡강당사인물전 》, 《동북항일련군명록》)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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