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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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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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9 16: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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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숙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나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듯 싶다. 나는 룡정에서 태여났는데 우리 집은 아주 구차한 시골에 살고 있었다. 어릴 때 내 인상 속의 어머니는 항상 근심걱정으로 얼굴이 펴이지 못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태여난 해에 ‘3.1’ 운동이 폭발했는데 대단한 사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 피비린내 나는 날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왜놈들의 한국 백성들에 대한 잔혹한 도살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영원히 룡정을 떠났으며 이곳 저 곳을 떠돌이 하셨다.
젊은 시절의 한락연과 전처 최신애, 딸 한인숙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줄곧 아버지를 생각하고 걱정하시였다. 특무가 추적이라도 할가봐 바삐 삼촌, 할머니와 나를 데리고 큰할아버지댁으로 피신갔다. 2, 3년이 지난 후 소식이 왔는데 아버지가 상해의 한 미술학원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다시 할빈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였다. 상해미술학원에서 아버지는 1,800명이나 되는 학생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성적을 따냈고 신문에는 그의 사진도 실렸다. 양복을 입고 검은 안경을 낀 아버지의 모습은 매우 멋졌다. 후에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 어떤 사람들은 내 등뒤에서 아버지가 영준하다고 수군대군 했다.
1926년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할빈에서 편지 한통을 보내왔는데 할빈의 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갈 결심을 내리고는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아버지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길을 떠났다. 우리와 함께 간 사람들로는 택호네 식구들까지 있었다. 우리는 먼저 기차를 타고 배초구에 도착한 후 보행을 시작하였다. 먼길을 걸어서야 토비들이 출몰한다는 왕청 로야령에 이르러 자그마한 려인숙에 들 수 있었다. 택호의 아버지는 젊은 녀자를 데리고 외출했기에 몹시 걱정하였으며 혹시 일이라도 생길가봐 밤새 눈을 붙이지 못했다. 게다가 나도 철없이 울어대다 보니 엄마는 나를 업고 울지 말라고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또 려인숙에서 나와 기차를 타고 어렵사리 할빈에 도착했다. 플래트홈을 나섰으나 우리들을 마중나온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다가와 우리를 룡정에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작은 소리로 자기는 성이 채씨라면서 “한락연선생님 댁이지요?”하고 물었다. 엄마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이 한선생을 대신해서 마중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이였다.
우리는 역 근처의 평양랭면관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랭면을 다 먹은 나를 데리고 밖에 나가 옷을 사입히겠다고 했다. 내가 낯선 사람과 함께 나가지 않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택호의 아버지에게 함께 나가줄 것을 부탁했다. 택호의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나가 리발도 하고 새옷도 샀다. 옷을 사가지고 랭면관에 돌아오니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또 마차를 타고 오래동안 달려 커다란 층집 앞에 도착했고 2층에 있는 한 방에 들어갔다. 택호의 아버지는 다른 방으로 가서 쉬였다. 그때 한 로씨야 할머니가 우리에게 차물과 빵을 가져다주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모두 먹지 않았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올라가 자려고 했다. 이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파란 코트를 입고 검은 테 안경을 낀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바삐 나를 일으켜세우더니 “아빠야, 빨리 인사해.” 라고 재촉했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버지는 나를 귀여워하면서 안아주시더니 어머니에게 간단히 몇마디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이미 채선생에게 택호의 아버지를 래일 아침에 보내드리라고 부탁했다”고 말씀하셨다. 새벽에 택호의 아버지는 채선생의 안내하에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갔다. 택호의 아버지를 배웅한 후 채선생은 우리를 데리고 마차에 올라탄 채 할빈 거리를 가로질러 두시간 가량 달렸다. 마차는 푸른 들판에 세워진 외딴집 앞에 이르더니 행장을 부리워놓았다. 이곳에는 로씨야 부부가 6살 난 사내애와 함께 살고 있었다.
채선생은 우리에게 필요한 생활용품과 쌀, 채소 등을 사주었다. 우리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가 룡정을 떠난 지 이미 40여일이 지난 뒤였다. 채선생은 매일 와서 나에게 로씨야어를 가르쳐주었다. 며칠 후면 토요일인데 어버지가 오시는 날이였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지어놓고 줄곧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래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던 아버지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침대가 하나 밖에 없어서 나는 책상에서 잘 수 밖에 없었다. 토요일마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우리가 함께 목욕하러 가기도 했는데 우리가 간 곳은 로씨야인들이 경영하는 목욕탕이였다.
아버지는 번마다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군 했다. 그가 앞에서 걸어가면 우리는 몇걸음 떨어져서 따라갔으며 돌아왔을 때도 떨어져서 걸었다. 나는 그 때 아빠를 감히 부르지도 못했고 아빠의 손을 잡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또 어느 토요일엔가 아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책상에서 자다가 조심하지 않아 떨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렸던 일과 목욕탕에 들어가 목욕할 때 내가 물이 뜨거울가봐 주저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의 목덜미를 한매 쥐여박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아빠의 목도리를 한 채 거리에 나갔다가 일본 경찰을 보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
채선생은 여전히 매일 우리한테 찾아왔다. 로어책을 사가지고 와서 나에게 로씨야어 공부를 가르치고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제공해주군 했다. 어느날 나는 아버지가 사다준 헝겊인형을 업고 이웃 로씨야 가정에 가서 자랑질했는데 장난꾸러기 꼬마가 인형의 다리 하나를 잡아당겨 망가놓았다. 나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울면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보고 아버지에게 부탁해 하나 더 사달라고 졸랐다.
토요일에 아빠는 나를 데리고 상점에 가서 더 큰 인형을 사주었다. 그러나 나를 먼저 집에 돌아가라고 하고는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또 어느 하루인가 채선생이 우리에게 그림 전시회를 구경가자고 하였다. 그는 그림전시회는 아빠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열리는데 아빠 뒤에 걸린 그림은 아빠가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채선생은 전시회에서 아버지를 찾아가 말해서는 안되며 더우기 아빠라고 불러서는 절대 안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빠가 그린 그림들에는 커다란 미녀 그림 한폭이 있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깊은 시름에 잠긴 듯했다. 그 원인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아빠에게 위험하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였다. 그리하여 엄마와 나는 리별의 고통을 다시 겪어야만 했다. 1926년 가을의 어느 깊은 밤, 어머니와 나는 택시차의 뒤좌석에 앉아 점점 멀어져가는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할빈을 떠났다. 우리는 할빈을 떠난 후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갔다. 그 때 채선생은 아버지의 책을 가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원래 이 책들을 팔아서 우리에게 려비를 마련해줄 생각이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책들은 팔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을 떠나 원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청진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배표 값을 아끼기 위해 여덟살 난 나를 업고 배에 올랐으며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 드디여 룡정에 도착했다 .
그 후 아버지가 부친 돈으로 우리는 세칸짜리 초가집을 샀으며 류학생들을 숙박시켜 나오는 수입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삼촌은 내가 열세살 때 일찍 돌아가셨다. 나는 3학년에 편입하여 복학을 시작했다. 그 후 줄곧 아버지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였다. 어머니는 외삼촌, 외할아버지와 함께 할빈에 가보았지만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3년간의 노력을 거쳐 나는 녀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고중 1학년 때 어머니가 할빈에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또 1년이 지나서 천주교회의 신부 (神父)가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답장에 필요한 주소도 있었다. 회답편지를 쓸 때 사진을 보냈는데 이미 녀고생이 된 나는 아버지에게 원망을 품고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齐家、治国、平天下)’라는 구절을 써넣어 아버지를 나무랐다. 고중 3학년 때까지 해마다 한두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3학년말의 어느 날, 빠리 명소가 찍힌 엽서와 함께 그림 그릴 때 쓰는 안료와 만년필을 받았다.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온 이런 편지들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학교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진상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1937년 5월에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개인전 개최를 통해 려비를 벌고 나서 멀지 않아 곧 륙로를 통해 동방으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였다. 그후 수십년을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는 녀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목단강에서 호림으로 갔고 후에 다시 목단강으로 돌아왔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1947년에는 1남 1녀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번에는 불쌍한 어머니와 생사리별을 했다. 아직까지도 어머니의 행방을 모르고 있으니 정말 불효막심하기 그지없다. 1984년 10월, 천주교는 로마교회에서 중대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나는 교회의 대표로 유럽(로마, 프랑스)에 가서 아버지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 빠리 몽마트고지광장에 가볼 기회가 생겼다. 아버지가 발자취를 남겼던 개선문 앞에서 나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리움을 눅잦힐 수 없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52년전 아버지는 편지로 곧 프랑스를 떠나 귀국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지금 90세가 된 아버지는 가능하게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명복을 빌었다.
2005년 한국 로무현 대통령이 고 한락연선생에게 발급한 표창증서
1988년 11월 27일 저녁 8시, 갑자기 북경에 있는 외조카가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유작전시 행사를 통해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되였는데 나에게 이복 녀동생과 남동생이 있으며 그들이 북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였다. 이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였다. 당시 나는 아버지께서 아직 건재하고 계시는가고 물었는데 1947년 7월 30일 비행기 사고로 불행하게 사망했다는 것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거대한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광활한 우주공간에 또 같은 피를 나눈 녀동생과 남동생이 이국땅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더는 형제자매가 없고 혈육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혈육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여전히 같은 피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몇달간의 서신거래를 통해 이들의 사진을 보고 나니 조급한 심정은 더욱더 걷잡을 수 없었다. 쌍방의 노력을 거쳐 1989년 5월 12일 오후 4시에 나는 북경공항에 도착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만나려고 했지만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아 30분을 더 기다렸다.
공항 접대실에서 세 형제자매가 서로 만났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모님들의 령혼도 우리들 삼남매의 만남에 기뻐하실 것이다. 두 녀성을 감동시켰던 아버지, 너무 일찍 자신의 혈육들을 떠나셨지만 훌륭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 만약 이번의 미술전시회가 없었다면, 혁명의 예술가가 아니였더면 아버지의 소식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당연히 혈육 형제자매들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 모든 공덕은 류옥하어머니의 넓은 마음가짐에서 비롯됐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룡정에 딸 하나가 있다고 알려준 것을 자식들에게 알려준 것이였다. 조선족인 아버지의 자긍심과 간곡한 가르침에 감사를 드린다. 아버지 편히 잠드세요! 동무들도 안심하세요! 우리 세 형제자매는 비록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고 서로 천만리 떨어져있지만 마음은 서로 이어져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로 될 것입니다.
한인숙(1919―2010년): 한신애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길림성 룡정 태생으로 한락연과 전처 최신애 사이에서 장녀로 태여났다. 룡정 광명녀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차치순(车致醇)과 결혼한 후 목단강 호림에서 글을 가르쳤다. 지난 세기 40년대에 온 가족이 조선반도로 이주하였다. 이후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한국 충청남도로 갔고 어머니 최신애와 다른 두 아이는 조선에 남았는데 조선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되면서 소식이 끊겼다. 로후 천주교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번역: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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