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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박봉남, 황옥청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1-23 15:11:29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4군―부사급 이상 장령

박봉남(朴鳳南, 1907—1936):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당위 서기 겸 조직부 부장

원명은 김만흥(金万興)이고 강철산, 김만주(金滿珠), 오만복 등으로도 불렀다. 1907년 3월 4일(음력),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사북면에서 태여나 1912년 가을 식솔을 따라 연길현 수신향 보성촌(오늘의 화룡시 동성진 명동촌)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 이후 선후하여 오도구공립학교, 이도구 명암촌 보진학교 고급반, 룡정동흥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흥중학교를 다니다가 가정생활이 어려워 중퇴하고 농사일을 돕는 기간에 청년회를 결성하는 등 대중조직 사업에 종사했다. 1926년에 조선공산당(화요파)에 가입했고 1929년 봄 조공만주총국 집행위원, 고려공청회 만주총국 남만도위원회 책임비서가 되였다. 12월에 조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룡정반일시위투쟁을 지도했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9월에 중공녕안현위원회 선전부 부장이 되여 ‘5월 농민봉기’와 ‘10월 추수봉기’를 지도했다. 9.18사변 후 1932년에 중공수녕중심현위원회 선전부장 겸 조직부장이 되였다. 1933년초 중공밀산구위원회 서기가 되였고 2월에 중공밀산현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서기가 된 후 선후로 7개 당지부를 신설하고 항일구국회, 항일회, 밀산현반일총회를 직접 설립하거나 설립을 지도하였다.

1934년 4월, 밀산항일유격대(민중항일군) 결성을 지도하였고 같은 해 10월 이 밀산항일유격대가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개편되자 제4군 당위 서기 겸 조직부 부장이 되였다. 정치부 주임 하충국(何忠國)과 함께 제4군을 정돈하면서 제4군내 각급 당조직을 건전히 하고 사병반일회를 설립하여 제4군에 대한 당의 령도를 크게 강화시켰다. 1935년 가을, 오만복(吳滿福)이란 이름으로 벌리현 대사참(大四站), 의란현 호남영(湖南營, 현재 화남현 소속) 등지에서 확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족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조직하고 구당위원회와 청년단조직을 설립함으로써 당과 동맹군의 새로운 활동구역을 개척하였다. 이 시기에 벌리, 화천, 의란 등 현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조국광복회’를 발기하기도 하였다. 1936년 가을, 의란현 토룡산(土龍山, 지금은 화천현에 속함)에서 지주의 무장을 탈취하려다가 지주자위단에 습격당해 전사했다. (자료 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황옥청(黃玉淸, 1899—1940): 동북항일련군 제4군 정치부 주임

원명은 황형호(黃亨鎬)이고 한형호(韓亨鎬)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여나 1905년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목릉현 향양촌으로 이주하였다. 1913년에 소학교를 졸업한 후 농사일을 하였으며 1927년부터 반일혁명활동에 투신하였다. 1928년에 농민들을 이끌고 감조감식투쟁을 벌렸고 1929년에 대중들을 조직하여 항일을 반대하는 기독교 목사들과 투쟁하다가 당지의 경찰서에 두달 동안 갇혔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 중공목릉현하성자구위원회 서기, 중공목릉현위원회 선전위원이 되였다. 1932년 11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밀산현 합달하 일대에 가서 중공밀산현위원회의 건립에 참여하고 현위원회 위원 겸 서대림자와 백포자 지구의 구당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1934년에 안해 허현숙과 함께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으로 파견되여 제1퇀 제2련에서 지도원 책임을 맡았다. 1936년 3월,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이 동북항일련군 제4군으로 재편성되자 군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7년 1월, 부대를 거느리고 밀산 사인반 등 곳의 괴뢰경찰서를 습격하여 괴뢰퇀장을 포로하고 반란군 40여명을 구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 150여자루, 탄알 만 2,000발 그리고 이불, 옷 등 군용물자를 로획하였다. 2월에는 보청, 부금 일대에서 활동하며 대원들을 일본군 ‘토벌대’로 변장시켜 총 한방 쏘지 않고 악질지주의 무장을 탈취하였으며 봄에는 제1퇀, 제3퇀을 지휘하여 벌리 칠성툰의 괴뢰자위단과 청룡산의 괴뢰경찰서를 습격하여 자위단 단장을 비롯한 12명을 포로하고 총 6자루, 말 8필과 대량의 탄알과 량식을 로획하였다.

5월에는 남하하여 동북항일련군 제5군 형제부대와 힘을 합쳐 밀산현 합달하에 주둔하고 있는 위만군 제23퇀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로획하고 퇀장을 사로잡았다. 가을에는 귀순한 반일산림대 ‘점고삼’을 기반으로 하여 제4군 제3퇀을 결성하였다. 1938년 봄, 제4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을 겸하였다. 4월에 제4군 주력과 함께 제2로군의 서정에 참가하였고 이 때 안해 허현숙이 오상에서 있은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1939년 9월 28일,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 정무처 주임이 되였고 12월에 중공길동성위원회 위원이 되였다. 1939년 겨울부터 1940년 봄까지 총지휘부에 남은 부대를 이끌고 적들의 ‘소탕’에 맞서 장진화와 함께 수많은 곤난을 이겨내면서 보청과 부금 지역을 완강히 지켜냈다. 1940년 1월초, 한갈래 부대를 이끌고 벌리 쪽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벌리려고 하였지만 적들에게 포위되여 보청에 남게 되였다. 2월 20일, 보청현 오복강(五福崗)의 남부에 위치한 석회요(石灰窯) 부근에서 적들에게 포위되여 싸우다가 최광해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장령전》)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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