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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19)한락연선생을 추념하여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2-07 15:50:11 ] 클릭: [ ]

 

한락연의 수채화작품 〈비천〉(돈황석굴 249호 벽화를 모사한 그림, 47cm × 37cm, 1946년)

◆소애(萧艾)

한락연선생과 우룸치에서 악수로 작별한 지 근 한달이 되여온다. 그는 7월 30일 우룸치―란주행 군용 비행기에 앉아 동쪽을 향해 떠났는데 사흘 만에 비행기가 실종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를 관심하는 친구들은 모두 사처로 탐문하면서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믿지 않고 있다. 그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후에 《신강일보》를 보고서야 비행기가 하미―가욕관 사이에서 산봉우리에 부딪쳐 전소하였음을 알게 되였다. 누구도 이 비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락연선생이 다시 오지 못할 길을 떠나다니? 더구나 그는 한창 나이에다 사업에서 일사천리로 내달리며 예술상 큰 업적을 이루어낸 사람이 아닌가.

한사람의 죽음은 일종의 평범한 일로서 탄생이 있으면 사망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자연 규률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태산과 홍모와의 구별이 있다. 이를테면 한락연선생 같은 사람, 그는 살아있어야 한다. 왜냐면 나라에서 그를 수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의 예술이 그가 가서 개척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고대 문화 보장도 그가 가서 발굴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신강 인민들의 생활 또한 그가 가서 그림으로 그려내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비행기 사고가 사실이라면 이번 순난은 필시 우리 전반 서북에, 전반 신강에 막대한 손실로 될 것이다.

한선생은 지난해부터 올해 사이에 신강에 두번 다녀갔다. 이 혼란하고 불안한 시국에도 그는 험난을 무릅쓰고 로고를 마다하고 마치 사막의 락타마냥 묵묵히 그림 그리기와 고고학 연구라는 막중한 사업에 종사해왔다. 신강 인민들은 그의 이름에 아주 익숙하다. 하지만 그의 생활과 사업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필자는 지난해에도 한선생과 몇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그는 자신의 생평 사적에 대해 자못 상세하게 진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년을 거치면서 많은 것이 기억에서 모호해졌는지라 기억이 닿는 만큼 그의 일생과 그의 간고한 학습의 정신을 간단하게 개괄적으로 여기에 소개하고저 한다.

한락연선생은 동북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백산 흑수 사이의 동북 땅에서 자라온 그는 장대한 체구에 건장한 농민형의 신체를 갖고 있었다. 언제 새옷을 입은 그를 본 적이 별로 없으며 여름 겨울을 물론하고 허름하나 정갈한 양복 한벌이 다였으며 사시장철 려행화 한컬레 뿐이였다. 혈색 좋은 풍만한 얼굴에 호매롭고 시원시원한 성격, 거기에 소탈한 웃음소리까지 곁들이면 그는 철두철미 북방사람의 전형이였다.

그의 이런 검박하면서도 진지한 생활 태도는 아예 예술가같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반적인 예술인들에게 있는 나쁜 습성이 없었다. 무릇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는 종래로 가식없이 솔직하게 대했으며 추호의 소홀함도 없었다. 그의 생활은 더없이 규칙적이였으며 종래로 시간을 랑비하지 않았다. 일에 대해서는 ‘능력껏 감당하기’를 강구했으며 종래로 맺고 끊지 못하거나 대충 얼버무려 넘기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도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빠짐없이 조리정연하게 안배하군 했다.

20여년래 각지를 려행하면서 그는 기아에 시달리는 나날도 있었고 엄중한 페병을 앓기도 했으며 맹장 수술을 하고 치질 수술을 하고 트라코마(沙眼) 수술도 했다. 그럼에도 지금껏 이 같은 체구를 유지해올 수 있은 것은 그의 말을 빈다면 규칙적인 생활을 해온 덕이였다. 누구도 그의 겉모습을 보고는 그의 년령을 알아낼 수 없다. 실은 그는 이미 50에 다달은 나이였다.

한락연의 유화작품 〈백의신도〉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한 그림(54cm × 71cm, 1947년)

락관적인 사람은 필연코 그 어떤 일종의 신비한 창조력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평생 시종 락관적인 사람, ‘락연(乐然)’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지어진 것이였다. 그는 종래로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순경에서든 역경에서든 지정한 목표만을 바라고 노력하며 꾸준히 앞으로만 나아가군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성공할 수 있은 비결이였다.

국내에서 서양화가들 대부분이 업종을 바꾸었거나 혹은 국화만 일삼거나 혹은 벼슬길에 투신했지만 그는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시종 이 한가지 비인기 분야의 업종에 종사해왔다. 그는 빈곤을 고생으로 생각지 않고 부귀를 락으로 여기지 았았으며 시종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해왔다. 지금 그는 술담배도 멀리했다. 려행신 한컬레를 13년 신고 라사천 모자 하나를 10여년 쓰고 다닌 일화는 한동한 미담으로 전해졌다. 그의 그 려행신과 라사천 모자는 지난해 도치악(陶峙岳) 장군에게 ‘몰수’당했는데 도장군은 자신의 중절모로 바꾸어주었다.

그는 관가의 교제를 그토록 싫어했지만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절대 소홀하게 어느 한 요인에게 초상을 그려주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민족 인민들의 생활을 더 많이 그림에 담고저 했다. 그의 그림 속도는 놀라왔는데 어떤 날에는 하루에 7~8폭을 그렸다. 그가 유럽에 있을 때 페르메트라고 하는 핀란드 사람은 그를 가리켜 그림을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남들과 다른 정력을 소유한 사람이였다. 어떤 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물을 좀 마시는외에는 거의 온 종일 그림의 경지에 묻혀 이젤(画架)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전혀 피곤함을 몰랐다. 이런 그를 누가 만약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 그야말로 그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그는 절대로 그런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건설적이고 향상적이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의 필로써 인류를 인도해 행복의 길로, 안락의 길로 나아가고저 한 것이였다.

그는 1898년 길림 룡정 부근 농촌의 한 중산계급 가정에서 태여났다. 소학교 시절 그의 집안 형편은 아주 좋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학교 시험에서 번마다 도화 성적 100점을 받았다. 바로 그 때 불행하게도 부친을 여의게 되였는데 이는 그의 정신세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졸업 후 그는 부친의 창업 정신을 계승하리라 마음 먹고 전부의 부동산 문서를 백부에게 넘겨주고 부친이 남긴 수십만대의 목재도 전부 남에게 줘버렸다. 그는 독립적으로 살길을 모색하며 모친을 봉양하려고 했다.

후에 그는 부친의 친한 친구였던 고현장의 소개로 전화국에 가서 전화생이 되였다. 직장이 있게 된 후에는 더구나 공부를 잊지 않고 매일 일하는 외에 영어를 공부했으며 짬짬이 그림을 그렸다. 후에 세관에서 고중 학력을 대상한 직원을 시험쳐 모집했는데 그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시험에 참가했었다. 그런데 영어가 위주인 그 세관에 소학교 학력인 그가 합격된 것이다. 이는 그의 학습 의지력을 더욱 부추겼다.

세관에 근무하면서부터 그의 생활은 대번에 펴이였다. 세관의 경제대우는 다른 기관들보다 엄청 높았던 것이다. 그는 매달 로임에서 모친을 봉양하는외 나머지를 극력 아끼며 저축했다. 당시 세관에는 영국 화보가 많았는데 그는 이것을 보배처럼 여기며 매일 이 서양화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화보들이 바로 그의 지혜를 계발하고 그의 목표를 견정히 했는데 이 때를 그의 예술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영국인들의 중시를 받았다. 세관에서는 그의 학습에 편리를 도모해주고저 특별히 그를 외직 근무에서 내직 근무에로 조절해주었다. 허나 그는 이로써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더 배우고 싶었고 더 깊이 연구하고 싶었다. 하여 그는 저축 전부를 모친께 남겨두고 자신은 100원만을 들고 상해에로 가는 구학의 길에 올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도 그 로비 100원을 다 쓰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민국 9년(1920년)에 그는 상해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생소했고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는 망연하게 ‘멍한’ 나날을 보냈다. 100원의 로비에서 7원이 남았다. 바로 이 속수무책인 때에 한 전차공장에서 작업반장을 시험쳐 모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공장주는 그가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안되지만 감히 시험에 달라붙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일면 그 용감성에 탄복이 가 등록을 허락했다. 결과 시험 성적이 아주 좋았고 그는 공장에 출근해 작업반장을 맡고 일하며 생활을 유지해나갔다.

점차 안계도 넓어지고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사는 곳에도 익숙해지자 그는 더 배우기 위해 이번에는 인쇄공장에 시험쳐 들어가 식자공이 되였다. 여기서도 그는 근면하게 일한 데서 인차 감독으로 승진했고 그가 후에 상해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공장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예술전문학교에서 그는 가장 열심히 공부하며 부지런히 배우는 학생의 하나였다. 만화가 로소비선생이 바로 그의 동창이였다. 최초에 그는 연필, 만년필, 만화, 탄화 등 단채화를 연습하다가 후에는 수채화와 유화를 전문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 때 페병으로 한동한 휴학했었는데 교외의 들에 나가 휴양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고 도처를 다니며 속사를 했다.

학교 시절, 그는 한 녀학생(당시 상해 주둔군 참모장 하봉림의 딸)과 련애를 했는데 졸업 후에도 여전히 뜨거운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씨 아가씨는 그와 결혼하자면서 그의 생활과 지위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랑의 생활이 그가 바라는 즐거움이 아니였던 것이다. 그는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기의 리상이 있었다. 그는 물앉아버릴 수 없었다. 그는 리상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극복했다.

그는 그녀를 멀리하면서 될수록 피했지만 하씨 아가씨는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의 불길을 억누르고는 소주 일대에 가 려행하며 사생을 했다. 돌아와서는 상해에서 그의 첫 그림 전시를 가졌고 뒤이어 청년그림대회를 조직하고 《천마》(당시 상해의 간행물)에 대항했다.

이 때 그는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남의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았으며 하씨 아가씨가 수시로 보내오는 돈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하씨 아가씨가 그에게 로비를 대주며 함께 동북에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그는 단연 거절했다. 후에 양씨 성 동향인의 도움으로 로비를 해결한 락연이는 상해를 떠날 수 있게 되였다.

수년간 떠나있던 고향땅에로 돌아간 그는 한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때에야 그는 리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날마다 그림을 그렸지만 ‘몰라도 되였’듯이 리론을 아예 중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한동안 그림을 가르치면서 모은 돈 1,000원으로 뜻이 맞는 몇 사람과 함께 료녕성의 한 아늑한 시골에다 예술전문학교를 세웠다.

그리고는 도처에서 교사를 청해왔고 직접 학생들을 이끌고 려행을 다니며 사생을 했다. 식사외에는 아무런 보수가 없었고 그림을 판 돈까지 다 밀어넣었지만 학교는 결국 경비난으로 수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였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그는 학생들을 전부 다른 학교들에 보내 계속해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후 할빈에로 방랑해간 그는 한동안 한 사진관에서 학도로 지내다가 옛 동업자의 눈에 띄여 성립사범에 가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학생들 수업에 더없이 열심했는데 학생들이 모르면 자기가 더 안타까와 눈물을 흘렸다. 후에 교장이 바뀌고 새로 온 교장과 의견 분기가 생기면서 분필 생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였다.

친구의 소개로 룡구에 간 그는 경찰서에서 공무 과장을 맡게 되였는데 2년이 안되여 시정 건설이 새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본디 관직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인지라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되자 그는 즉시 사직하고 말았다. 다시 공부에 몰두하리라 다짐한 그는 얼마간의 로비를 모아가지고는 동료와 함께 프랑스에로 구학의 길을 떠났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을 넘었었다.

1929년 그는 프랑스에 갔다. 한동안 리옹에 있으면서 수중에 돈마저 다 써버리자 그는 거리에 나가 가옥 건물들을 그렸다. 어느 가옥이 보기 좋으면 바로 그렸는데 그러다 주인이 나오면 그에게 팔았다. 이렇게 매일 가옥을 그리는 것으로 최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죽어라고 프랑스어 공부를 했다.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게 되자 그는 또 풍경이 수려한 도시 니스에로 갔다. 니스에 있을 때 한 작은 층집에서 살았는데 어떤 때는 2~3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락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했다. 후에 그는 끝내 빠리에 갔고 공부하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유명한 루퍼예술학원에서 공부했다. 하기에 그의 그림은 프랑스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학교의 귀족식 생활도 그의 학습에 영향 줄 수 없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모두가 춤 추러 가고 배놀이를 갔지만 그만은 그림상자를 메고 밖에 나가 사생을 하지 않으면 박물관에 가서 고대 미술을 연구했다. 학교 시절 그는 그의 세번째로 되는 그림 전시를 거행했는데 선생님과 학생 친구들의 보편적인 찬양을 받았다. 졸업 후 그는 다시 니스에로 돌아가 려행을 했다.

이번에 니스에 와서는 더는 굶주리지 않게 되였다. 그림을 사는 사람도 많아졌고 수입도 상당히 풍족했으며 생활도 따라서 좋아졌다. 이 때 그는 매일 시장에 다니며 채를 사다 보니 우연한 기회에 한 엔지니어의 부인을 알게 되였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하지만 그는 이 아릿답고 정이 많은 오스트랄리아 녀인에게 미혹되지 않았다. 그는 극력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그의 집착에서 벗어나 다시 빠리에로 돌아왔다.

빠리에서 그는 한 공장의 경리를 맡게 되였다. 얼마 후, 공장에 질서가 잡히자 그는 자전거를 사서 타고는 또 한번의 려행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첫 역은 화란이였다. 려권이 없었기에 몰래 변경을 넘어선 그는 갖은 저애와 간난신고를 겪을 대로 겪고서야 화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화란에서 그의 네번째 그림전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당시 일부 명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여러 큰 신문들에서 전문 그를 소개했다. 그림 전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후에 한 미국 교포가 그를 청해 자기의 객실을 꾸며달라고 했는데 그는 여기서 한 대부자의 몰락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발자취는 유럽 여러 나라들을 주름 잡았다. 려행 기간, 그는 유럽인들의 갖은 비난을 다 받았다. 어떤 사람은 지어 그를 일본인으로 여겼다. 그들은 중국인들은 이발이 다 누렇다며 중국에는 그와 같은 화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는 화가 꼭두까지 치밀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외에 선전을 멈추지 않으면서 유럽인들이 과거 중국인들에 대한 인상을 돌려세우려고 애썼다.

1937년 ‘7.7’사변이 폭발하면서 항일전쟁이 시작되였다. 당시 그는 이딸리아를 려행하던 중이였는데 조국의 항전 소식을 접하고는 말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즉시 빠리에로 돌아온 그는 한 이름 있는 큰 신문의 촬영기자로 임직하고 자동적으로 국방 선전 임무를 맡았다. 그는 조국에 미안하게 생각되였다. 그는 직접 전투행렬에 참가하고 싶었다. 하여 1937년 그는 일본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귀국 후, 한동안 그는 군에서 복무했는데 대아장대첩, 서주 포위돌파에 참가했으며 중원의 여러 전장들을 다 누볐다. 후에는 중경, 서안, 란주 등지를 전전하며 수차의 그림전시를 펼쳤다.

지난해 봄에는 신강에 와서 그의 제16회 그림전을 거행했다. 그 후, 남강에 가서 고고창유적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키질천불동에서 벽화를 모사하고 돌아온 그는 수확이 컸는바 제18회 그림전(쿠처에서 진행한 한번이 제17회였다.)을 가졌다. 그는 카스, 화전 등 구역에 가지 못한 것을 못내 유감스러워했다.

후에 우원장을 따라 다시 남강으로 날아갔다 와서야 신강의 고대 문화 보장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심심히 느꼈으며 따라서 고고학 예술에 전념할 생각을 갖게 되였고 스타인, 스벤 헤딘, 황문필 등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이 곳에 와서 발굴작업을 하리라고 단단히 별렀다.

지난해 그는 거의 반년을 신강에 와있었다. 9월 란주에 돌아가 일체 준비작업을 했는데 산단을 지날 때에는 월여산단공학원의 교무를 대리하고 있다가 본 학원의 미국인 원장이 돌아올 즈음에야 란주에로 돌아갔다.

지난 겨울, 란주에 왔던 클리브스 부인은 한락연선생이 신강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고 많은 묘지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런던에 돌아가 대대적으로 선전했는가 하면 편지를 보내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올해 한락연선생은 트럭 두대를 갖추었다. 국내에서 수년간 그림을 그려 판 수입에다 몇몇 친구들의 협조를 받은 것이였다. 그는 트럭에 약품을 박아 싣고 3월에 다시 신강으로 왔다. 이중에는 두 학생도 있었다. 그는 앞으로 5년간의 예술 개발 계획을 세우고 조수 4명을 거느리고 키질에서 5개월간을 분전했으며 신고 끝에 벽화 100여폭을 모사했다. 가지고 온 약품들은 당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키질 주변 200~300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러 왔었다.

한편 이번에 특1호 동굴을 새로 발견했다. 이는 전에 사람들에게 발견된 적 없는 동굴로서 안의 벽화 모두가 완전무결한 것이였다. 역시 이번 걸음에서의 성과였다.

그의 원래의 계획이라면 먼저 키질에 도착해 벽화를 모사하고 겨울이 되면 ○○○ 등지에 가서 고고학을 연구하고 다음은 체모, 뤄챵 일대에 가고 그 다음 사막에 들어가 한차례 깊이 있는 고찰을 진행하며 남강에서의 일이 끝나면 다시 북강에 가고 그 다음 서북박물관 하나를 세운 후에는 하서주랑 일대에 가서 고고학 연구에 종사하는 것이였다.

그의 이번 란주행은 필요한 기자재 마련을 위한 것으로서 금년 겨울에 다시 남강행을 할 예정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미국 교육을 받은 그의 부인, 그리고 아이들은 또 어떠한 초조함에 모대기고 있을가! 그들의 위대한 남자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1947년 11월 9일 《신강일보》에 실림)

/번역: 《길림신문》 김정함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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