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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21)즐거운 상봉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2-24 16:39:45 ] 클릭: [ ]
1924년 1월 25일, 한국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두 수재〉라는 제목으로 한락연이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소식을 게재했다.

▨ 최룡수

(1)

5월은 백화가 만발하는 계절이라 북경의 곳곳에는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수도공항 대기청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5월 12일 오후, 일본 항공편이 공항에 도착했다. 70세가 넘는 한인숙씨는 비행기에서 내려 아들 차명철씨의 부축하에 인파 속을 헤치고 나와 두리번거리며 마중 나온 가족을 찾는다. 녀동생 한건립과 남동생 한건행을 만나자 그들은 부둥켜안고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한인숙은 눈물을 닦으며 남동생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았구나!”라고 격동되여 말했다. 이는 바로 중국의 유명 화가인 한락연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자녀들이 북경공항에서 만나는 감격적인 장면이다.

자동차가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서 한씨 자매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큰 언니는 녀동생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게 꿈이 아니겠지?”라고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70년이 되였어. 그 때 나는 출생한 지 6개월도 안되였고 7살 때 할빈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외에 그 후로 더는 만난 적이 없었어.”라고 덧붙였다.

녀동생은 “아버지가 1947년 사망했을 때 저는 3살, 건행이는 2살이였구요. 아버지에 대해 우리도 엄마의 얘기를 듣고 알게 되였어요.”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자 한녀사는 서둘러 트렁크를 열고 60여년간 간직해온 사진을 꺼냈다. 바로 1926년에 찍은 가족사진이였다. 비록 시간이 오래 지나 이미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인물의 륜곽은 아직 비교적 뚜렷했다. 앞줄에는 한인숙과 생모 최신애가 앉아있고 뒤줄에는 아버지 한락연이 서있었다. 녀동생은 벽에 걸린 1946년 가족사진을 내려 자세히 대조해보았다. 20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등 10개 국을 누볐던 그들의 아버지는 여전히 생기가 넘치고 눈부신 모습이였다. 다만 세월이 흐르고 시국이 변하면서 가족 구조가 달라졌을 뿐이였다. 사진 속 한락연은 건립을 안고 안해 류옥하가 건행을 안고 나란히 앉아있었다. 한인숙은 사진을 보면서 익숙하지 않은 한어로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혈육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2)

한인숙 모자는 북경에 도착한 후 건립의 집에 머물겠다고 고집했다.

그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조선어, 한어 그리고 영어까지 써가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언어를 넘나드는 감정을 리해하군 하였다.

그들은 함께 옛일을 회상하였다. 1919년 봄, 아버지가 고향인 길림성 룡정현(지금의 룡정시)을 떠날 때 인숙은 태여난 지 6개월도 안되였다. 1926년, 최신애는 일곱살 된 딸 인숙을 데리고 할빈으로 남편을 찾아갔다. 그들은 마가구에서 집을 세내여 6개월 동안 살았지만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바빠서 토요일 밤에만 집으로 돌아왔다. 인숙은 그들이 할빈을 떠나던 날 밤 아버지가 동료 한명을 보내 그들을 기차로 배웅하면서 자신은 전보대 뒤에 숨어 지켜보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 후에 그녀는 아버지가 당시 반동 군대와 경찰의 엄밀한 감시를 받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935년, 룡정 천주교회의 독일인 목사가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개인 그림전을 열었고 곧 돌아온다는 편지를 전해왔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최신애 모녀는 승리를 안고 돌아올 한락연을 기다렸지만 또 한번 실망했다. 그들은 한줄 희망을 안고 조선으로 떠났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모두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인숙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기다렸고 60여년을 줄곧 기다려왔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1988년 12월, 한락연의 유작 전시 소식은 한락연의 친척과 친구들이 그에 대한 추모활동을 시작하게 되였고 여러측의 노력 끝에 한락연의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맏이 인숙은 “평생 고생만 하면서 살아왔다. 어머니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면서 힘든 세월을 보내왔지… 비록 지금은 아들과 손자가 많이 있지만 형언키 어려운 고독감이 있었다”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건립은 “어머니로부터 우리에게 큰언니가 있다고 들었고 어머니도 여러 모로 언니네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종시 소식이 없었어요. 어머니한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랑 결혼할 때 아버지는 그에게 고향에서 결혼한 적이 있고 딸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셨대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고향에 편지를 보내 딸을 중경으로 데려와 공부시키자고 권했고 아버지가 몇번이나 편지를 보내셨지만 답장이 없었대요,”라고 말했다.

건립의 딸은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전까지도 저에게 ‘이모를 찾게 된다면 꼭 사이 좋게 보내라’고 얘기하셨어요.”라고 덧붙였다.

인숙은 눈물이 글썽하여 “어머니의 관심에 고맙구나. 아쉽게도 우리가 늦게 찾아오다 보니 어르신을 뵙지 못했구나.”라고 말했다.

건립과 건행의 생모 류옥하는 광동성 대산현 사람이다. 1929년에 남경 금릉녀자대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에 기독교 녀청년회로부터 미국에 파견되여 공부를 하였고 이듬해 콜롬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 남아 일하라는 미국 이민국의 초청을 거절하고 결연히 조국에 돌아와 항일구국 선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에 무한에서 항일구국 활동에 종사하는 화가 한락연을 알게 되였고 1939년에 중경에서 결혼한 후에 선후로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3)

5월 18일, 그들은 중국미술관에 갔다. 건립은 “해방 초기에 어머니가 책임지고 아버지의 모든 유작을 나라에 바쳤고 지금은 전부 이곳에 소장하고 있어요.”라고 언니에게 알려주었다. 한녀사는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5월 19일, 그들은 북경언어학원에 가서 아버지의 생전 친구인 성성교수를 방문했다. 90세 고령의 성선생은 한락연의 예술생애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성선생은 “내가 락연을 ‘중국의 피카소’라고 하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는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반파쑈 투쟁에 참가하였고 예술사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고 격동되여 말했다.

저명한 화가 황주는 일찍 글을 써서 그의 계몽선생 한락연을 기념했다. 저명한 화가 엽천여는 한락연을 ‘첫 키질벽화를 연구하는 중국 화가’라고 불렀다. 중앙미술학원 김유노교수는 한락연을 ‘우리 나라에서 유럽을 다녀온 화가중 제일 먼저 전통문화와 창작활동을 결합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문화재감정위원회 부주임인 사수청교수는 한락연의 작품을 “매점의 유작마다 전부 국보다.”라고 인정했다.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짧다 보니 그들은 아버지의 생전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뵙지 못했다. 한인숙녀사 모자는 북경을 떠나기전 팔달령에 가서 만리장성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며 친인의 유골이 뿌려진 장성 서단의 가욕관을 떠올렸다.

/편역: 《길림신문》 리전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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