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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강동순, 강신일, 리춘산...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2-28 14:03:43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5군―좌급 군관

강동순(姜東淳, 1916—1945):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2사 제6퇀 정치위원

길림성 녕안현(현재 흑룡강성에 속함) 동경성 출신이며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입당 당시 지하공작을 하였고 농민적위대 대장을 지냈다. 1932년에 녕안로농의무대에 참가하였고 1934년에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2사 제6퇀 정치위원이 되였다. 1937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8군 제2사 정치위원이 되였다. 얼마 후 다시 제5군으로 돌아갔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흑하지구에 파견되여 소부대 활동을 하였으며 당지부 서기 겸 소대장을 담임하였다. 1945년에 오운강(烏云江)반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다 희생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강신일(姜信一, ?—1939):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3사 제8퇀 정치위원

조선 경상북도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흑룡강성 녕안으로 이주하여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34년에 반일동맹군에 입대했고 1935년 2월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에 입대했다. 1936년에 제5군 교도대 청년구국퇀 주석이 되였고 1937년 10월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3사 제8퇀 정치위원이 되였다. 1939년 봄, 갓 남편이 희생된 녀전사 리생금(李生金)과 련애 관계를 맺은 후 처벌이 두려워 대오를 리탈해 제5군 제8퇀 이름으로 화천남부 일대에서 항일을 하며 대오를 발전시켰다. 1939년 가을 친형이자 제9퇀 정치위원인 강신태에게 무장을 해제당하고 나무에 묶이워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 〈쌍압산림구에서 전투하였던 항일렬사 강신일〉)

리춘산(李春山, 1901—?):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제4퇀 퇀장,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부관

1936년 2월,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제4퇀 퇀장이 되였다. 1937년초부터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군부 직속대 대장, 제5군 제2독립사 제6퇀 퇀장이 되여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했다. 1940년 10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부관이 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전투서렬》,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박동화(朴東和, ?—?):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제5군 제2사 제5퇀 정치위원

1937년 11월부터 1938년 9월까지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제5군 제2사에서 제5퇀 정치위원을 지냈다. 〈항일영웅 도정비 순국 66주년을 기념하여〉란 글에 따르면 제5군 제2사는 서정을 하는 과정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는데 1938년 8월에 이르러 사 정치부 주임 도정비(陶淨非), 제5퇀 퇀장 임덕승(任德胜)과 박동화가 거느린 일부분 대원들만 남았으며 그 후 항일산림대오를 흡수하는 등 대오를 80여명으로 확대하였으나 몇차례 전투를 거치면서 3분의 1을 또 잃는다(박동화는 9월에 있은 어느 전투에서 희생된 듯하나 확실한 기재는 없다). (자료 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박락권(朴洛權, 1917—1946):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경위대 대장

조선에서 출생했으며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로 이주했다. 1934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왕청현반일유격대대에 입대했다. 193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8년에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제5퇀 제2련 련장이 되였고 1940년 3월 항일련군 제2로군 지휘부 경위대 대장이 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쏘련 경내에서 항일련군 교도려 제4영 제7련 패장으로 있으면서 세차례에 걸쳐 동북에서 소부대 활동을 하였다. 9월에 연변경비사령부 제1퇀 퇀장이 되였다. 1946년 4월에 장춘 해방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오세영(吳世英, 1913—1940):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34대대 정치지도원

원명은 오중선 (吳仲善)이고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면 세선리에서 태여나 1914년 2월 가족을 따라 길림성 훈춘현 춘화향 원가점으로 이주했다. 1921년에 석현국립소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에 아동단에 가입했다. 1926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1929년에 농민협회 회원이 되였고 1931년에 9.18사변이 일어난 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한때 일본군에 체포되였으나 석방되였다. 1933년에 가족과 함께 왕청현 십리평항일유격구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사상학습, 군사훈련에 참가했고 아동단, 청년단을 조직했다. 1934년에 친형 오중흡과 함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입대하여 독립사 제3퇀 제5련에 배속되였다. 이 무렵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 해 여름 전투중 손가락을 잃었다. 1935년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에 배속되여 송니하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6년 1월, 당조직의 파견을 받아 액목에서 유격근거지 개척에 참여했다. 그 해 가을, 제3군으로 전근되여 제3군 제3사의 련 정치지도원, 후에는 제3사 제2퇀의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8년 5월, 흑하-눈강평원유격구를 새로 개척하는 서정에 참가했다. 1939년 3월, 제3로군 제12지대 제34대대 정치지도원 겸 지대당위원회 조직위원이 되였고 1939년 3월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34대대 정치지도원 겸 조직위원이 되였다. 4월에 수릉현의 일본 개척단을 습격하는 전투와 5월에 있은 남차별(南岔別)목장을 공격하는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40년에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의 일원으로 리수원자(璃樹園子), 조가툰(曹家屯), 풍락진(丰樂進) 등지에서 유격투쟁을 벌렸다. 10월 7일, 조원현 오목대에서 일본군과 괴뢰군의 포위를 돌파하다가 적들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자료 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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