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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29] 첫눈에 반해 평생을 함께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04 14:55:37 ] 클릭: [ ]

ㅡ원 연변연극단 배우 최금순의 연극 인생

수많은 연극 속의 인물형상과 텔레비죤드라마 《민들레꽃》에서의 할머니 역으로 조선족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 최금순, 그의 70여성상 인생길에는 과연 어떤 달고 쓰고 신 사연들이 깃들어있을가. 필자는 그녀의 삶을 살펴보았다.

연극과의 만남

1946년 금순이가 13살 나던 해에 엄마는 지병으로 돌아갔고 엄마가 없는 팔도는 이제 금순이에게 나서 자란 달라재보다 더는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한편 금순이의 아픔과는 무관하게 소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연길의 공업중학교로 진학하게 된 오빠는 쌀 여섯말을 학비로 바치라는 통지서를 아버지 앞에 내놓았다. 아버지는 반나절 집마당에 꼼짝 않고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빨았다. 며칠 후 온 집 식구는 연길로 이사했다. 쌀 여섯말이면 온 가족이 연길에서 한달은 살 수 있으니 우선 연길에 가서 다른 구멍수를 찾자는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서였다. 아들을 공부시키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아버지는 일본놈들이 버리고 간 옷가지들을 주어 시장가를 헤매며 팔았고 시집 간 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벌어온 돈으로 오빠 학비를 내고 알뜰 세간을 맡아보느라고 소녀 금순이는 자기가 서서히 처녀로 변해가는 것도 감감 모르고 있었다.

1949년 가두에 문맹 퇴치 야학교가 세워지자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열여섯살 애숭이 처녀 금순이는 뒤늦게나마 이루어지는 소원에 감사하며 열심히 야학교를 다녔다. 부지런히 쓰고 외우며 가갸거겨를 거의 익힐 무렵 야학교 선생이 연극을 한답시고 금순이를 불렀다. 연극 제목은 〈아, 그럼 공부해야지〉였다.

연극에서 금순이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공부를 해야 된다는 말, 즉 극중 할머니 대사는 금순이의 마음 그대로였기에 잘 외워서 틀리지 않게 내뱉으면 될듯 싶었으나 할머니 분장과 의상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생은 연극이라는 것은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술을 하려면 옷도 곱게 입고 얼굴도 더 예뻐야지 않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 역이니 꼭 할머니처럼 늙어보이도록 얼굴에 주름살도 그리고 옷도 할머니처럼 수수하게 입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팽팽한 이마와 볼에 주름을 그려넣고 할머니의 옷을 가져다 입으니 신통히 할머니와 같았다. 이제 머리에 흰수건까지 두르면 더 좋겠다고 했다. 싫은 대로 할머니가 아끼던 흰수건을 빌려 머리에 둘렀더니 아주 그럴듯하다면서 선생은 박수까지 짱짱 쳤다.

쓰딸린극장, 무대에서의 이름할 수 없었던 흥분은 바로 그렇게 16살 금순이를 연극에 홀랑 빠뜨려버렸다. 애숭이 처녀는 단 한번의 연극 공연 그것도 할머니 역 연기로 연극과 평생을 언약하였고 그 때로부터 기나긴 연극 인생 려정을 시작하였다.

연변연극단의 저명한 배우 최금순(오른쪽 첫사람)을 취재하고 있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방미선(가운데 사람).

연극인 남편과의 만남

룡정현문공단에서 일하던 어느 하루 문공단 연출선생이 연길에서 손님이 온다고 하였다. 얼마 후 연습장에 도착한 분의 이름은 김광출, 3지대에서 갓 전역했는데 연변문공단의 연출이라고 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예술가다운 기질이 온몸에 푹 배여서 그냥 서있어도 멋져보였고 퍼그나 상냥하고 친절해서 첫 대면임에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에게 있어서 예나제나 연출가는 지고무상의 존재인지라 금순이는 그냥 곱게 인사만 드리고 자리를 피했다.

그럭저럭 여러 사람들의 인사 절차가 끝나고 다시 연습이 시작되자 김광출 연출은 연극 연습을 하는 배우들을 하나하나 눈박아보면서 가끔 환히 웃기도 하고 가볍게 박수도 쳐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금순이는 더욱 열심히 연기에 몰입했다. 그 때 김광출 연출은 룡정에서 3일간 머무르면서 배우들과 연기에 대해서도 담론하고 가끔 한담도 하였는데 위엄스럽고 기품도 있고 또한 무척 친절해서 여러 배우들의 호감을 샀다. 특히 처녀배우들에게서 점수를 많이 땄다. 그러던 어느 날 김광출 연출은 처녀들과 말을 건넸다.

“동무들은 스따니슬랍스끼의 《배우수업》을 공부한 적이 있소?”

처녀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어색하게 손톱눈을 뜯었다. “배우수업이라니 뭐지? 쓰따…린…?”

김광출 연출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처녀들이 하나 둘 웃음을 거두고 슬슬 뒤로 물러서는데 금순이만은 공부라는 말에 끌려 그냥 자리에 남았고 김광출 연출은 다음번에 룡정으로 올 때 꼭 스따니슬랍스끼의 《배우수업》이라는 책을 가져다주마고 금순이와 약속했다.

며칠 후 금순이는 김광출 연출에게서 책을 넘겨받았다. 연극배우라면 꼭 읽어야 한다는 대단한 책을 연출가님으로부터 선사받았으니 참말로 자랑스웠지만 《배우수업》이란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아리숭했다. 하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꼭 읽은 감상을 말해야 한다는 연출가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금순이는 《배우수업》을 열심히 읽고 또 읽었다. 그 후부터 김광출 연출의 룡정 출입이 더욱 잦아졌고 금순이는 수차의 독후감 발표를 거치면서 스따니슬랍스끼가 전세계적인 연극대가란 걸 알게 되였고 또 연극배우에게도 꼭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였다.

1954년 6월, 룡정현문공단에서 연극 〈부부 사이〉를 연길 쓰딸린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였다. 공연이 끝나자 심사위원이였던 김광출 연출이 금순이를 찾았다. 또 독후감을 회보해야겠구나 생각하는데 웬걸 김광출 연출이 점심 먹으러 가자는 것이였다. 너무 좋아서 “누구랑 함께요?” 했더니 둘만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황송하고 어색하고 또 남이 볼가봐, 알가봐 두려워 멈칫거리고 있는데 다짜고짜로 김광출 연출에게 손목을 잡혀 연길시 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원동죠즈관(餃子館)에 들어섰다.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죠즈(물만두)가 무척 식욕을 자극했지만 난생처음 남자와 단둘이서, 그것도 연출가님과 식탁을 마주하니 심장이 콩콩 뛰고 다리가 호돌호돌 떨렸다.

연변연극단의 저명한 연출 김광출. 

“금순동무, 집이 어디요”

《배우수업》 독후감 회보에 대해 골몰하던 금순이가 얼결에 대답했다.

“네? 신흥가에 있습니다.”

“그럼 오늘 한번 놀러 가기오”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금순이가 황급히 잡아뗐다.

금순이에게 있어서 어쩌면 김광출 연출의 집 방문을 거절한 리유는 하도 초라한 집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다섯식구가 사는 단칸방에 삿자리 두쪽을 펴고 때가 꾀죄죄한 이불 한채가 전 재산인 집에 어찌 손님을 모신단 말인가. 금순이는 그 맛 있는 죠즈를 앞에 두고 그저 머리만 푹 숙이고 있는데 연출이 또 다짜고짜 금순이의 손목을 나꿔챘다.

아버지 앞에 이르러 김광출 연출이 “금순이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말씀을 올리자 아버지도 금순이도 아연해졌다. 다행히 금순이의 아버지가 딱 잘라 말했다.

“금순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안되오. 그만 돌아가시오.” 하지만 거기서 일을 끝낼 김광출이 아니였다. 며칠 후 김광출 연출은 아예 암탉 한마리를 안고 와서 금순이 아버지 앞에 넙적 엎드렸다.

“아버님께서 승낙해주십시오. 금순이와 결혼하겠습니다.”

그제야 금순이 아버지는 앞에 엎드린 청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너무 잘 생기지는 못해도 봐줄 만하고, 부대에서 전역한 간부라고 하니 력사는 청백할 거고, 연변가무단의 연출이라고 하니 사기군은 아닐 게고, 국록을 타니 밥은 굶지 않을 게고…머리를 돌려보니 딸이 얼굴을 확 붉히며 허리를 꼬고 있었다.

“그래, 에미 없이 고생한 금순이 네가 좋다면 하루빨리 기댈 사람을 찾아서 살림을 꾸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그래, 이 사람을 따라가거라. 행복하게만 살아라!”

아버지의 비준이 떨어지자 살진 암탉 덕분에 금순이네 집 식탁에 미래 사위를 위한 꽤 푸짐한 주안상이 차려졌다…

금순이에게 있어서 남편과의 인연도 어쩌면 연극과의 만남처럼 그렇게 운명적이였다고 할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란 말 한마디 못해보고 결혼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당연하고 또 순리였다. 연극을 사랑하기에 자연히 연출가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였고 《배우수업》을 통한 독후감 발표는 가장 정당하고 확실하고 유일한 감정 교류의 터전이자 련애의 장이였다. 그 해 말에 금순이는 여러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김광출 연출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렸다.

연기 활동 현장에서

금순이는 뜻하지 않게 연극을 만나 극중 인물들과 함께 고금중외를 주름 잡고 동서양을 넘나들며 천차만별의 직업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극 속에서 남의 인생이나마 풍부하고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극중의 인물형상 창조는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걸 금순이는 자신의 체험으로 깊이 느꼈다.

1964년 연극 〈홍석의 종소리〉에서 금순이는 부농분자 가옥화 역을 맡게 되였다. 그럭저럭 금순의 전문 연기 력사도 어언 10년을 넘어섰으니 웬만하면 맡은 역을 큰 걱정없이 해나갈 수도 있으련만 이번엔 그게 아니였다. 한 것은 맨날 정면 역만 맡아왔던 그에게 반면 역인 가옥화란 인물은 너무나 생소하고 자신의 스찔과 거리가 왕창 멀 뿐만 아니라 또 번역극이여서 한족 풍격도 함께 창조해야 했기 때문이였다. 극본을 앞에 놓고 애태우던 금순이는 책장에서 《배우수업》을 꺼내들었다. 독후감을 발표하느라고 무등 애태웠던 옛날이 새삼스레 떠올라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 때 예비신랑이 엄숙하고도 열정적으로 지도해주면서 하던 말씀이 귀가에 쟁쟁히 울려왔다.

“배우는 극중 인물의 내심을 잘 파내여 그 인물의 심리에 알맞는 내면 형상을 창조해내야 하며 그 인물에 어울리는 외면 형상을 자기 몸으로 일으켜세워야 한다. 자신을 창조적 상태에 빠져들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는 인물과 인물 사이의 내적 관계를 잘 파악하여야 하고 또한 인물이 처한 상황을 잘 분석하고 그 상황 속의 사물들을 잘 관찰하며 생활을 통한 체험에 창조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

금방 눈앞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가옥화 인물형상 창조를 생활 관찰로부터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금순이는 부지런히 시장가를 찾았다. 시장에서 한족 아낙네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옷매무시며 동작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특히 말괄양이 녀자들의 말할 때 표정과 습관적 동작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가옥화 인물에게 필요한 외부 동작을 알심 들여 섭취하였다, 또한 책, 영화에서 보았거나 혹은 들어왔던 이야기중 가옥화란 인물과 련결될 수 있는 생활 세부 추억들을 하나하나 들춰내여 인물의 외부 형상과 결부하고 가공했다. 그럴듯한 외부 형상이 창조되자 금순이는 그것을 돌파구로 삼고 가옥화의 무대 행동에 내적 동기를 부여하고 내면 형상을 창조함으로써 극중 인물과의 거리를 가깝게 했다. 결과 가옥화 인물형상은 극중 그 어느 인물보다 생동하게 창조되여 연극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하게 되였고 극단 동료들도 금순이의 연기를 말할라 치면 〈홍석의 종소리〉중의 가옥화 인물형상 창조에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극중 인물형상 창조를 위한 노력은 연극에만 그치지 않았다. 1986년 금순이는 청년작가 김훈이 쓴 텔레비죤드라마 《민들레꽃》 촬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민들레꽃》은 김씨 가문에 들어선 3대의 조선족 녀성들이 각기 부동한 력사 시기에 나라의 해방을 위하여, 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위하여 남편을 선뜻이 전선에 보내고 실제행동으로 전선을 지원하며 갖은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가한 내용이였다. 금순이는 극중 가장 년로한 시어머니 박씨 역을 맡게 되였는데 조선족 녀성의 성격적 특징을 한몸에 지니고 전반 극을 이끌어나가는 역으로서 련속드라마의 중심에 선 인물이였다. 어떻게 하면 극중의 박씨 형상을 끈끈한 생명력과 색바래지 않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민들레꽃'으로 창조할 수 있을가? 금순이는 두터운 각본 속에 묻혀살다 싶이 하면서 인물 연구에 열중하였으나 좀체로 형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극본을 안고 번뇌하는 안해를 바라보며 연출가 남편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연변은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하지 않았소? 아름다운 진달래는 선렬들의 붉은 피의 상징이고 마을마다에 세워진 렬사비는 조선족 인민들이 세세대대로 내려오면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위해 싸운 표징이니 앉아서 극본만 읽지 말고 렬사비가 세워진 마을도 둘러보고 산에 올라가 진달래도 감상하오. 연기 창조는 생활 체험이 중요하니깐.”

남편의 충고에 따라 금순이는 홀로 혁명렬사비를 찾아갔다. 비석에는 전쟁터에서 희생된 렬사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새겨져있었고 비석 앞에는 이쁜 들꽃 한묶음이 곱게 놓여져있었다. 한참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한송이 한송이 민들레꽃이 예쁜 새색시로 변하여 해방전쟁, 항미원조, 자위반격전에 나가는 남편을 지평선 저쪽 멀리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듯 천천히 하느작거리다가 다시 가리마를 곱게 낸 할머니로 변하여 눈물이 가랑가랑한 채 자기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며 텔레비죤드라마중의 박씨 인물형상이 금순이의 머리 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촬영이 시작되자 비석 앞에 놓였던 생화묶음이 자꾸 머리에 떠올랐고 새노란 민들레꽃들이 때론 예쁜 새색시로, 때론 할머니로 엇바뀌면서 연기하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샘 솟 듯했는데 촬영기가 작동을 멈추어도 흐느낌을 멈출 수 없었다. 주변의 배우들과 스탭들 모두 금순이의 풍부한 감성과 폭발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도리머리를 떠는 게 아니겠는가. 금순이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니 남편이 또 입을 열었다.

“민들레꽃은 밟혀도 차여도 다시다시 일어나는 그런 부드럽고 강인한 꽃이 아니겠소. 온실의 화초처럼 나약하고 슬픔과 울음만 있다면 어찌 남편과 아들, 손주까지 전방에 내보내고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겠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남편의 말에 정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설음이 있어도 꾹 참고 온갖 괴로움에 할퀴여도 가슴 깊숙이 감춰버리고 모진 곤난 앞에서도 민들레꽃처럼 강인하게 머리를 들고 앞을 향해 가는 게 바로 조선족 녀성 특유의 외유내강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남편의 도움으로 금순이는 박씨 인물형상을 다시 창조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관객들은 드라마 《민들레꽃》에서 그 어떤 슬픔과 괴로움이 있어도 헤프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모진 역경 속에서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않는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민들레꽃을 꼭 닮은 박씨 인물형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박씨 인물형상을 훌륭하게 창조해낸 금순이는 그 후부터 ‘민들레할머니'로 소문 났다.

평생을 함께

금순이에게 있어서 연극과 텔레비죤드라마에서 인물형상을 창조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일상생활도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여느 부부들처럼 금순이도 아들딸 낳고 살면서 겪을 걸 다 겪어내야 했고 이겨낼 걸 다 이겨내야 했다.

어느 해인가 둘째딸을 낳은 후 계획외로 덜컥 임신되여 금순이는 또 생각 밖의 고민에 시달리게 되였다. 이미 딸이 둘이나 되는데 이제 또 딸을 낳으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혹 배 속의 아이가 남자애일 수도 있다는 기대도 해보았지만 연극단 아줌마 동료들이 금순이를 이리저리 아래우로 훓어보며 연구한 결과 몸맵시를 보면 절대 아들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게 아닌가? 금순이도 자세히 생각해보니 임신 반응도 확실히 두 딸 임신 때와 비슷해서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아기에 대한 배신으로 죄스러운 마음을 달래며 병원으로 가 수술준비를 하려는 순간 연극단의 친구가 헐레벌떡 금순이를 찾아 병원으로 달려왔다. 극단 단장이 당장 금순이를 극단에 오라고 한다는 것이였다. 극단에 도착하니 단장이 금순이가 주연을 맡은 연극 〈광활한 천지〉가 이제 곧 북경의 연극콩쿠르에 참가해야 할 텐데 만약 금순이가 임신 중단 시술을 하면 무대에 오르지 못할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면 극단에서는 당에서 준 공연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당의 과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금순이는 임신 중단 시술을 그렇게 잠시 미루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북경으로 가게 되였던 계획이 의외로 무산되다 나니 금순이는 그만 임신 중단 시술 황금기를 놓쳐버리게 되였다.

그런데 웬걸 금순이가 덜커덕 떡판같은 아들을 낳게 되였다. 집안에서는 물론 연극단에서까지 경사가 났다고 야단법석이였고 남자애를 고대하던 김광출은 아들이 그들 가족에 붉은 태양마냥 희망을 주었다고 이름을 ‘홍일'이라고 지었다.

김홍일은 어려서부터 류달리 학업에 열중하고 품성도 바르더니 연변1중 재학 시절 벌써 전국학생련합회 대표로 북경에 가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녔고 명문대를 거쳐 석사, 박사 모자까지 척 쓰고 어엿한 과학연구일군으로 자라났다.

따져보면 1952년 연길시문화관에서부터 1989년 연변연극단에서 퇴직하기전까지 최금순은 60여부의 장막극에 출연했고 퇴직 후에도 연극, 텔레비죤드라마, 음력설야회와 기타 방송프로에 부지런히 출연하면서 더욱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쳐왔다. 굵직한 것만 보아도 〈심청전〉, 〈림꺽정〉,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흥부와 놀부〉, 〈어부의 집〉, 〈장백의 아들〉, 〈젊은 세대〉, 〈네온등 밑에 선 초병〉,〈홍석의 종소리〉, 〈두견산〉, 〈그녀의 길〉 등 장막연극에서 성격이 서로 다른 주인공 역을 맡았고 《키운 정 낳은 정》, 《민들레꽃》, 《아리랑》, 《샘》,  《가족사진》, 《황혼의 노을》 등 연변의 텔레비죤드라마 촬영에 거의 다 참가하면서 명실공히 조선족의 저명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약속도 없이 만나 평생 끈끈한 인연을 이어온 연극, 연극을 인연으로 연극처럼 만났던 연극인 남편, 최금순은 연극과 남편과 그렇게 평생을 함께 하였다.

/글 방미선 /편집 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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