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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86]〈오래오래 앉으세요〉의 탄생과 뒤따른 풍파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06 16:34:03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86](허동철편2)

운수로 말하면 저도 행운아이고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도 행운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 리유는 차일로 미루고 오늘은 모두다 궁금해하는 〈오래오래 앉으세요〉의 가사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는 것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장모님이 환갑 쇨 떄 축수의 술잔 올리는 허동철과 그의 안해 한경자.

1981년이면 장모님의 환갑년이였습니다. 설명절이면 장모님댁에 일가친척이 모여서 설을 쇠군 하는데 설 쇠기 앞서 갑자기 처남(한국록)이 올해는 어머니의 환갑년이라 환갑을 쇠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둘째 매부가 노래를 짓기 때문에 어머니께 남다른 축복을 드릴 수 있는 조건이 있으니 어머니 환갑에 노래를 선물하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맏사위, 맏딸, 처남댁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그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우리 집 사람은 둘째 딸인데 뒤이어 안해 한경자가 “우리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입니까. 가사에 ‘고생끝에 락을 보신 우리 어머니’라는 구절을 꼭 넣어주세요.”라고 간곡히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사는 그날로 쓰게 되였습니다.

장모님은 김씨댁 맏딸인데 아버지 김성국은 항일투사였습니다. 일본놈들에게 잡혀 여덟번이나 개산툰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비밀을 루설하지 않으니 일본경찰들은 고추물을 먹이고 발로 배를 막 걷어찼습니다. 고추물이 입으로 토해 나오고 했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이런 경력을 가진 장모님의 아버지는 ‘흰두루마기'라는 별명으로 연변당사에도 기록되여 있습니다.

우리 장모님은 항일투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소년아동단에 참가하여 머리태에 삐라를 숨겨가지고 비밀리에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정사를 갖고 있는 장모님은 스물넷 꽃나이에 불행하게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홀로 삼남매를 키우게 되였습니다.

장모님 김봉란(중간사람)과 그의 아들딸.

그러던 차에 다행으로 연변1중 종업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여 연길에 오게 되였는데 그 때는 집이 없어 자식들을 두 큰집에 나눠 보내게 되였습니다. 그 때 큰집들에서는 장모님이 아직은 나이가 청춘인데 애들을 우리가 키우겠으니 재가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장모님은 재가를 하면 자식들에게 루가 될가봐 여러 곳에서 청혼이 들어와도 재가를 하지 않고 애들을 혼자 키웠습니다. 이런 장모님이 환갑을 쇤다고 하니 제가 어찌 격동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3남매의 자식들이 한집에 아들딸 둘씩 해 모두 여섯이 있는데 거의 장모님이 키우다 싶이 하였습니다. 그러니까〈오래오래 앉으세요〉에서 나오는 화면들이 정말 우리 가문의 실생활을 담은 것이나 별 다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고생끝에 락을 보신 우리 어머니”라는 주제가 이미 섰고 우리 가족생활이 바로 가사의 화폭이 될 수 있었기에 그걸 바탕으로 하고 음미해 쓴 것이 오늘의 가사입니다.

장모 김봉란과 손자손녀들.

저는 그 이튿날 가사를 들고 이미 〈모란꽃 피였네 〉,〈우리네 자랑 꾀꼴새〉를 함께 창작한 파트너 방룡철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가사를 보던 방룡철선생은 무릎을 탁 치며 “아, 바로 이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또 작곡에 도움이 되겠는가 싶어 방룡철선생을 모시고 장모님댁으로 가 장모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경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룡철선생의 어머니도 청상과부였는지라 ‘과부설음'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마 여기서 방룡철선생님은 새로운 감수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둘은 또다시 방룡철선생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보통 창작할 때 책상에 마주 앉아 하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에 엎드려 두다리를 쭉 펴고 합니다. 방선생님이 콩나물대가리를 세우고 다듬더니 얼마 지나 한번 들어보라며 흥얼흥얼하는 것이였습니다.

방선생님은 노래가락을 정말 잘 넘깁니다. 누구도 흉내를 못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의 안해는 방선생님이 곡을 가지고 우리 집에 찾아와 가락을 넘길 때면 그냥 웃음으로, 기쁨에 잠겨있군했습니다. 방선생님은 가사가 마음에 들었는 데다 또 원래〈모란꽃 피였네 〉와 〈우리네 자랑 꾀꼴새〉에서 이미 자기의 천부적 재능을 보였단말입니다. 게다가 그 분의 어머니도 우리 장모와 같은 처지인지라 감동적인 곡이 아니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가 전국문명건설의 노래로 찬평받으면서 기자의 취재를 받고 있는 작사가 허동철(가운데)과 작곡가 방룡철(오른쪽).

쭉 뽑아내는 노래가락을 들으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대목이 “아—아—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의 “아”자에 얹힌 음조가 너무 높더란 말입니다. 저는 “노래에서 고조부분은 보통 높은 소리로 처리되지만 이 노래만은 남녀로소가 모두 부르도록 해야 하는데...고조부분이라고 해서 꼭 높은 소리로 웨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낮은 소리로, 내심으로도 고조를 형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귀띔했습니다.

그것은 1958년 제가 길림성중등학교문예경연에서 시랑송을 하게 되자 6촌형님 허동활(연변연극단 배우, 감독)한테 지도를 받고저 찾아 갔을 때 제가 감정을 더 살리느라고 줄곧 높은 소리로 랑송하다가 고조부분에 가서 더 높은 소리를 내자 형님께서는 “고조라 하여 무작정 높은 소리를 낸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더 썩 낮은 소리로도 고조를 만들 수 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그렇게 제기한 것입니다.

그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방룡철선생의 부인 김순화(연변가무단 가야금수)가 그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파트너이고 또 그들 부부의 두터운 신임에서인지 방룡철선생은 제꺽 다시 방바닥에 엎드리더니 콩나물대가리를 정리하는 것이였습니다. 잠간 지나서 나온 대목이 지금의 “아-어머니”이 대목입니다. 정말 방룡철선생님은 재간 있는 우리 민족의 작곡가입니다. 우리 민족 가요계의 빛나는 이지요.

저는 이 노래를 장모님의 환갑림박에 방송국에서 록음하여 처음으로 들려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음악부의 김태종선생이 '3.8 국제부녀절 음악특집'프로를 편집하면서 이 노래가 마음에 든다며 자기 프로에 쓰겠다고 록음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3.8절프로’에 나가기 전에 장모님께 련락을 드렸습니다. 워낙 제가 장모님의 환갑잔치날에 쓰자고 지은 노래인데 이런 사정때문에 ‘3.8절 프로'에 나가게 되니 경청해달라고 했지요. 그러니 장모님은 알겠다고 하셨습니다.‘3.8부녀절’황금시간대에 이 노래가 전파를 타고 방송되였습니다.

바로 이튿날 저는 장모님의 소감을 들으려고 아침 일찍 장모님댁으로 향했습니다. 장모님의 집은 그 때 연변1중 사택에 있었는데 연변1중 교직원 사택은 다 한줄에 있었습니다. 그 길머리에 저의 은사 리상길 수학선생님 집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 앞마당을 지나가는데 선생님이 집에서 나오더니만 다짜고짜로 “야- 좋은 노래를 썼더구만. 허동철이 정말 좋은 노래를 썼더구만!”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가 선생님한테서 먼저 인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야– 정말 눈물이 나더구만. 우리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소.” 라고 하시는 것이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부랴부랴 장모님을 찾아가 소감을 물으니 장모님은 “노래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냥 눈물이 나더라.”는 것이였습니다.

70년대 중반 중앙인민방송국 음악편집들과 함께 연변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김태종(왼쪽 첫사람), 허동철(가운데).

그리고 젊었을 때 사별한 남편이 가끔 꿈에 나타나군 하였는데 꿈에 볼 때면 방바닥에 들어서서 비스듬히 열린 정주문 틈으로 집안을 들여다 보고는 늘 섭섭해서 돌아가군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처음으로 동침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기뻤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지은 노래였는데 사위값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장모님도 감동시켰고 동네 어머니도 그리고 선생님도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니 이번에는 사회의 반응을 들어보아야 했습니다. ‘3.8절'에 방송된 다음 방송국 음악편집실에 청중들로부터 “따라배우기에 배치해달라” “매주일가에 배치해달라”라는 이런 편지가 눈송이처럼 날아들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방송국에서 지령이 내렸습니다. “노래 〈오래오래 앉으세요〉 방송을 중지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화대혁명이 금방 끝났으니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여독이 그냥 있기 때문에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장장 10년간 당을 노래하고 조국을 노래하고 수령을 노래하는 3송 노래가 차고 넘쳐날 때였는데 수령을 만수무강하라고 노래할 대신에 그것도 보통 가정 어머니를 “높이 모시고” “오래오래 앉으라”고까지 했으니 그게 될 말이냐고 생각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였지요.

1982년 대학(중앙민족대학)시절의 은사 장량오선생님(가운데)을 모시고.

문화혁명기간, 그 몇년전까지만 해도 청춘남녀들의 결혼잔치에 술도 없고 신혼부부가 어록책을 서로 교환하고 호미와 낫을 서로 결혼선물로 주고 받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아들며느리 차리는 큰상…”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그래 공개적으로 당과 맞서서 떠벌려 랑비를 하라고 고취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음력설기간에 방송하지 못한다는 령이 떨어진 것이였습니다.

그 때는 1981년이였는데 문화대혁명이 금방 지나고 중국공산당 13기 3차전원회가 열린지 얼마 안되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력사의 수레바퀴는 자기 관성에 의해 멈추지 않았단 말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그냥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문화대혁명이 끝나니 양지의 눈은 녹았지만 음지의 눈과 얼음은 그냥 녹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조국'이라든가 ‘어머니 당'을 노래할 대신 보통가정의 어머니를 노래하였으니 그때 당시에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글 구성/ 김청수

사진 영상/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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