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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2)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15 15:52:22 ] 클릭: [ ]
[대형련재]

- 김동수

제1장 정기 서린 땅

1. 뿌리 깊은 룡정

우리가 동북아의 끝없이 망망한 푸른 림해와 높고 낮은 산발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젖줄기처럼 뻗고 뻗은 크고 작은 강들과 무연히 펼쳐진 일망무제한 평야와 옹기종기 들어앉은 촌락들과 도시들을 바라보노라면 부지중 대자연의 거대한 위력과 장쾌함에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1908년 룡정 전경,멀리 비암산이 보인다.(차광범 제공)

그 가운데서 룡정은 일찍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였고 애환이 서려있고 얼이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고장이였다. 우물에서 청룡이 승천하여 룡정이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과 이야기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모두 용드레우물에 그 기원과 맥을 두고 있다. 하기에 거창하고도 파란만장한 풍진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용드레우물은 오늘까지도 훼멸되지 않고 력사의 견증자로 꿋꿋이 남아있다.

력사적,학술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만주원류고》(满洲源流考)는 “1860년 이후 원래 목단강류역의 녕안,해림 등지에서 거주하던 녀진인들은 짜리로씨야의 침략과 폭행을 피하여 연변지역으로 천이하였다. 그 때 륙도하 이남의 토성포에는 네호의 녀진인들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토성포를 태성루 혹은 4호동이라고 불렀다.”고 기재하고 있다. 개척 당시 륙도하 건너에 자리 잡고 있은 토성포에는 대부분 청나라 한족들의 저택들이 토성 안에 있었고 강 이쪽 편에는 허허벌판이 펼쳐졌는데 채소밭들이 가담가담 널려있었고 그 가운데 룡정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용드레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룡정은 해란강 하류 충적평원의 중심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1870―80년대부터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서 일찍 ‘륙도구’ (六道沟)혹은 ‘용드레촌’이라고 불렀다.

로일전쟁 이후에는 일제가 연변지구를 침투하는 거점으로 되였다. 1907년8월23일,사이또(斋藤)는 룡정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세웠다. 1909년9월4일, 청정부와 일제는 〈중한두만강변무조항〉(간도조약)을 체결하고 그 해 11월에는 룡정에 간도주재일본총령사관을 설립하였고 룡정, 국자가(현재의 연길시),두도구,배초구 등지를‘통상개방구’로 개설하였다.

룡정은 동남쪽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시와 마주보고 있으며 국경선의 총길이는 136키로메터이다.유구한 력사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룡정은 반일운동의 중심지 역할도 톡톡히 담당해왔다. 반일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효시로 동흥학교, 대성학교, 은진학교 등 만방에 이름을 떨친 학교들이 이곳에 세워졌으며 1919년‘3,13’반일시위가 이곳에서 전개되였다.

우량한 혁명전통을 가지고 있는 룡정은 부동한 혁명력사 시기에 도합 5370명의 렬사가 배출되였는데 그중 길림성렬사영명록에 기재되여있는 렬사가 4,033명이나 된다. 중국의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비이다”(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는 시구는 룡정혁명력사의 가장 생동하고 긍정적인 축도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룡정의 참모습을 시공간과 영상자료의 제한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일부 가사와 소설 속의 묘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20세기 20년대 룡정에서 류행되였던 〈룡정경치가〉에는 룡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람들의 항일의식이 단적으로 드러나있다.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오니

간도성 룡정이로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울뚝불뚝 북망산 공동묘지는

외국 사람 모여 사는 영국더기라

울울창창 우거진 진학공원은

각색 화초 만발한 호랑세계라

양복 많고 면포 많은 십자거리는

각종 화물 사고 파는 큰 장거리라

중앙해성 일광동아 작은 학교는

학문교육 전수하는 소학교 되고

룡고은진 광명녀고 크나큰 집은

중등인물 키워내는 요람이로다

장하도다 멀리 뵈는 저 대포산은

가작없는 장한 기세 자랑하고요

북쪽켠의 우뚝 솟은 저 모아산은

주야장철 우리 룡정 굽어보누나

왜놈들이 꾸려놓은 이 령사관은

무고한 우리 국민 탄압하누나

윤해영 작사,조두남 작곡으로 된 〈선구자의 노래〉는 더욱더 사람들을 격앙시키고 있다. 이 노래의 원명은 〈룡정의 노래〉라고 하는데 제목이야 어떻게 바뀌였던지 지금까지 룡정의 경물을 빌어 지어진 아름답고 생동한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아마도 이 노래가 절정이 아닐가고 생각한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레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룡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룡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거장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제2부에서 1920년대초의 룡정의 모습을 영화화면처럼 생동히 재현하였다.

“대통로의 거리들은 그 너비가 8칸혹은 4칸짜리 조선인 가옥 만하고 거리 량켠에는 많이는 기와를 얹은 목조구조의 양옥이나 중국식 건물들이 있는데 상당한 규모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천도철도(天图铁道)정거장에서 주대통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면 왼쪽에 령사관농사시작장(领事馆农事试作场),령사관주택,총령사관,선은숙사(鲜银宿舍), 대신궁(大神宫), 천보산 및 도문철도출장소 등이 있고 오른쪽에는 천도철도사무소 및 광명원이 있다. 북경거리(北京街)의 모퉁이에 있는 간도우편국에서 동쪽으로 가면 오른켠에 일본인 민회소학교, 공회당, 령사자택과 여러 내지련송점(内地连送店) 그리고 연길해관 룡정분관 등이 있는데 이곳은 회령과 상삼봉으로 향하는 거리어귀이다. 이곳에서 되돌아서면 해관 앞에는 룡정심판청, 제분소가 있는데 그 맞은켠 서쪽 량켠은 간도려관외 일본인, 조선인,중국인들의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십자가 서쪽으로 뻗은 남경거리(南京街)에는 일본인의 료리청에 뒤이어 시장이 있다.

십자가를 건너 서쪽으로 향하면 오른쪽에는 간도신문사(间岛新报社)가 있고 왼쪽에는 룡정상부국,제2국민학교,공원 및 병영이 있다.십자가에서 국자가로 가는 평양거리(平壤街)의 왼쪽에는 해성소학교,우전소,조선인 민회,조선인청년교회당이 있고 교외에 가까운 곳에는 시천교회당(侍天教会堂), 영신학교(永新中学), 룡정공회당(龙井公会堂), 대성중학(大成中学)등이 띄염띄염 있다. 그 동쪽으로는 동흥중학(东兴中学)이 있고 조선인의 민가를 지나서 병원으로 가는 길이 뻗었다. 서쪽으로 가면 왼켠에는 중앙학교,자혜병원(慈惠医院),송강려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구제회(救济会)가 있으며 광동가(广东街)모퉁이에는 조선은행 등이 있다. 동산에는 외국인의 주택, 제창병원, 은진중학(恩镇中学) 및 여러 나라 공동묘지들이 있다.”

연변박물관 김철수연구원은 “소설속에서 말하는 천도철도정거장에서 남쪽으로 뻗은 대통로란 지금의 룡정거리를 가리킨다. 이 거리는 한때 역통로라고도 불리웠다. 당시의 해관은 지금의 룡정고급중학교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마을을 앉히거나 집터를 잡을 때 풍수학에 의거하였는데 풍수학의 중심에는 산과 물,바위가 있었다.우물에서 룡이 날아올랐고 비암산(琵岩山), 대포산(大炮山),말발굽산(马蹄山),모아산(帽儿山)과 영국더기가 자리한 동산이 이곳에 혈을 박았으며 그 가운데로 해란강(海兰江)과 륙도천(六道川)이 굽이굽이 마를 줄 모르는 생명의 젖줄기를 내렸으니 룡정은 그야말로 대자연의 은총을 받은 정기 서린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기 서린 땅에는 불세출의 기재들이 태여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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