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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서광해, 오옥광, 장흥덕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18 13:44:10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6군―사급 이상 장령

서광해(徐光海, 1907―1938):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원명은 서병인(徐炳仁)이고 1907년에 조선 경상남도 밀양군에서 태여나 1913년에 료녕성 심양, 개원으로 이주했다가 1926년에 흑룡강성 탕원현 오동하로 이주했다. 1930년 가을, 감조감식을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참가하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후 중공탕원현위원회에서 조직한 화장선전대에 참가하여 탕원, 라북탄광, 금광, 및 가목사, 학강 등지에 가서 항일선전활동을 하였다. 1933년 7월, 중공탕원중심현위의 파견을 받아 ‘염라왕’ 의용군에 들어가 항일민족통일전선 사업 임무를 수행했다.

1934년 1월, ‘염라왕’부대에서 권총 두자루를 빌려 라북현 봉상진 자위단의 총 20여자루를 탈취했다. 10월에 탕원항일유격대가 결성되자 21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탕원유격총대에 입대하여 총대 부관이 되였다. 1935년 2월, 100명의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괴뢰군으로 가장하여 화천현 룡구에서 자위단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 후 또 의란현에 있는 지주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집현현 왕해촌에 있는 한간지주 하몽림을 체포하고는 가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1936년말에 동북항일련군 정치군사학교 제2기 학원 반장이 되였다. 1937년 2월,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고 그 후 중공부금현위원회 서기, 중공하강(下江)특별위원회 상무위원도 겸하였다. 그 후 보청현 등지에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고 지방당조직을 도와 대중을 발동, 조직하였으며 지하항일정권의 수립을 지도하였다.

1938년 봄, 북만항일련군의 주력이 흑눈평원으로 진군한 후 하강에 남아있는 부대를 이끌고 송화강 남안에서 계속 유격투쟁을 진행하였다. 마덕산 사장이 희생된 후 6월에 부대를 이끌고 부금현 국강로에 있는 괴뢰경찰서를 야간 습격하여 일본 지휘관, 번역관 및 24명의 경찰을 포로하였고 7월에는 쌍산에서 적군을 매복습격하여 80여명을 소멸하였다. 1938년 11월 23일, 과회산 후방병원의 일군들과 부상자 20여명을 전이시키던 도중 보청현 장가요(张家窑)에서 위만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장령전》)

오옥광(吴玉光, 1909―1938):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제4사 정치부 주임

조선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에서 태여나 1917년에 가족을 따라 길림성 화전현 대영구로 이주하였다. 당지에서 4년제 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과 함께 할빈, 아성 등지에 가서 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주하현 삼툰에 가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반일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겨울에 온 가족과 함께 라북현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1932년 7월―8월 사이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 꾸린 군정강습소를 졸업한 후 라북에 돌아가 혁명활동을 하다가 1933년말 탕원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청년대 반장이 되였다.

1934년말과 1935년초, 유격총대에 ‘민생단’ 사건이 발생하여 참모장 장추(리인근) 등이 비참하게 살해될 때 배경천, 마덕산, 최청수 등 조선족들과 함께 련루되여 고문을 심하게 받아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 번하였다. 1935년 12월 중순, 탕원민중반일유격총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으로 개편되자 제4퇀 정치부 주임이 되였고 동북항일련군 정치군사학교 제1기 학원생이 되였다. 1937년 9월, 동북항일련군 제6군이 재편성되자 제4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7년 2월 2일, 탕원현 격절하밀영에서 소집된 군정련석확대회의에 참석하고 회의 후에는 군장 겸 제4사 사장인 대홍빈과 함께 제4사의 4개 퇀을 이끌고 모아산을 중심으로 탕원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모아산밀영에 자리 잡은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 기관과 군 재봉대를 망라한 제6군의 후방기지를 보위하는 과업을 수행하였다.

1937년 7월, 제6군 모아산밀영에서 열린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 확대회의 기간에 군 재봉대 녀전사 리계란과 결혼식을 치렀는데 주보중이 사회를 맡고 조상지가 주례를 섰다(리계란은 탕원항일유격대 시절부터 함께 해온 전우로서 2008년 1월 8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림종 시 유언에 따라 골회를 오옥광과 함께 합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요하현 소가하에서 있은 한차례 전투에서 전사했다. (자료 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장흥덕(张兴德, 1909 ― 1939):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제2사 정치부 주임

1909년에 조선 경상남도에서 태여나 1926년에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였다. 1928년에 최석천이 오동하에서 꾸린 야학에서 공부하면서부터 혁명사상을 키웠다. 1930년에 최석천 등이 꾸린 군사훈련반에 참가하였고 가을에는 오동하 추수폭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 해 12월, 류동진(柳东振)을 협조하여 공청단탕원현위원회의 결성을 도왔다. 1931년에 공청단탕원현위원회가 설립되자 조직, 선전 사업을 담당하였다. 그 해 겨울, 현당위원회에서 조직한 화장선전대에 참가하여 탕원지역의 여러 향과 촌에서 항일 선전 및 강연을 진행하였다.

1934년 겨울, 탕원반일유격대에 입대하여 당지부 서기가 되였다. 1935년 4월, 잠시 유격대를 떠났다가 1936년 6월 동북인민혁명군 제6군 제3퇀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7년 2월에는 동북항일련군 제6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제2사 사장 장전복(张传福)이 료양을 하자 부대를 이끌고 굉극력(宏克力), 대래강(大来岗), 수곡류구(水曲柳沟), 화룡구(火龙沟)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렸다. 1938년 봄, 보급물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부대를 지휘하여 로등산(老等山)에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20여헥타르의 밭에 옥수수를 심었다. 그 해 10월, 동북항일련군 총정치부 주임 리조린의 결정에 따라 제11군 제1사 정치부 주임으로 파견받아 하강지역에 남았다.

1939년 6월, 제11군 제3려를 이끌고 라북현 삼간방에서 전투를 벌리던중 팔에 총을 맞고 어쩔 수 없이 강을 건너 쏘련으로 갔다. 몇개월간 치료를 받은 뒤 귀국길에 올랐는데 제11군으로 복귀하던 도중 라북 조흥진(肇兴镇)에서 적들을 조우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자료 출처: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동북항일련군장령전》)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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