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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00년](3)모택동: 건당 대업을 용감히 떠안은 위인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19 13:13:40 ] 클릭: [ ]

모택동은 일찍 “중국에 공산당이 생겨났는데 이는 천지개벽의 대사변이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각재일기》의 기재에 따르면 1921년 6월 29일 오후 6시경,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 대표들인 모택동, 하숙형은 견정한 맑스주의 신앙과 구국구민의 지향을 안고 장사 소서문 부두에서 어둠속에 작은 배를 타고 상해에서 소집되는 당의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하러 떠났다. 그들은 또 10여명 대표와 함께 전전하다가 남호의 그 붉은 놀이배에 탔다. 이때로부터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돛을 올려 먼 행항을 떠났다.

먼저 소리를 내다— 의연히 맑스—레닌주의를 선택

모택동은 20세기 초의 여러가지 신사조중에서 반복적인 비교와 감별을 거쳐 맑스—레닌주의를 선택했고 중국인민을 위해 행복을 도모하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하기로 선택했다.

1919년 7월, 모택동은 호남학련에서 《상강평론》 잡지를 창간하고 주필과 주요 집필자를 맡았다. 그는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모기에게 물리고 땀을 흘리면서 글을 썼는데 새벽까지도 휴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문장을 다 쓰고 나면 스스로 편집하고 조판을 짜고 교정까지 보아야 했으며 자기 절로 거리에 나가 팔아야 했다.

1919년 7월 14일에 출판한 《상강평론》의 〈창간선언〉에서 모택동은 ‘기회가 왔다! 세계의 대조가 더 급하게 왔다! 동정호의 갑문이 움직이더니 드디어 열렸다! 호호탕탕한 신사조가 상강 량안에서 사품치면서 흐른다! 그에 따르는 자는 살 것이고 반항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고 썼다.

5.4 혁명을 전후하여 모택동은 맑스주의를 접촉하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1918년 8월 19일, 모택동은 신민학회 회원과 호남학생들을 프랑스에 류학 보내 근공검학하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북경에 갔다.

당시, 모택동 등 여덟사람은 북경대학 붉은 층집 부근의 10평방메터도 안되는 작은 방에 들었다. 방안에는 자그마한 구들이 남쪽벽에 붙어 있었고 구들 우에는 낡은 돗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책과 려행용 손바구니들은 접어서 벽구석에 놓아야만 했다. 자그마한 불빛이 미약하게나마 방안에 비추게 하기 위해 기름등을 벽모퉁이에 걸어놓았다.

1919년 12월 18일, 모택동은 ‘군벌 장경요 축출(驱张)’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 왔다. 이는 그의 두번째 북경행이였다.

모택동은 두번의 북경행과 장사, 북경, 상해 등지에서 전전하면서 남방의 진독수와 북방의 리대소, 당시 중국 사상계의 두 거인과 교류를 했는데 이는 그가 맑스주의를 접수하는 데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북경에 도착한 후, 모택동은 오래도록 흠모해오던 리대소와 진독수를 처음 만났다. 리대소를 통해 모택동은 북경대학 도서관 관리원 일을 하게 되였다. 그가 매일 하는 일은 청소를 하는 외에 제2열람실에 새로 들여온 신문, 잡지와 열람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15가지 중외 신문을 관리하는 것이였다. 당시, 이 열람실 왼쪽에 진독수의 사무실이 있었고 오른쪽에 리대소의 사무실이 있었다.

이 곳에서 모택동은 여러가지 서적과 신문, 잡지를 많이 읽었으며 각종 학설을 연구했다. 더욱 보귀한 것은 리대소와 밤낮이 따로 없이 만나고 리대소에게서 많은 맑스주의 서적을 빌려 읽었을 뿐만 아니라 리대소로부터 자주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그는 리대소가 한 〈서민의 승리〉 연설을 듣고 리대소의 〈볼쉐위크주의의 승리〉 등 맑스주의를 전파하는 문장을 연구했는데 이런 경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짜리로씨야 10월혁명과 맑스주의를 구체적으로 료해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모택동은 서백파에서 “30년전에 나는 구국구민의 진리를 찾기 위해 뛰여다니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 다행인 것은 북경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리대소동지이다. 그의 도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고 회억했다.

1920년 4월, 모택동은 북경에서 떠나 상해로 향했는데 주요 목적은 호남 건설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였다. 진독수가 그때에 상해에 머무르면서 리달, 리한준 등과 함께 상해공산당 조기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모택동은 진독수와 여러차례 만나서 맑스주의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토론하고 호남에서 혁명활동을 전개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모택동은 후날 이렇게 회억했다. “그(진독수)가 나에게 준 영향은 다른 그 누구보다도 크다.”, “내가 두번째로 상해에 갔을 때 나는 내가 읽은 맑스주의 서적에 대해 진독수와 토론했다. 진독수는 자기의 신앙을 나에게 얘기해주었는데 나의 일생에서 관건적인 이 시기에 나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앞길을 열다—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 건립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을 건립하는 것을 채화삼과 리론적으로 탐색했다. 모택동의 건당 리론과 실천 기여는 ‘남방의 진독수, 북방의 리대소’와 함께 공산당의 창건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1920년 7월 6일부터 10일까지 프랑스에 류학간 신민학회 회원들인 채화삼, 향경여, 리유한 등 20여명은 몽타르지에서 회의를 소집했는데 력사상에서 ‘몽타니회의’라고 한다.

회의 후, 채화삼은 멀리 국내에 있는 모택동에게 세통의 만지장서를 써서 공산당을 설립해야 하는 필요성을 명백하게 론술했고 ‘공공연하고 대담하게 중국공산당을 정식으로 수립’할 것을 주장했으며 당의 성질, 지도사상 등 문제에 대해 정확한 주장을 제기했다.

1920년 12월 1일과 1921년 1월 21일, 모택동은 채화삼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채화삼의 주장에 ‘심각하게 찬동하고 표시’하며 ‘나는 한글자도 찬성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이를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 후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굴곡적인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반영한다.

채화삼과 모택동 사이의 서신거래와 탐색은 사상, 조직 등 면에서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일련의 건당 리론 주장을 제기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건당 리론과 실천에 적극적인 추동작용을 하였으며 호남 및 각지 당의 조기조직의 배육과 설립을 촉진했다. 그들의 건당 사상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일찍 설계한 청사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20년 11월, 모택동은 진독수, 리달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는데 정식으로 위탁을 받고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 건립을 책임졌다. 진독수, 리달은 상해 건당 건단 정황, 〈중국공산당선언〉, 당규약 초안 10조, 청년단 장정, 《공산당》 월간을 제때에 모택동에게 부쳐보냈다.

1974년에 장사 구소호텔에서 모택동은 호남에서의 당조직 창건 력사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호남에서 먼저 청년단 조직을 건립했고 이어서 당조직을 건립했다. 1921년에 상해에 가서 당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했다.”

당시에 모택동은 북경, 상해에서 부쳐온 청년단 장정을 동시에 받고 나서 호남제1사범, 상업전문학교, 장사시제1중학의 재학생들 가운데서 대상을 물색하고 단조직을 건립했다. 아주 빨리 팽평지, 류소기, 류직순, 장문량 등 한패의 선진 청년들을 단원으로 발전시켰다.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은 당시에 공개적인 명칭이 없었고 선언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공개적인 간행물도 만들지 않았기에 ‘잠재’ 상태에 처해 있었다. 창립시기의 지도성원인 리달이 회억한 데 따르면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 전까지 호남 공산당 조기조직에는 근 10명의 성원이 있었다. 현재 확정할 수 있는 사람은 모택동, 하숙형, 팽황, 하민범, 이례용, 진자박 등 6명으로서 그들은 당 창건 문건에 서명했다. 모택동은 소자승을 쟁취하여 이 조직에 가입시키려 했지만 소자승은 ‘교육을 도구로 하는’ 관점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이때로부터 두 사람은 제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되였다.

선구자가 되다— 가족 동원해 소산 벗어나 혁명을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이 설립된 후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모택동은 시종 의지를 굽히지 않고 집착스레 추구했으며 모든 식솔을 이끌고 혁명에 뛰여들었다.

모택동은 장사 공산당 조기조직의 성원들을 조직하여 문화서사 업무와 사회에서의 영향을 적극 확대하고 공산당원의 관점을 소개했다. 황애, 방인전이 령도한 호남로공회를 지지하고 로동자들의 사상각오를 제고시켰다. 호남제1사범의 교수개혁을 추동하고 사상 자유를 창도했다. 호남 각지에 가서 농촌의 생활과 교육 정황을 고찰하고 성의 정치, 경제, 문화, 민생, 사회 등 각 방면의 상황과 특징을 료해했다.

1921년 음력설에 모택동은 소산에 돌아갔다. 음력 정월 초여드레날 밤에 모택동은 남, 녀 동생들과 함께 화로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모택동은 국가가 어지럽고 인민이 평안하지 않으니 국가를 위해서 고향을 떠나 밖에 나가 의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동생들을 일깨워 주었다. “집의 주택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어 살게 하고 밭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어 다루게 해야 한다. 우리가 남에게 빚진 돈은 한꺼번에 갚고 남이 우리에게 빚진 돈은 없던 일로 해야 한다. 소 몇 마리는 봄갈이도 다가오니 남에게 주어 부리고 키우도록 해야 한다. 남은 알곡은 봄갈이때 이웃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이때로부터 모택동은 온가족을 데리고 혁명활동에 뛰여들었는데 선후로 여섯 식솔이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모택동은 중국 인민을 이끌고 고난과 좌절 속에서 탐색하고 비바람속에서 전진하면서 백절불굴의 영웅적 기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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