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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93] 문물 발굴에 정이 들어(김철수편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1-21 15:32:30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3](김철수편2)

박물관은 주요하게 문물을 소장하고 보관하는 기관입니다. 그럼 문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문화유물이라고도 하고 한국에서는 문화재라고 합니다.

문물은 기실 자연표본과 달라 력사의 견증물입니다. 문물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고대문물, 근현대문물, 민속문물, 사회주의 건설시기 문물 등인데 력사시기마다 다릅니다. 고대문물은 지하에서 출토되였거나 가정에서 보관한 것인데 주요하게 그 예술형태와 여러방면의 특징에 근거하여 어느 시기 문물인가를 확정합니다. 례하면 발해시기 문물들은 와당 즉 막새기와는 대부분 련화(련꽃)무늬가 많습니다.

그러나 근현대문물은 또 다릅니다. 근현대문물은 매개 문물마다 이야기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거리가 없으면 문물이 못됩니다. 례를 들어서 적어도 이 물건이 어떤 사람과 관계되고 어떤 력사사건과 관계되고 력사에서 흘러나온 이런 것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력사시기의 선후순서에 따라 물건의 질이거나 모양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근대에 와서 많은 물건들이 거의 비슷한게 많습니다.

물건의 모양새나 질에 따라서 이건 민국시기다, 이건 항일전쟁시기다, 이건 사회주의시기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이 물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거리가 중요합니다. 이 물건이 어느 력사인물과 관계있다든지, 중요한 력사문물과 관계있다든지 해야 합니다. 례를 들어 어느 가정이라면 가정의 귀한 귀물이 할아버지가 남겨놓은 거라든지 가정의 족보에 기재되여 있다든지 이래야 문물에 속합니다.

연변고고학계의 원로 엄장록.

근현대문물은 이야기거리가 없으면 아무리 금덩이라도 귀중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금이면 다 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박물관에서는 금이든, 귀한 물건이든 그것이 이야기거리가 없으면 귀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은행에서는 가져갑니다. 그다음 민속문물은 우리 조선족의 민속풍속을 반영할 수 있는 물건들을 말하는데 례하면 옷에 관련되고 먹는 음식과 관련되고 사는 집과 관련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문물들은 박물관이 존재하는 물질기초입니다. 물건이 없으면 박물관이 아닌 전람관이 됩니다. 전람관은 문물이 없거나 소장품이 없어도 사진으로 대체하여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변박물관은 1960년 4월에 설립되여서 자기의 임무와 특색으로 사업해왔습니다.

연변고고학계의 원로 박룡연.

1960년 연변박물관은 문물관리위원회 그리고 각 현의 문물간부들과 같이 전주의 문물보편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때는 기본적인 심리수자가 없었습니다. 누가 기부했거나 제보했든지 땅을 파보면 되는가 했지 어떤 물건이 대략 어느 부근에 있겠다 하는 심리수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런 보편조사를 통해 고대사에서 63곳의 유적지를 발굴하고 근현대사에서 67곳의 지하유적지를 발굴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물건을 상당히 많이 보존, 소장하였습니다. 그시기 모두 216건의 문물을 수집하고 연변의 어떤 곳에 어떤 문물이 있구나 하는 것을 대략적으로 장악하였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지방사도 정리되지 않아 지방사에 대한 력사지식이 없었습니다. 풍편에 이곳에 항일렬사가 묻혀있고 저기에 무엇이 있고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그 정도였습니다.

항일투쟁 초기에 사용했던 수류탄.

지금처럼 력사학자들이 정리해놓은 력사책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시기 문물수집은 심리수자가 없었습니다. 훈춘에 무슨 근거지가 있었는지, 연길현에 어느 렬사가 있었는지 하는것을 몰랐었습니다. 이것이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의 일입니다. 이러한 초보적인 문물보편조사를 통해 당시 일군들은 대략적으로 문물의 분포를 료해하였고 고대문물도 200여건 발굴하면서 발해유물, 원시유적이 있구나 하는 것을 료해하였습니다.

고고발굴 현장.

이 시기부터 박물관일군들은 유적지년대 짐작을 대략적으로 알게 되고 사업을 시작하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발전의 첫발자국을 내디딘 박물관이 문화대혁명 때 사업이 정지되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박물관이 다시 회복되여서야 유물수집을 다시 시작하게 되였는데 초시기에는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한다는 각도에서 모든 사업을 지도하였기에 문물수집도 이같은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때 나는 대학을 다녔는데 길림성박물관을 협조하여 길림시에 내려가서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길림시의 조선족대대인 알라디촌에 와서 수집한 물건이 주요하게 빈하중농들이 옛날에 곤난하게 생활하면서 사용한 함지와 같은 물건들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물건 수집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력사시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수집하려면 해방전쟁과 관련되는 문물이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민속문물일군들 문물연구.

박물관도 마찬가지로 농촌에 내려가 계급투쟁과 관련이 되는 유물이나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는 각도에서 유물을 수집하였습니다. 특히 로투구 만인갱전람관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만인갱, 그 때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많이 죽은 갱이라는 뜻에서였고 그래서 백골을 주제로 많이 전시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199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후 전반 사업의 중점이 제 궤도에 올라서면서 다시 문물수집이 시작되였는데 다시말하면 개혁개방이후에 문물수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습니다. 나는 1980년도에 박물관에 왔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전근해왔습니다. 박물관에 첫 출근을 한 그날에 나는 이튿날로 훈춘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준비할 새도 없이 그냥 치솔과 같은 세면도구를 들고 훈춘에 갔습니다. 면바로 훈춘 문관소 동무들과 성에서 내려온 동무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무들을 배동하여 훈춘을 한바퀴 돌면서 문물수집도 하고 조사도 하면서 처음으로 문물수집을 해보았습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문물수집사업을 해왔는 데 인제는 저는 문물에 대해 이골이 튼 전문가로 되였습니다. 상당히 많은 문물도 수집하게 되였구요.

심산밀림에서 항일의 발자국을 찾아.

박물관도 1983년도부터 1985년도까지 성문화청의 포치에 따라서 전 연변의 8개 현, 시의 문물조사를 하고 각 현의 문물지를 썼습니다. 나도 3개 현의 문물지를 썼는데 훈춘, 연길, 안도 등 현시의 문물지를 썼습니다. 연변박물관은 항일시기 유물을 수집하고 항일사적을 연구하는 면에서 전 길림성에서 비교적 유명합니다.

특히 연변에는 항일로투사들이 꽤 살아계셨습니다. 제4사 교통원 려영준, 박춘일은 생존하였고 김명주는 문화혁명시기에 사망했지만 부인 서순옥 등을 통해 사적은 많이 알려졌습니다. 5사에 있다가 6사에 넘어간 김선과 같은 항일련군 로전사들이 살아계셨습니다. 이분들이 자기가 다녔던 곳을 다 알았기에 이분들을 모시고 많이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장소도 많이 알고 항일전통도 많이 알고 술도 잘 배웠습니다. 모두들 술도 잘 들고 성격도 좋았습니다. 저의 걸음걸이가 이분들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60(세)이 다 된 분들인데 앞에서 걸으면서 “뭘 하오? 빨리 오오.” 그러니 매우 무참했습니다. 오래 되니 서로 롱담도 하면서 가까워졌습니다.

항일로전사 려영준을 모시고 사적지 답사 (1980년).

제일 인상이 깊은 것은 1980년에 연변박물관에서 항일투사 세분을 모시고 (그중 채광춘이란 분은 항일련군은 아니였지만 연통라자에서 쏘련에 갔다가 건너와서 소부대 활동을 한 분임) 박물관의 영국찌프를 가지고 왕청으로 간 일입니다. 먼저 금창(지금의 복흥진)에 갔다가 흑룡강성 동녕현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왕청에서 오후에 떠났는데 마침 10월이라 눈이 좀 내렸습니다. 그런데 도로가 너무 험해 밤이 깊도록 금창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길이 울퉁불퉁한 림업도로인데다 길에 잘못 들어서서 고생하다나니 새까만 밤에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빌어 가까스로 찾아간 곳이 황구림장이였습니다. 마침 로동자들이 소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조선족박씨라는 분이 우리를 보고 아바이들이 다 조선족들인가고 묻길래 연길에서 오는 중이라고 했더니 “다 갑시다. 우리집에.”하면서 자기집에 잡아 끄는 것이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박씨라는 분의 집에서 끓인 소고기에 우리가 가지고 간 술로 즐거운 시각을 보냈습니다.

눈속에서 점심을(1980.11, 동녕현 로흑산 포탄구).

로인들은 술에 얼근해지자 옛날 말도 많이 했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밥값도 받지 않고 휘발유도 무료로 차에 넣어주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마웠지요.

동녕현으로 가서도 많이 다녔는데 그 때 마침 눈이 내렸고 포탄구에 가서 려영준아바이가 1940년대 쏘련홍군 원동정보부의 명령을 받고 무전기를 가지고 소부대활동을 할 때의 유적을 돌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활동한 시점이 이미 30-40년이 지나다보니 지형이 변하고 나무가 우거진데다 눈까지 내리다나니 자기가 다니던 곳을 찾지 못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점심 때가 지나자 돌아올 수도 없고 과자부스레기에 가져갔던 물로 눈밭에서 점심을 에때웠습니다.

항일련군 소부대가 활동했던 밀영인 범굴에서.

범의 굴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려영준의 범 굴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하나는 정찰을 나갔다가 일본기병대를 정면으로 만나 산속으로 달려가 산굴에 숨었는데 일본놈들이 헛물을 켜고 돌아간 다음에 음페했던 곳에서 일어나 보니 뒤에 죽은 범이 있더랍니다. 범의 굴이란 말이 이렇게 나왔는데 그 때 범은 어찌된 영문인지 금방 죽었고 뼈도 생생한데다 고기도 썩지 않았기에 려영준은 칼로 고기와 뼈를 추려서 한족련락원한테 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그 굴을 찾아 불피우던 곳을 파봤는데 진짜로 범의 뼈가 나왔습니다. 이게 확실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려영준동지도 흥분했습니다. 자기가 몇십년전에 권총을 들고 일본놈들한테 쫓기워서 범의 굴에 뛰여들었던 그 시절 그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도 찍고 유물도 건지게 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자긍심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사적지를 찾지 못할 때는 산을 련속 몇개 넘어도 찾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였지요.

이런 일을 하면서 나는 경험을 모색했는데 하나는 한개 유적지를 확인하는데 세가지 표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직접 겪었거나 본 당사자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없다면 그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어서 잘 알 수 있는 사람의 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하나는 현지답사입니다. 현지에 직접 가서 문물이 나오면 더 좋습니다. 우에서 처럼 범의 뼈가 나왔다면 백분의 백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문헌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은 문헌기록이 있어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녀보면 여러가지 정황이 많은데 례하면 로투구전투같은 경우입니다. 로투구에 관해 력사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전투는 일반적으로 한번뿐입니다. 1934년도 음력설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어떠어떠하게 싸웠다는데 실제는 문헌을 찾아보면 로투구에서 전투는 3차례 있었습니다. 로투구를 진공하는 부동한 방향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일본문헌에는 언제 무슨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를 들이쳤다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료해한 다음에 유적지답사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 하나만 보고 여기요, 저기요 하고 판단하면 현지답사에서 많은 실패를 가져오게 됩니다.

글 구성/ 김태국 기자

사진 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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