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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00년](11)100년전, 중국 운명을 결정한 모택동의 선택

편집/기자: [ 정현관 ] 원고래원: [ 학습강국 ] 발표시간: [ 2021-01-25 15:15:58 ] 클릭: [ ]

100년전의 1921년 양력 새해, 호남성 장사는 흰눈이 흩날렸다. 10여명의 젊은 지식인들이 5.4 선진문화로 탄생한 구국조류를 밟으면서 조종거리 문화서사(潮宗街文化书社)를 찾아 신민학회 장사회원 신년대회를 소집했다.

회의는 아주 볼품없는 쪽방에서 소집됐지만 토론하는 화제는 중국과 세계를 개조하는 방법과 목적이였다. 28세의 모택동은 회의에서 두번 발언했다. 이 두번의 발언은 나중에 〈신민학회 장사회원대회에서 한 발언〉이라는 제목으로 《모택동문집》 제1권에 수록되였고 전책의 시작편으로 되였다.

1918년 4월에 모택동, 채화삼, 소자승, 하숙형 등 13명은 채화삼의 집에서 신민학회를 설립. 학회는 ‘학술 혁신, 품행 지려, 인심풍속 개량’을 취지로 했다. 회원들에게 허위적이지 않고 나태하지 않으며 랑비하지 않고 도박을 하지 않으며 기생놀이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1918년에 설립되여서부터 1921년 중국공산당 창건까지 신민학회는 3년간 활동하면서 선후하여 약 80여명의 회원이 있었다. 이중 대부분은 혁명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신민학회 성립대회 옛터.

모택동은 발언에서 “나는 로씨야식의 혁명을 찬성한다. 이는 여러갈래 길이 통하지 않았을 때 발명한 새로운 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등 방법과 비교하면서 “격렬한 방법의 공산주의, 즉 로농주의 계급독재의 방법으로 예견된 효과를 얻을 수 있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을 《모택동문집》의 시작편으로 한 것은 모택동이 맑스—레닌주의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는 표징이다. 사실상 한달전에 모택동은 프랑스의 민주학회 회원들인 채화삼, 소자승 등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전문적으로 큰 편폭을 들여 중국과 세계를 개조하는 방법과 목적에 대한 문제를 토론했다. 모택동은 편지에서 ‘채화삼은 로씨야식의 혁명 방법으로 중국을 개조하려고 하나 소자승 등은 로씨야식의 방법을 반대했고 온화한 혁명과 교육 방법을 주장했다.’고 썼다. 모택동은 또 ‘채화삼의 주장을 동의하고 소자승 등의 주장을 반대한다.’고명확하게 표명했다. ‘나는 교육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때 로씨야식의 혁명은 여러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한 길이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이 공포스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모택동의 이번 편지는 나중에 시작편으로 편성되여 《모택동서신선집》에 수록되였다.

“막다른 골목에 빠져 모든 길이 막혔다.”

모택동은 근대 이래 유지인사들의 민족부흥의 길을 탐색하는 간고한 려정을 이처럼 형상적으로 비유했다. 1840년 이래 구국탐로, 민족부흥이 근대 중국의 기본 정치주제였다.

19세기 하반기, 중국인들은 이미 여러가지 방법을 시행했다. 서양의 소총과 서양의 대포 그리고 근대 공업기술의 양무운동을 그대로 옮겼다가 중국을 구하지 못했다. 상층 사대부들이 광서황제의 지지에 의존한 개혁인 무술유신운동은 실패했고 하층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의화단식의 구식 반항운동도 실패했다. 손중산이 령도한 자산계급 혁명도 중국의 운명을 개변시키지 못했다.

1920년 7월, 프랑스로 고학을 떠난 신민학회 회원들은 프랑스 몽따니(蒙达尔尼)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중국과 세계를 개조하는 것’을 신민학회의 주제로 토론, 결정했다. 하지만 개조의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채화삼 등은 맑스주의를 받아들이고 공산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으며 로씨야식의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다른 회원들은 교육을 도구로 ‘온화한 혁명’을 주장했다. 8월 채화삼, 소자증, 리유한 등은 각기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의 관점을 서술했다. 아는 회원들의 단체 사진

만수천산을 찾아도 들어갈 문을 찾지 못했다. 정신적인 고통은 한시대 또 한시대 중국의 유지인사들을 괴롭혔다. 중국의 출로는 어디에 있을가?

1899년 2월, 상해광학회에서 출판한 122호 《만국공보》에는 처음으로 중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름인 맑스와 엥겔스가 등장했다. 전교사 이제마태(李提摩太)가 번역하고 중국 전교사 채이강(蔡尔康)이 쓴 《대동학》중에서 ‘수많은 로동자들의 령수가 있으니 바로 영명한 맑스이다.’라고 밝혔다. 이후 주집신(朱执信), 진망도(陈望道), 마군무(马君武), 류사배(刘师培), 강항호(江亢虎) 등 인사들도 맑스의 학설에 대해 서술했다. 일본어로 된 맑스 사회주의 학설을 소개한 저작들도 중국어로번역되여 상해에서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때 맑스 혁명리론과 사회주의 학설은 단순히 하나의 새로운 사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사상은 실천으로 조명해야 인류의 력사 선택에 근본적으로 영향준다.

1914년, 인류 력사상 첫 세계적인 대재앙인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했다. 4년간 지속된 이번 전쟁은 서방국가의 자본주의제도가 고유하고 있는 사회 모순을 그 어느 시기보다 더욱 날카롭고 선명하게 폭로했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경제의 불황과 사회의 불안정은 서방 자본주의 문명에 심취해 있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조국을 향한 나의 마음은 멈출 수 없고, 나의 조국과 고향은 폭풍우와 비바람에 흔들리네!(灵台无计逃神矢,风雨如磐暗故园)” 중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 암흑 속에서 힘겹게 탐색하고 있을 당시, 1917년 로씨야는 10월혁명의 승리를 거두었고 로동인민들을 주인으로 하는 로농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처음으로 사회주의 리론학설이 생생한 현실로 실현되였다. 이는 새세기에 한줄기 서광과 같이 암흑했던 중국의 앞길을 조명했다.

이로 인해 로씨야 혁명의 길을 걷는 것이 당시 중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의 선명한 주장으로 되였고 맑스주의 전파도 5.4 신문화운동의 새로운 사상조류로 되였다.

1918년 11월,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 리대소는 천안문광장에서 ‘서민의 승리’와 〈볼셰비즘(布尔什维主义) 승리〉를 제목으로 하는 두번의 연설을 했다. 리대소는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사회주의의 승리이다. 금후 세계는 필연코 붉은 기발의 세계로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날, 리대소 연설 현장의 수많은 청취자들 가운데는 25살의 호남 청년 모택동도 있었다. 이번 연설로 인해 모택동은 10월혁명과 맑스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료해하기 시작했고 로씨야에 정황에 관한 수많은 서적들을 열독했다. 모택동은 후날 에드가 스노(斯诺)에게 “당시 《공산당선언》, 카우츠키(考茨基)의 《계급투쟁》, 커크업 (柯卡普)의 《사회주의사》, 이 3권의 서적을 읽었다.”다고 말했다. 이는 그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고 맑스주의 신앙을 수립하게 하였다. 1920년 여름, 그는 맑스주의자로 되였다.

1921년 양력설, 모택동은 장사에서 신민학회 회원 18명을 초청해 문화서사에서 신년대회를 소집했다. 회의는 3일간 지속되였다. 격렬한 토론을 거쳐 회원들은 신민학회의 취지를 ‘중국과 세계를 개조하는 것’으로 정했다.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에 대해 모택동은 하숙형 등 12명과 함께 볼셰비즘을 찬성하고 동시에 공산주의 신양을 표명했다. 사진은 《신민학회 회무보고》에 기록된 모택동이 대회에서의 발언(부분적) 내용이다.

맑스는 “리론이 한 국가에서의 실현 정도는 항상 리론이 그 나라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정도에 결정된다.” 하나의 학설이 어떻게 정확하든, 어떻게 새롭든, 어떻게 선전하든 사람들의 내적인 강렬한 수요가 없다면 그 학설은 력사의 선택 대상으로 될 수 없다. 맑스—레닌주의 혁명적 리론은 당시 힘겹게 출로를 찾고 있는 중국의 선진적인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답안을 주었다. 1921년 여름, 모택동을 포함한 10여명의 청년들은 맑스—레닌주의 사상적 무기를 추켜들고 천지를 개변시키려는 기백으로 상해에서 중국 근대사의 천지개벽의 서막을 열었다.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던 것이다.

중국 혁명의 홍색 항선이 이렇게 출항했다.

이 작은 붉은 배가 인민의 중탁과 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 파란만장한 100년의 려정 속에서 급류와 험탄, 거칠고 험난한 파도를 가르며 오늘날의 중국을 이끌고 안전하고 멀리 항행할 수 있는 대형 항선으로 거듭났다.

/학습강국, 편역: 정현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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