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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고원명, 김탁, 김품삼, 리일평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21-01-27 13:43:47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7군

(요하반일유격대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 동북항일련군 제7군)

△ 하농공의용군

1932년 10월 6명으로 구성된 권총대 결성

1933년 4월 21일 요하로농의용군 편성

1933년 5월 동북국민구국군 특무영 편성

1934년 2월 3일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 설립

1936년초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 설립

1936년 11월 동북항일련군 제7군 설립(3개 사로 구성)

1940년 2월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편입(제4, 제5, 제7, 제8, 제10 군으로 구성).

동북항일련군 제7군―사급 이상 장령

고원명(高遠明, 1899—1936): 동북인민혁명군 제7군 군수처 처장

조선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원명은 고석호(高錫浩)이고 김일영(金逸永)이라고도 불렀다. 1920년대 중반에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으며 룡정 대성중학교에서 공부했다. 1926년에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문우회에 가입했다. 8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가입하여 동만도구역국 제4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남만도 제2구 간부로 있었다. 1930년에 흑룡강성 탕원현, 요하현으로 활동 지역을 옮겼으며 그 곳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에 동북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으며 1936년 11월에 제7군 군수처 처장이 되였다. 1936년 12월, 흑룡강성 요하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전투서렬》,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김탁(金鐸, 1901—1938):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2사 참모장

1901년에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나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에 동북으로 이주하여 1932년에 흑룡강성 무원현 대한천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선후로 소학교 교원, 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혁명활동을 한 최석천을 알게 되면서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31년에 무원현에 중공요하중심현위원회 소속 당지부가 설립되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7월―8월,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 꾸린 군정강습소에 참가하였다. 1933년 4월, 요하로농의용군이 창설되자 대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1933년 5월, 요하중심현당위원회에서 군정강습소를 다시 꾸리자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가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자 제2사 참모장이 되였다. 1938년초에 제7군 정치부 선전과장으로 임명되였다. 2월 제7군 제1사 제2퇀에 가서 선전 사업을 하다가 제2퇀 퇀장 왕봉림(王鳳林)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김품삼(金品三, 1908—1940):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군부 비서장, 당특별위원회 서기

원명은 김만종(金万鐘)이고 료녕성 창도현 보리진(宝利鎭) 사람이다. 21살에 동북대학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으며 9.18사변 후 귀향하여 두차례나 관내로 들어가 항일을 하려고 관계망을 찾았다. 1935년 2월, 꽤 많은 자금을 마련하여 흑룡강성 부금현 화마촌에 들어가 반일회에 참가하였다. 후에 호림, 요하 일대에서 혁명활동을 하다가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2사에 들어갔다. 같은 해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제4군 제2사에서 련 지도원, 사 정치부 과장을 지냈다. 같은 해 7월, 중공호림현위원회 위원이 되였으며 1938년 1월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사당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같은 해 9월,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군부 비서장, 당특별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1939년 봄에 교도퇀 정치위원, 제2지대 교도대대 정치위원을 지냈다. 1940년초, 호림 독목하구(獨木河溝)에서 적들의 포위를 뚫고 나가다가 전사했다. (자료 출처: 《중국공산당흑룡강성조직사자료》, 《동북인물대사전》)

리일평(李一平, 1910—1939): 동북항일련군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원명은 리웅선(李雄善)인데 리철수(李哲秀), 리창해(李昌海)라고도 불렀다. 1910년 9월에 조선 함경남도 홍원군 룡운면에서 태여났고 1920년 8월 아버지를 따라 중국 길림성 왕청현 북하마탕 대방자툰으로 이주하였다. 1926년에 소학교를 졸업한 후 길림성 룡정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8년 가을부터 녕안, 밀산, 보청 등지에서 교사 신분으로 혁명활동을 하였다.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흑룡강성 무원으로 파견되여 공청단 사업을 하였으며 9.18사변 후에는 요하, 호림 일대에서 대중들을 조직하여 반일 활동을 하였다. 1932년 가을, 중공요하현위원회 위원이 되여 요하 삼의툰에서 있은 군정훈련반의 준비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4년에 조직의 동의를 거쳐 리창해(李昌海)라는 이름으로 반동조직인 ‘민회’(民會)에 가담하여 문서가 되였다. 문서라는 공개적인 신분을 리용해 유격대에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여 보냈으며 적지 않은 군수물자를 제공하였다. 또 직무를 리용해 지하당 공작원들과 유격대원들에게 ‘민회’ 증서를 발급하여 항일투쟁을 하는 데 편리를 제공하였다.

1934년 4월, 중공호림구위원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서기가 되였고 1936년 7월 중공호림현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그 해 11월, 동북항일련군 제7군이 설립되자 부대로 전근되였으며 얼마 후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얼마 후 제7군 당위원회 특별위원회의 파견으로 3개 산림대를 개편하여 설립한 보충퇀에 가 퇀장이 되였다. 1939년 8월, 산에서 구원한 2명의 로동자를 통해 1938년 하반기부터 일본군이 관내에서 2,000여명의 인력을 모집하여 호림 일대에서 대형 지하군사시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8월 5일 밤 이곳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괴뢰군 30여명, 괴뢰경찰 18명, 적 추격부대 10여명, 일본군 지휘관 1명을 소멸하였으며 100여명의 로동자들을 구출하였다. 구출된 로동자들은 보충퇀과 제5군 제3사 제9퇀에 가입하였다. 10월에 요하로 전이하던 도중 지병으로 하여 더는 부대를 이끌고 행군할 수 없게 되자 조련장의 호송하에 아부심강기슭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이튿날 근처를 지나던 일본군 ‘토벌대’와 조우하여 싸우다 적 12명을 사살하고 전사했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장령전》, 《동북항일련군명록》)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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