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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100년](19)중화인민공화국 국호 탄생기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인민정협보 ] 발표시간: [ 2021-02-02 11:38:40 ] 클릭: [ ]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성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그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은 새중국의 국호가 되여 세계에 울려퍼졌다. 이 국호가 확정되기까지는 많은 론란이 있었다. 특히 략칭 사용을 놓고 토론이 치렬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모를 것이다. 이 문장은 바로 국호를 결정할 때 있었던 배후의 이야기이다.  

중국공산당 초기의 건국 구상

중국공산당은 창건된후 곧 새중국의 창건을 분투목표로 삼았다. 제2차 당대회때 군벌할거 혼전 국면에 직면하여 당은 공화국을 세울 구상을 제기하였다. 1931년 중국공산당은 강서 서금에서 ‘중화쏘베트공화국'을 건설했는데‘쏘베트'는 쏘련 색채가 선명했다.

항일전쟁시기, 민족모순이 첨예해졌다. 1935년 12월, 와요보회의에서는 쏘베트공농공화국 및 중앙정부는 ‘쏘베트인민공화국’으로 고칠 것을 선고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새로운 형세와 임무아래 내놓은 한차례 조정이였지만 의연히 ‘쏘베트’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1936년 8월, 전민족 항전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보내는 편지〉에‘쏘베트인민공화국’을 ‘민주공화국’으로 고치고 ‘우리는 전중국이 통일된 민주공화국으로 협조한다’고 표했다.

1940년, 모택동은 신민주주의론에서 신민주주의혁명은 어떻게 국가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회답을 발표했다.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지금 창건하려는 중화민주공화국은 오직 무산계급 령도하의 반제반봉건적인 모든 사람들의 련합독재의 민주공화국이다.’

여기서 ‘민주'와 ‘공화'는 중국공산당이 건국할 때 중요한 가치 지향점이였음을 보여주었다.

황염배, 장지양이 조목별로 쓴 진술서 제출

1948년 4월 말, 중국공산당은 정세를 파악하면서 ‘5.1 구호’를 반포하고 각 민주당파와 각 인민단체들이 신속히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여 인민대표대회를 실현하고 소집해 민주련합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구호는 협상을 통해 새 중국을 창건하는 서막을 열어놓았으며 각측에서 적극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택동은 8월 1일 각 민주당파에 보낸 답전에서 독립, 자유, 부강, 통일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그 후 한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됐다.  

1949년 6월 15일, 신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가 개막되였다. 모택동은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에서 "중화인민민주공화국 만세!"를 웨쳤다.

국가칭호는 국체와도 관계된다. 신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에 참석한 일부 대표들은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이라는 명칭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기하였다. 황염배, 장지양은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에 제의의 국명을 ‘중화인민민주국'의 략칭 ‘중화민국 '또는 ‘중화민주국'으로 정하자’는 내용의 진술서를 띄웠다.

진술서에 따르면 우리 나라 국명은 원래 ‘중화인민민주공화국' 을 ‘중화인민민주국'으로 바꾸고 ‘중화민국' 또는 ‘중화민주국'으로 략칭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하면 ‘중화사회주의민주국’으로 개칭할 수 있다.그들은 4가지 리유를 내놓았다.

첫째, ‘민주’, ‘공화’는 두 글자를 함께 렬거할 필요가 없다. 우리 나라 현대에서 사용한 ‘공화국’이라는 명사는 순전히 서양어 Republic을 번역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 경전에서의 ‘공화’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관계가 없다. 서문 ‘Republic’이란 말이 당초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Democracy)와 (Republic)은 원래 뜻이 비슷하지만 전자는 민주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후자는 민주주의 국가를 가리키는데 서문에서 ‘Democracy '를 글자로 그 뿌리로 하여 국가를 지칭하는 말은 없으며 ‘Republic ', 즉 이른바 ‘공화국'은 현존 명사이다.

둘째, 로므니아, 체스코, 슬로바키아, 쏘련 등의 국명을 ‘공화'로 번역할 수 있다. ‘민주', ‘공화'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셋째,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이 너무 길어서 ‘공화’를 쓸 필요가 없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스스로 줄이는 것이 가장 편하다.

넷째, 략칭은 ‘중화민국’, 비록 명칭은 비교적 오래 되였고 ‘중화민주국’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단어지만 ‘중화민국’이라는 네 글자가 가장 짧고 편리하기 때문에 결국 페기되지 않을 것이다.

황염배, 장지양의 의견은 준비위원회 상무위원회의 중시를 받았다. 비서장 리위한은 6월 19일 "주임, 부주임 위원과 각 조장들에게 사본을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장해약, 새 중국 이름 지어

신정협 준비회의 상무위원회는 6개 소조에서 관련 준비사업을 담당했는데 그중 제4조는 기조 정부 조직법 초안작성을 담당했고 동필무가 조장을, 황염배가 부조장을 맡았다. 1949년 6월18일, 제4조는 제1차전원회를 열고 폭 넓게 의견을 교환한 후 장지양을 소집인으로 한 7인 위원회를 추천하여 토론을 준비했다.

6월 23일, 기조제강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개최했다. 동필무는 토론 요점을 제기하고 “국가 명칭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다고 제기했다. 토론에서 장동손은 “국가 명칭과 제도를 비해볼 때 제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림려유는 국가 명칭은 어느 것을 사용하든 모두 ‘중화민국'이라고 하며 국가 성격 표명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제기했다.

장해약은 “몇몇 선배분들께서 중화인민민주공화국 명칭이 너무 길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하길 원하던데 제가 볼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인민민주국보다 좋은 것 같습니다. ‘인민’이라는 두 글자가 있으면 ‘민주’라는 두 글자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인민이 민주적이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민주 이 글자Democracy는 희랍문자에서 온 글자이고 인민들도 동의합니다.” 그는 이 명칭은 길긴하나 해석이 비교적 쉽다고 하면서 “공화이지 독재가 아니고 민주이지 비군주가 아닌 인민이며 부르죠아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신중성을 기하기 위해 이번 회의는 ‘중화인민민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민주국 (략칭 중화민국)'을 제출해 대표들의 토론을 위한 것이다.

7월 8일, 제4소조는 제2차 전원회의를 열고 제강기조위원회에서 제기한 ‘정부조직 법중의 기본문제’를 토론했다.

대표들은 새중국의 국가 명칭, 국가 속성, 정부조직의 기본원칙, 최고정권기관 등 문제들을 둘러싸고 토론하였으며 동필무, 장해약, 염보항, 왕곤룬, 장지양 등 5인조로 구성된 기조위원회는 기조정부조직법초안을 담당했다. 기조위원회는 중앙인민정부조직법의 초안에 기초하였고 각 소조회의에서 토론되였으며 전서승, 왕지상, 등초민 등 법학전문가들의 의견을 문의했다.

8월 17일, 제4소조 제3차 전원회의에서는 정부조직법초보초안을 수정, 채택하고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상무위원회의 심의에 회부하였다. 이번 회의 기록자료에 따르면 ‘신정치협상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후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개명됐고 국가명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정해졌다.

박일파는 "1949년 8월 14일 중앙정치국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에서 첫째, 신정치협상회의를 정식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정협)로 명명하고 둘째, 국호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하였으며 셋째, 9월 10일 정식회의를 개최(이후 문서 작성이 안 돼 9월 21일로 수정) 했다”고 회억했다.

9월 7일, 주은래는 정협 대표 및 각 분야 관련 인사들에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몇가지 문제에 관하여 보고했다. 국가 명칭에 대해 그는 “중앙정부조직법초안에서 중화인민민주공화국에서 ‘민주’ 두 글자를 없앴으며 이를 없앤 원인에 대해서 ‘민주’와 ‘공화’는 같은 뜻으로 중복될 필요가 필요가 없으며 국가명칭으로 볼 때 ‘공화’가 더 합당하다고 설명했다.

주은래는 “더 나아가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국명은 ‘중화민국'으로 공화주의라는 뜻이지만 완전하지가 않고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리해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구민주주의와 신민주주의를 구별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왜냐 하면 신해혁명 당시에는 10월혁명이 아직 성공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구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후 완전하지 못한 구민주주의로부터 완전한 신민주주의에로 진보하였다. 오늘날 국명이 나라의 본질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이여야 한다”고 말했다. 

9월 17일,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조직법 초안, 정부조직법 초안과 공동강령 초안을 거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원회의 토론에 회부했다.

전원회의 문건에서 새 국명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되여 있었다. 동필무는 9월 22일 전원회의에서 정부조직법 기초과정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총강령의 첫번째 문제는 국가명칭이다. 그는 “원래 지난 날 많은 사람들이 글이나 연설을 할 때 모두 중화인민민주공화국을 사용하였다”고 말했다.

황염배, 장지양 두 선생은 일찍 중화인민민주국을 쓸 것을 주장하는 략문을 쓴 적이 있다. 장해약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낫다고 했고 우리는 현재 그 이름을 채용했다. 그것은 공화국이 우리 국체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오늘 신민주주의 중국에서는 ‘인민'이란 두 글자는 로동자, 농민, 소자산계급 및 민족자산계급을 가리키고 있다. 이미 인민민주독재의 뜻을 표달했으니 ‘민주'라는 두 글자를 다시 중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였다.

‘중화민국’으로 줄일 것인가, 아닌가?

국호 론란이 가장 큰 것은 략칭 문제였다. 황염배, 장지양의 조진중이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이미 ‘중화민국'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다. 정치협상회의에서 토론할 때 일부 대표들은 략칭을 공동강령에 써넣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이것은 습관적인 칭호로서 강령에 써넣으면 통일전선내의 여러 조직들을 돌볼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대표들은 ‘중화민국’은 구중국의 통치를 대표하고 신중국은 신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중화민국’약칭을 공동강령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뢰결경,장해약 등은 ‘중화민국'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통일할 것을 건의했고 대표들은 ‘중화민국’이라고 쓰지도 말고 ‘중국’이라고 쓰지도 말며 ‘중국’은 용법에 익숙한 것뿐이라고 제기했다. 의견을 통일할 수 없는 정황에 비추어 인민정협 공식회의에 넘겨 토의할 수 밖에 없었다.

신정치협상회의 준비위원회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새 중국의 명칭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원회의에 제출한 문건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여 있다. 공동강령과 정부조직법의 국호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된 이후 ‘략칭 중화민국'이라는 여섯글자가 괄호 안에 꽂혀 있었다. 원고지에 적힌 략칭 중화민국 구절은 빼야 하는 걸가?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원회의가 소집된 후 회무가 막중한 와중에도 주은래는 9월 26일 오전 11시 반, 동교민항 6국호텔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들 대부분은 70세를 넘긴 고령이였으며 장원제, 하향응, 주선배, 부정일, 마인초, 서특립, 오옥장, 장란, 황염배, 간옥계, 진숙통, 심균유, 진가경, 사도미당, 림백거, 장난선, 곽말약, 림안빙 등이였다.

연회에 앞서 주은래는 먼저 말문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연회에 초청된 분들은 모두 신해혁명 시절의 선배님들이신데 우리 나라에는 '년장자에게 가르침을 부탁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오늘 회의가 바로 그러합니다. 문건을 토론할 때, 여러 분은 국호 ‘중화인민공화국’아래에 ‘략칭 중화민국’이라는 괄호가 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 략칭을 두고 두가지 부동한 의견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필요없다고 합니다. 상무위원회에서는 특별히 저더러 어르신,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청하여 어떤 고견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로선배들은 ‘중화민국’ 이 네 글자에 옛정이 남아 있었다.

황염배는 발언에서 “우리 나라 로백성 교육은 매우 락후한바 감정상 습관적으로 ‘중화민국’을 사용한다. 일단 이를 개변하면 불필요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 3년이 지난 뒤 략칭을 떼여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신해혁명에 참여한 적 있는 72세의 하향응은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중화민국’은 손중산선생이 혁명을 일으킨 결과이고 수많은 렬사들의 선혈과 바꿔온 것이다. 국호에 관하여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면 만일 그대로 그것을 쓸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지만 모두가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끝까지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어 발언한 주선배는 청조때의 진사로 신해혁명후 38년간 은거해왔다. 그는 략칭을 쓰는 것에 대해 견결히 반대했는데 “내가 략칭을 반대하는 리유는 ‘중화민국’은 그 어떤 대중도 호감을 가지지 않는 명칭이며 20여년간 장개석으로 인해 말로 형용할 수 없게 되였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말하면 이번 인민혁명과 신해혁명의 성격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표시할 것을 주장한다”고 말했다.

81세 고령의 미국화교령 사도미당은 북방어를 알아듣지 못한 관계로 그의 비서 사도병학이 배동하여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여 그에게 번역해 전달했다. 듣고나서 사도미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신해혁명에 참가한 사람이다. 손중산선생을 존경하지만 ‘중화민국'이라는 네 글자에는 절대 호감이 가지 않는다.”

바로 중화의 ‘관'국이고 ‘민'과는 관계가 없다는 리유였다. 그는 “22년간 장개석과 ‘CC파’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 공산당이 령도한 이번 혁명과 신해혁명은 같은가? 만약 여러분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해야 한다. ‘중화민국'이란 낡은 간판이 벗겨져야 한다. 국호는 극히 장엄한 것이다. 한번에 제대로 고쳐야지 3년후에 고친다는게 말이 되는가? 옛말에 ‘명함이 바르지 않으면 말도 안되고 말이 순탄하지 않으면 말도 안된다’는 말이 있다. 여전히 ‘중화민국’이라고 불리면 어찌 천하의 백성들에게 알리겠는가?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당당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혁명은 승리했는데 국호도 감히 고치지 못하다니. 나는 략칭이라고 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하고 광명정대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을’을 쓸 것을 견결히 주장한다”고 말했다.

사도미당의의 말은 격앙되고 힘 찼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연회장에서는 갑자기 열렬한 박수소리가 터졌다.마인초도 잇달아 찬성을 표시하면서 괄호안의 략칭은 이도저도 아니고 말도 안되니 빼버리자고 말했다. 장란, 진숙통도 략칭에 대해 반대해 나섰다.

그때 법학전문가 심균유가 또 법학각도에서 해석을 하였다. 그는 “만약 대중들이 계속해 ‘중화민국’을 사용하면 그것은 그들의 일시적인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금지시킬 필요가 없다. 버젓한 립국 문서에 ‘중화민국'이라는 략칭의 을 넣는 것은 사실 법률상의 큰 실수가 될 수 있으므로 법률의 관점에 부합되지 않으며 또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세계 각국의 국호를 두루 살펴보면 자모의 략칭만 있고 립국문서에 실린 기타 략칭은 없다. 앞으로 문건을 쓰거나 국가의 명의로 다른 나라와 계약을 체결할 때에도 불편함이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나도 ‘략칭 중화민국’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가경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역시도 괄호안의 략칭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사람들은 ‘중화민국’에 대해 전혀 호감이 없다. 뒤떨어진 사람들이나 일시적으로 습관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다.” 그가 하문말로 발언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였기에 그의 비서 장명리가 표준어로 번역해 전달했다.

이날 18명 발언인가운에서 16명이 략칭을 사용하는 데 대해 반대했다.

끝으로 주은래는 여러 동지들이 발표한 의견을 종합하여 대회 주석단 상무위원들에게 보고하여 참고하게 한 다음 주석단 상무위원회에서 최종 결정을 짓겠다고 표시했다.

1949년 9월 27일 오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는 국호 아래에 있는‘중화민국'의 략칭을 빼기로 결정했다. 이때로부터 새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공식 명칭이 생겨나게 되였다.

출처: 인민정협보, 편역: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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