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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124]‘일원문화’시기의 연극창작(한영희편3)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18 16:26:10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24](한영희편3)

연변연극단 성립이후의 조선족연극 창작(1956-1978)

1956년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선전부의 지지하에 연변문공단 연극대를 기초로 하여 중국의 유일한 조선족연극단인 연변연극단이 성립되였습니다. 이 때로부터 조선족연극은 전업적인 극작가, 연출, 배우 및 무대예술사업자를 갖게 되였고 조선족연극은 진정으로 전업화 발전의 길을 걷게 되였으며 전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시기 주요한 연극 연출은 최문, 김재한, 김광출, 원주삼, 허동활, 최수봉(주로 번역작품) 등이고 주요한 극작가는 황봉룡, 최정연, 홍성도 등이며 주요 배우로는 강석필, 원주삼, 허창석, 홍춘식, 김광출, 리원식, 홍성도, 리영근, 김윤준, 정인덕, 곽정희, 최금순, 전정자, 한명숙, 전춘옥 등이고 무대미술가로는 차기석, 김영호 등입니다.

 
조선민족고전극 《춘향전》의 한장면(1956년).

연변연극단 성립초기 우선 고전연극 《춘향전》, 《심청전》 등 작품을 공연하였습니다. 그리고 번역극이 많았는바 공연한 주요한 작품을 보면, 《서안에서 장성을 바라보다(西望长城)》(1956), 《의사 보로위요브》(1957), 《뢰우》(1958), 《 홍기보》(1961), 《어부의 집》(1962), 《나는 병사다》(1962), 《누가 사위인가》(1962), 《젊은 세대》(1963), 《뢰봉》(1963), 《네온등아래에 선 초병들》(1963), 《절대 잊지 말자》(1964), 《남해장성》(1965), 《나날이 향상하자》(1974),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1975), 《단풍잎 붉어졌을 때》(1975), 《만수천산》(1976), 《침묵 속에서》(1978) 등이 있습니다.

동시에 창작극도 많았습니다. 창작, 공연된 주요한 장막극을 보면, 《장백의 아들》(1959), 《보통로동자를 위하여》(1960), 《광활한 천지》(1965), 《백산의 봄우뢰》(1973) 등이 있습니다.

이외 단막극도 창작, 공연되였습니다. 주요한 작품을 보면 《양돈장의 이른 아침》, 《낡은 길로 갈수 없다》, 《홍수》, 《부부지간》, 《외조리령감》등이 있습니다.

 
고전극 《춘향전》의 연출 김재한.

1956년 1월 30일, 연변연극단 설립의식에서 공연한 조선민족고전극인 《춘향전》은 연출은 김재한, 주요배우로는 허동활, 곽경자 등이고 무대미술은 차기석이였는데 당시 무대는 아주 수준이 높고 완정하여 전업성이 돋보였습니다. 이 연극은 후에 국가문화부에서 소집한 전국 제1차 연극예술축전에 참가하여 극목 종합 1등상을 수상하였고 김재한이 연출상을, 허동활, 리영근, 정인덕이 각각 연기 3등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는 아주 얻기 힘든 기회이고 성과였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 수도 북경에 들어가 공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자기 민족언어로 공연을 했음에도 이런 높은 영예를 받아안게 되였다는 것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수준높은 조선족연극창작 전문대오를 갖게 되였으며 발전장대하게 될 첫발을 내디디게 된 것이였습니다. 이는 조선족연극작품이 처음으로 수도 북경의 무대에서 공연된 것으로서 조선족연극이 민족무대에서 전국무대에로, 지방에서 중앙으로 급부상한 것으로 되며 조선족연극발전사의 빛나는 한페지로 됩니다.

1957년에 공연한 조선민족고전극 《심청전》도 뚜렷한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연출의 기법에서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무대설계, 무대미술, 복장, 조명 및 대소 도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높은 예술적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1년에 196차의 공연을 하게 되는 력사적기록을 창조하였습니다.

 
고전극 《심청전》(1957년).

1959년 새 중국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작된 8막으로 된 연극 《장백의 아들》은 사상내용의 깊이, 인물형상의 부각, 연극연기의 형식 등 여러 면에서 보아도 이 시기 연극예술의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최우수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장백산지구의 항일무장투쟁을 제재로 하고 적들의 심장 속에 들어가 지하공작을 하는 중국공산당원 박철의 영웅적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족연극발전사에서 리정비적인 의의가 있는 작품이며 따라서 조선족연극의 한단계의 성숙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장백의 아들》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밤중에 부상당한 지하공산당원 박철은 급촉하게 봉녀네 집문을 두드리고 까무러칩니다. 봉녀의 어머니는 박철을 부축해 집안에 호송해들이고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깨여난 박철이 여기에 온 뜻을 말하자 봉녀어머니는 마침 자기 딸 봉녀가 천인당약방의 하녀로 있다고 말합니다. 박철은 봉녀를 통해 천인당약방의 구체적인 정황을 자세히 알게 됩니다. 그후 박철은 천인당약방에 가서 자기의 친아버지이며 천인당약방의 주인인 박인달을 만나고 약방에 남아서 아버지를 도와 일합니다. 박철은 편리한 자기의 신분을 리용하여 늘 군수물자와 약품들을 유격대에 보내줍니다. 하지만 변절자 리원길의 밀고로 하여 박철은 귀중한 생명을 바칩니다

 
1959년에 창작한 장막연극 《장백의 아들》.

여기서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박철 역을 맡은 허동활을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허동활은 조선족의 제1세대 연극예술가로서 60여년의 연극인생을 살았습니다. 2007년 4월, 국가 인사부, 문화부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중국연극 탄생 100주년 기념 활동 에서 국내 저명한 연극예술가 30명에게 수여하는 국가특수공헌 연극예술가 영예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허동활선생은 1925년 3월 6일, 길림성 연길현 조양천 허촌에서 태여났습니다. 1939년 3월 보통소학교를 졸업하였고 1941년 부모님을 따라 흑룡강성 해림현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42년 목단강 장안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고 같은 해에 연길공업학교 광산과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47년 조양구문예선전대에 참가하고 1948년 3월에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연극배우로 활약하였습니다. 1956년 연변연극단이 성립된 후 선후로 배우, 연출, 부단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85년 정년리직하였습니다.

연변연극단에서 사업하는 기간 그는 중앙연극학원에 가서 학습하였는데 그는 연기를 하든 연출을 하든 그의 작품은 개성이 뚜렷합니다. 가장 중요한 개성은 어디에서 체현되였을가요? 그는 줄곧 스딴니체계를 중심으로 연극창작을 전개해 온 전형인물입니다. 그는 생활의 진실과 예술의 진실을 통일하는 것을 일관한 예술창작목표로 삼았습니다.

허동활선생은 60여년간 연변조선족연극예술창작에 종사하면서 체험을 기초로 한 표현예술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는 고전극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하면서 눈을 가리고 지팽이를 짚고 거리에 나가 봉사체험을 한 뒤로 무대에 올랐는 데 그가 무대에 오르면서부터 관중석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졌습니다. 가공창조의 흔적이라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의 진실한 연기는 관중들에게 깊은 공명을 안겨주었으며 환호성을 자아냈습니다.

 
표현예술가 연출가 허동활선생.

그는 작품의 연출을 하면서 배우를 선택할 때에도 특히 인물의 형상이 좋고 나쁜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격과 배우의 성격이 맞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배우와 각색의 통일을 추구하였고 배우들에게 이런 저런 모범동작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배우들로 하여금 차분히 각색의 처경에서 체험하고 생활하도록 하면서 배우와 각색의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허동활선생이 연출을 맡은 작품의 배우들에게서 표현이 과장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배우들마다 각기 자기 역할이 분명하였습니다.

그의 연출예술의 추구는 또 생활의 진실과 예술의 진실을 통일하는 것이였습니다. 다만 생활의 진실만 있고 예술의 진실이 없는 것은 또 연극예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술의 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페부에서 우러나오는 심중지언을 관중들에게 전하여 강렬한 공명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공명으로 또 관중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허동활선생이 연출을 맡은 장막극 《광활한 천지》 역시 그의 예술추구를 충분히 보여준 작품으로 되였습니다.

1965년 연극대의 창작인원과 배우들은 안도현 만보공사에 내려가 농민육종가 류창은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사적을 기초로 하여 농촌의 과학실험을 반영한 대형 장막극 《광활한 천지》를 창작하였습니다. 좌적 사조의 영향으로 하여 이 작품에는 도식화, 개념화의 경향과 계급투쟁확대화의 경향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하나의 사실주의연극가작이라고 평가됩니다. 여기서 《광활한 천지》를 창작한 저명한 극작가 황봉룡선생의 창작경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봉룡선생은 1925년 연길현(현재 룡정시) 차조구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고 도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가정의 경제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공부하면서도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였습니다. 1942년 일본 도꾜의 와세다상업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4년 4월 귀국하여 그는 목단강시 의약품배급특제회사에 취직했다가 일제의 강제징병에 끌려갔습니다.

극작가 황봉룡선생.

1945년 해방후, 목단강에 돌아와 목단강시 고려중학 3학년에 입학했습니다. 1947년 공부하는 기간에 창작한 연극작품 《광명》이 그의 처녀작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목단강시 민맹문공단에 들어갔고 1950년에 민맹문공단을 따라 연변문공단에 들어왔습니다. 1956년 연변연극단이 성립된 후 그는 직업극작가로 되였습니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서 소집한 소수민족작가좌담회에 참가하여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1957년에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63년에 중국연극가협회에 가입하였으며 1979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중국연극가협회 리사, 길림성연극가협회 리사,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였으며 1978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선거되였습니다. 그는 1985년에 정년퇴임하였습니다.

황봉룡선생은 다산작가로서 평생 장막극, 단막극 82편을 창작하였습니다. 그의 주요한 대표작은 장막극 《장백의 아들》, 《광활한 천지》, 단막극 《새각시》, 《양돈장의 이른 아침》, 삼로인 《예조리령감》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영향으로 하여 그의 대부분 작품은 일정한 시대적 제한성을 지니고 있는데 주로는 인물형상이 확대화되고 연극에서 짙은 혁명적 사실주의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1966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는 연변문학예술사업자련합회와 산하 각 문예단체를 해산시켰습니다. 연극단의 대부분 사람들은 농촌에 쫓겨가 로동개조를 하였습니다. 6년 후인 1972년 12월 20일, 연변조선족자치주 혁명위원회 정치부에서는 연변박물관, 연변연극단, 《연변문예》편집실을 회복한다는 통치를 발부하였습니다. 그후 연극단의 사람들은 륙속 극단에 돌아와 복직하고 연극창작활동을 진행하였습니다.

 
연변연극단에서 창작한 장막극 《백산의 봄우뢰》(1973년).

1973년에 창작된 연극 《백산의 봄우뢰》는 연극단의 사업이 회복된 후 창작된 첫 장막극입니다. 시대적 국한성으로 하여 작품의 내용은 계급투쟁을 반영한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 이 작품은 연길, 왕청, 도문, 안도, 훈춘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공연차수는 64차에 달하고 관중 연인수는 7만 1,950명에 달했습니다. 접수미학의 시점에서 본다면 당시 연변의 관중들은 얼마나 조선족연극예술을 기대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백산의 봄우뢰》는 독특한 력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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