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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32]조선족 연극의 전기적 인물 허동활(2)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2 14:26:04 ] 클릭: [ ]

3. 예술행정가 허동활

 
젊은 시절의 허동활선생.

허동활선생은 다년간 연극단의 살림과 운영을 위해서 예술행정가로서의 온갖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선생은 중국에 단 하나 뿐인 조선족 극단을 잘 꾸리고 지켜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배우와 연출 사업에 몰부었던 사랑과 열정을 이번엔 극단 단장이란 낯선 사업에 몰부었다. 흥취와 애착 때문에 배우와 연출 사업에 심취했다면 사명감 때문에 예술행정의 짐을 떠메고 조선족 연극을 위하여 있는 재능과 힘을 모두 바친 허동활은 1960년 연변연극단의 업무단장에 발탁(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으로‘연변연극단’해산됨)되였고 1982년에는 단장으로 임명되였다.

또 하나의 낯선 인생길이 허동활 앞에 펼쳐진 것이다. 연극단 단장에 부임한 후 그는 극단 건설의 설계도를 손수 그리기 시작하였고 하나 또 하나의 난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재치 있는 색시라도 쌀이 없는 밥을 짓기는 어렵다고 희곡이 없는 극단의 명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문제는 창작품을 틀어쥐는 것이 급선무였다. 56개 민족이 모여사는 중국의 광활한 땅덩어리우에서 소수민족으로 자기 민족의 작품이 있어야만 조선족 극단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살아나고 생명력이 지속된다는 것이 단장 허동활의 신념이요 일가견이였다. “연변연극단은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연극단체이다. 만약 연변연극단이 자기 민족의 생활을 반영한 연극을 창작못해내고 공연하지 않는다면 민족극단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하면서 허동활은 조선족의 현실생활을 그린 연극 작품 창작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의 예술 주장과 창조적 개성을 보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술행정가로서의 혜안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정기적으로 지방의 연극작가를 방문하여 그들의 창작 정황을 제때에 파악하였으며 때때로 연극 창작 회의를 열고 작가들의 작품 창작을 독려하는 한편 또 작가들과 함께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가 생활 체험을 진행하고 작가들의 애로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또 지방 작가들이 극본을 써오면 언제나 만강의 열정으로 대했고 밤을 패가며 작품을 통독한 후 수개 의견을 제기하거나 작가와 함께 수개에 달라붙기도 하였다. 선생이 연극단 단장으로 있은 사이 극단은 차츰 번역작품을 위주로 하던 국면에서 벗어나 창작품을 공연하는 것으로 회수를 늘여 조선족 연극단으로의 위상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72년 극단에 복귀한 후 선생은 희곡작가 한원국선생과 함께 안도의 량강, 룡정의 백금, 왕청의 대흥구, 동불사 등 연변의 크고작은 저수지를 거의 다 답사하면서 연변의 조선족 생활을 반영한 장막 연극  <백산의 봄우뢰>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저 멀리 장백산 산맥이 굽이치고 소나무가 무성한 언덕 아래 진달래가 만개한 무대 배경, 연극이 시작되면 조선민족 복장을 차려입은 배우들이 저수지 건설에 힘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조선민족 음악 장단과 절주가 다분한 “백산에서 호두산까지 무지개 걸렸구나”의 주제가에 맞춰 저수지 건설을 축하하여 너울너울 춤을 출 때 극장은 그야말로 환호의 물결로 설레였다. 장막 연극  <백산의 봄우뢰>는 비록 시대적 락인이 찍혀 많은 유감을 남겼지만 그러나 십년 동란 이후 연극단의 자체 작품 창작의 서막을 열어놓고 연극단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였을 뿐만 아니라 선생에게 있어서는 민족예술의 길을 재차 확인하는 중요한 실험의 장으로, 우수한 예술행정가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로도 되였다.

선생은 장막극 창작 뿐만 아니라 연변의 대다수 관객들이 농민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농민들이 즐겨보는 삼로인, 재담, 대창극, 촌극 등 형식으로 작은 무대를 꾸며 농민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여 극단은 문화부로부터 농촌 하향 공연 선진집단으로 표창받았을 뿐만 아니라 배우들이 농민들과 두터운 인연을 맺게 되여 인물형상을 창조하는 데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선생은 또한 연극단의 지식구조 개변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시대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극단을 건설하려면 단순 실천형 예술가도 필요하지만 명실공히 리론과 실천이 결합된 높은 차원의 예술인재가 더욱 수요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선생은 싹수가 보이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북경, 상해 등지에 가서 연수를 받도록 하였는데 리동철, 전득주, 방미선은 북경 중앙연극대학 연출학부, 방승한, 전성환은 상해연극대학 무대미술학부에서 연수하고 돌아와 극단에 전례없는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었고 후날 그들은 모두 조선족 연극예술의 중견으로 되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생은 연변대학의 정판룡, 서일권 등 저명한 교수들을 극단에 모셔 서양, 중국 연극사와 연극 사조에 대한 그들의 강의를 적극 청취함으로써 창작일군과 배우들의 문화 수양과 연극 리론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1980년과 1981년 사이에는 또 중앙연극학원 연출학부의 장부침교수와 라금린교수, 마기교수와 중앙발레무극단의 김태홍선생을 초청하여 연출리론, 창작리론, 무대미술리론 등 강의를 청취한외 또 극목 련습을 통한 실제적인 훈련의 장도 마련하여 극단의 발 빠른 성장을 도모하였다.

 
필자와 함께 있는 허동활선생.

극단의 부모 역에 섰던 선생은 극단 단장으로서 많은 희생과 봉사를 감내해야 했다. 좋은 작품 앞에서는 연출가로서의 욕심을 버렸고 영예 앞에서는 지도자로서의 넓은 아량을 보이면서 자신의 희생 정신과 연극 정신으로 극단 배우들을 감화시켰고 재치 있는 리드로 극단을 단합시켰다. 연극단 단장 8년 사이에 선생은 자신의 끈질긴 노력과 열정과 재능으로 연변연극단을 중국 전역에서도 명망 있는 우수한 극단으로 발돋움시켰고 수차 길림성 문화계통 선진집단의 영예를 받아안도록 이끌었다.

4. 연극 인생 허동활

허동활선생은 연극외에는 아무런 흥취도 없었다. 술 마실 줄도, 트럼프 칠 줄도 모르고 마작과는 아예 인연이 없었다. 그렇다고 낚시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도장을 찾아서 빙빙 돌아가는 재미와 멋도 즐길 줄 몰랐다. 그러나 선생에게도 당신 특유의 즐거움이 따로 있었다. 고독을 즐기는 그에게는 고독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찾을 줄 아는 여유로움이 있었으니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의 곁에는 항상 너무나도 많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세계 명작중의 가지각색의 이야기의 주인공들, 고금중외 연극 정품중의 각양각색의 인물들과의 마음속의 대화가 그렇게 정답고 재미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고독이 선생의 즐거움이라면 산책은 고독과 나누는 유일한 취미 생활인 셈이다. 연길시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부르하통하 유보도는 선생의 산책길이였다. 아침 저녁으로 홀로 이 길을 조용히 산책하는 선생의 발걸음이 무겁지만은 않았다. 그 모습 또한 애처롭지만도 않았다. 후회없는 인생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긍지와 자랑이 그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국가에 특출한 기여를 한 연극예술가’30인에 선정된 허동활선생(중간).

촌놈이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되자 너무 좋아서 꿈속에서도 벌씬 웃었다는 선생, 배우에서 연출가로 되자 기쁨보다도 걱정이 태산같았다는 선생, 단장으로 되자 무거운 책임감에 신경이 곤두서서 밤잠도 설쳤다는 선생, 이것이 바로 그의 진면모이다. 밤낮으로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함께 일해왔던 오랜 상급이 전근하자 지기를 보내는 아쉬움에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번의 폭음으로 주정도 부려보았다는 선생, 인생의 마지막까지 서로 아끼면서 살아가기를 천만번 약속했던 부인이 중년의 막바지 언덕에서 훌쩍 떠나버리자 땅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는 선생, 십년 동란의 혼잡 속에서 육체의 시달림과 마음속 고통을 달랠 길 없어 목숨을 끊을가도 생각해봤다는 선생, 젊은 연출가들이 전국 연극콩쿠르에 나가서 큼직큼직한 상을 받아올 때면 흘러간 세상이 야속하고 무정하구나 하고 깊은 한숨도 쉬여봤다는 선생이였다. 여생에 우리 조선족 연극이 걸어온 길, 무대 뒤에 널려있는 갖가지 숨은 일화를 두루두루 정리하고 다듬어보고 싶다고도 하시던 선생이 2008년에는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발표하였던 예술인 일화, 작품평, 연극리론, 희곡을 정리하여 《인생이 녹아 연극이 되고…》란 제목의 허동활문집을 출간하였다.

장장 60여년을 희망에 부풀어, 정열에 넘쳐 무대를 집으로, 연극을 인생으로 살아오신 허동활선생은 정녕 연극을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행복할 때나 고달플 때나 오로지 조선족 연극인의 옹골찬 삶을 영위하셨다. 선생은 자신의 사랑과 신근한 로동으로 길림성로력모범, 전국 문학예술계 대표, 연변 정협위원 등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2007년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중국 연극 탄생 100주년 기념 경축 모임에서는 ‘국가에 특출한 기여를 한 연극예술가’30인에 선정되여 조선족 연극을 위해 영예를 빛내고 자랑을 떨쳤다. / 글 방미선 /편집 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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