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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8)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2 18:50:18 ] 클릭: [ ]

▧김동수

2. 선택

한락연의 자취를 따라 상해에 발을 내디디는 첫 순간부터 나는 생기와 활력으로 차넘치는 세계 속의 국제화 도시―상해의 화려한 멋과 빼여난 매력에 푹 빠졌다.

금시 하늘을 찌를듯이 아득히 솟은 동방명주탑에 올라서서 굽어보니 배고동소리, 경적소리, 노래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들끓는 황포강은 수풀처럼 솟은 초고층 건물 사이로 새 세기의 가장 웅장한 교향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황포강 어구에 자리 잡은 중국 최대의 항구도시 상해, 지난 세기 한때는 제국주의 렬강들의 쟁탈지로 되여 외국 조계지가 가장 많은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

영국조계지에 들어가면 영국령사관이 정부로 되여 영국 법대로 통제하고 프랑스조계지는 프랑스식 대로, 미국조계지는 미국식 대로 통치하고 관리하였다. 하여 상해는 수많은 지성인들과 혁명가들한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이고 은신처였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에는 수많은 조선의 열혈청년들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조국 독립의 방략을 탐색하고 칠색 미래를 그려보던 도시였다.

바로 그러한 때 한락연도 룡정의 오지에서 상해에 왔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차회사의 차장으로도, 인쇄공장의 식자공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화가가 되려던 동년의 꿈을 잊지 않았고 여러가지 사회활동에도 참가하였다.

한국 근대사에는 리동휘가 공산당의 창립자, 선구자로 기록되여있다. 따라서 리동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한락연이 이 때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접촉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1921년 5월 20일, 리동휘 등은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건하였다. 한락연은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당시 상해 한국림시정부와 조선공산주의 단체 각파, 그리고 여러 민족주의 단체 각파 사이에는 서로 모순과 알륵이 치렬했고 형세가 매우 복잡하고 준엄하였다. 한락연은 내심으로부터 곤혹과 의혹, 회의를 느꼈다.

채화삼이 창간하고 주필을 맡은 《향도》 잡지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1922년 7월에 중국공산당 제2차 대표대회에 참가한 중국공산당 조기령도자의 한사람인 채화삼(蔡和森)은 9월에 《향도》(向导)를 창간하고 주필을 담당했다. 《향도》는 적극적으로 당의 민주혁명 강령과 반제, 반봉건의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전파하였다.

1922년 채화삼은 채원배(蔡元培)의 소개로 상해미술전문학교에서 1년간 사업하였다. 채원배는 상해미술전문학교리사회 리사였다. 그 때 이미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한락연은 《향도》의 애독자로 되였고 채화삼도 알게 되였다.

료녕성위당학교에서 이미 퇴직하고 한락연 연구에 조예가 깊은 라점원(罗占元)교수는 한락연은 가능하게 1923년에 채화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상해에서의 4년은 한락연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였다. 시골에서 자란 한락연은 국제도시 상해에서 자신의 시야와 안계를 넓히였고 당시 중국에서 가장 정규적인였던 미술학교에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상해시제2당안관은 번화한 외탄 황포강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황포강 바로 건너편에 동방명주탑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일행 네사람이 우르르 당안관에 들어서니 사업일군들이 의아해했다. 게다가 그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조선어를 주고받으니 더욱 의심하고 수상쩍어했다. 당안관 출입은 매우 엄격했는데 보안일군들이 마치 항공기 안전검사를 하듯 샅샅이 뒤적이였다. 당안을 찾아보고 검색하는 설비는 최고로 현대화했는데 이미 필림으로 수록한 것을 독자들이 특제한 컴퓨터에 넣고 돌리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볼 수도 있고 또 직접 복사도 할 수 있었다.

‘한광우’로 기록된 화명부

나는 남경미술학원 마선생이 사전에 전화로 알려준 당안 번호에 따라 손쉽게 1921년 상해미술전문학교의 한락연의 등기부와 학적부를 찾을 수 있었다.

한락연의 이름은 한광우로 등록되여있었으며 입학 시기는 1921년 3월로, 입학시의 년령은 21세로, 본적은 길림성 연길현으로, 주소는 상해 프랑스조계지 보창로 보강리 23호(上海法租界宝昌路宝康里23号)로 기재되여있고 학제가 3년인데 2년반만 수업을 하고 1923년 1월에 출석률 미달로 퇴학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무엇 때문에 퇴학했을가? 한락연이 직장을 찾아 등록금을 벌어야 하는 원인도 묵과할 수는 없지만 주요한 것은 여러가지 사회활동과 혁명활동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라고 많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은 추론하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한락연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니 긍적적인 대목이라 하겠다.

사업일군들은 나의 요구 대로 필요한 부분을 복사하여 ‘상해제2당안관’의 도장을 찍어서 넘겨줬다. 한락연의 당안을 찾아 복사한 첫 사람일 것이다. 그 후 많은 연구자들과 여러 전시관들에서 이 복사본을 사용하였다.

한락연이 드나들며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 유적은 지금의 상해시 마당로 306롱(弄) 4호에 위치해있었다. 이전에는 보강리 4호라 불렀는데 이곳은 1925년에 건설된 중국 근대식 석고문(石库门) 구조의 건축이였다. 대한민국림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창설되였는데 수차의 이전을 거쳐 1926년에 보강리 4호로 옮겨왔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홍구공원 폭발사건이 있은 후 부득불 상해를 떠났다. 대한민국림시정부는 이곳에서 약 7년간 활동을 하였는데 집은 완전하게 잘 보존되여있었다. 1990년 유적은 상해시 로만구정부의 크나큰 지지와 방조, 그리고 한국독립기념관과 한국 삼성물산주식회사의 후원으로 수복을 거친 후 수많은 해내외 유람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되였다.

상해시 포동남로 855호 세계광장 28층에는 상해 염보항사회공익기금회(上海阎宝航社会公益基金会)가 자리 잡고 있는데 넓다란 사무실에서 염명광(阎明光) 리사장을 만났다.

100여년전 염보항선생은 심양에서 ‘봉천고아학교’를 세우고 무료로 많은 고아들과 빈곤한 아이들을 육성하였다. 항일전쟁이 제일 곤난한 시기에 중경에 있던 염씨네 집은 명실공히 많은 항일지사와 사회 각계 진보적 청년들의 활동장소와 피난소였다.

염보항선생의 유지를 계승하고 자선사업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때 미국에 거주하던 장학량 장군과 염보항선생의 자식들인 염명복과 염명광녀사는 상해염보항사회공익기금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성립된 20여년래 기금회는 교육, 의료, 불구자 구제, 양로, 재해지구 구제 등등 여러 방면에서 의의 있는 활동을 벌려 전사회적으로 찬양하고 신임하는 명실에 부합되는 자선기구로 되였다. 지금까지 구제한 물자와 현금은 인민페로 수억원에 달하고 우리 나라 13개 소수민족지구가 그 혜택을 입었다고 하였다.

염명광 리사장(오른쪽 사람)이 룡정시 북안소학교 박경자 교장에게 교학의기를 증정하고 있다.

90여세인 염명광녀사는 실제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씩씩하고 정정해보였다. 나는 한락연과 그 사이 우리들이 벌려온 사업들을 하나하나 설명해드렸다.

그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한락연을 한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는 아버지 염보항과 한아저씨는 그 누구보다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피력하였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본 사람은 본인 밖에 없는데 1939년 중경 시절에 한아저씨는 늘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고 하였다.

붙임성이 좋고 성격이 쾌활하고 사진도 찍고 그림도 척척 그리는 한아저씨를 아이들은 무척 따랐다고 한다. 한락연은 이름처럼 락천적이였고 늘 코노래를 흥얼흥얼했는데 때로는 고향 룡정에 너희들과 같이 귀여운 자식이 있다고 눈물이 글썽해하던 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염명광녀사는 회억하였다.

염명광녀사는 당시 한락연에게서 배운 우리 민족의 전통민요인 〈도라지〉와 〈아리랑〉 곡조를 아리숭하게나마 기억하고 그 자리에서 한마디 읊조리였다. 그러면서 두 가족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 세월과 세기를 넘어온 두 혁명가족의 인연이라고 강조하면서 룡정에서 진행되는 한락연기념활동에 꼭 참가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한아저씨의 고향 건설을 위하여 힘자라는 대로 돕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염명광 리사장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그의 건강을 축복하며 문을 나섰다.

후의 일이지만 염명광 리사장은 룡정에 와서 락연공원을 둘러보고 락연 동상을 첨앙했으며 약속 대로 룡정시 북안소학교에 가치가 5만여원에 달하는 교학의기를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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