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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서봉산, 최영화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9 12:43:28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7군―사급 이상 장령

서봉산(徐鳳山, ?—1939): 동북항일련군 제7군 경제부 부장, 당특별위원회 위원

원명은 김세일(金世日)이고 리양춘(李陽春)이라고도 부르며 흑룡강성 주하현 오길밀에서 태여났다. 1929년말에 중공북만특별위원회의 파견을 받고 최석천과 함께 요하에 가 중공요하현위원회의 설립을 추진시켰다. 1930년초부터 선후하여 중공요하현위원회 위원, 중공요하구위원회 서기가 되였고 1933년 2월 중공요하중심현위원회 서기가 되였다. 1933년 봄과 여름에 최석천 등과 함께 보청현 소성자에서 군정강습소를 꾸렸고 10월에 최석천 등 6명으로 구성된 특무대를 조직하였다.

1934년 2월 3일,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를 재편성하였고 1935년에 요하반일회 총회장을 겸하였다. 1936년 3월, 중공요하중심현위원회가 중공하강특별위원회로 개편되자 상무위원 겸 조직부 부장이 되였다. 11월에 중공호림현위원회 서기 겸 호림현반일회 회장이 되였다. 중공호림현위원회 서기로 있는 기간에 2개의 구당위원회, 11개의 당지부를 건립하였고 현내 각지에 반일회, 부녀회, 공청단 등 대중단체들을 세웠다. 1938년 6월, 동북항일련군 제7군 당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였고 9월에 동북항일련군 제7군 경제부 부장이 되였으며 항일련군 제2로군 총부 교통참 호림참 주임이 되였다. 1939년 6월, 변절자 정로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최영화(崔榮華, ?—1936):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제2사 정치부 주임 겸 당위원회 서기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의 주요 성원중의 한사람으로 1935년 9월 18일 요하민중반일유격대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4퇀으로 개편되자 비서장으로 되였다. 1935년 9월에 있은 신흥동전투를 거치면서 호림과 요하 지구에서 높은 성망을 얻은 제4퇀이 1936년 3월 25일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제2사로 개편되자 사 정치부 주임 겸 당위 서기가 되였다. 1936년 11월 15일, 제4군 제2사가 동북항일련군 제7군으로 개편되자 제2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그러나 하강특별위원회 서기 박원빈의 직무 해임 사건에 말려들어 그 해 11월에 중공하강특별위원회에서 주최한 제2사 당과 군 지도간부회의에서 최석봉(崔石峰, 제2사당위 위원, 제4퇀 정치부 주임), 량의봉(梁義鳳, 제2사당위 위원), 고원명(高遠明, 제2사 군수부장) 등과 함께 직무를 해임당하고 당적까지 취소당하였다.[최석봉 등이 조직의 통일적인 지도를 반대하여 나설 때 주기창(周其昌, 제2사 사장)은 호림에 가서 패거리를 무으며 일부 산림대를 규합하여 이른바 제1사를 조직한다. 하지만 정로암(鄭魯岩, 제7군 정치부 주임, 후에 변절)은 이를 소극적으로 방관하다가 자기도 호림에 가서 패거리를 무어 제7군의 단결을 파괴하고 지도간부를 암해한다. 바로 이 시기에 이른바 박원빈사건이 터졌다.] 1936년 12월 13일, 조직의 감시를 받으며 요하현 석두하자(石頭河子)밀영에서 한창 반성하는중에 일본군과 위만군으로 무어진 적 ‘토벌대’의 돌연 습격을 받아 고원명 등과 함께 희생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7년 12월 31일부터 1938년 1월 5일 사이에 소집된 중공하강특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고원명과 함께 억울한 루명을 벗었다. (자료 출처: 《동북항일련군명록》, 《흑룡강항일투쟁인물록》)

/박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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